life 제 180호 (2020년 05월)

형식 뛰어넘는 드로잉, 잡화의 미학

기사입력 2020.04.24 오후 04:38

Beyond the painting 14-7, mixed media, 185.5x231x14cm

Beyond the painting 14-7, mixed media, 185.5x231x14cm


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 김을 


[한경 머니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미학이다. 버려져 굴러다니던 장난감이나 부스러기 조각도 다시 태어난다. 몇 가닥의 선묘나 터치의 마법이다. 적어도 김을 작가에게 드로잉은 그 자체로 작품이 된다. 드로잉은 그의 몸과 정신을 표현하는 또 다른 자화상이다.


김을 작가의 드로잉 언어는 형식적인 장르의 한계를 보기 좋게 뛰어넘는다. 회화, 조각, 설치 등 다양한 경계를 아우른 그만의 작품 세계는 의외의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스펙트럼을 보여 준다. 엉성하고 무심한 듯하지만 섬세한 짜임이 일품이다. 대학원까지의 금속공예 전공 이력도 한 몫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드로잉 작업을 통해 새로운 좌표를 가진 나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나와 세계와 그림 간에 얽힌 보다 정교한 지도를 작성했다고 볼 수가 있었다. 수많은 좌표들이 얽힌 나의 세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들 모두가 의미 있는 것이었고, 그 속에서 특별한 시각으로 주제를 잡아내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 보였다. 전체를 보고 그들의 관계항을 주목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고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정하게 정돈된 것보다 이것저것 섞인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지 않을까. 인생이나 자연이나 대책 없이 뒤섞임 위에 존립하지 않나.”


김 작가의 드로잉북 <마이 그레이트 드로잉스(My Great Drawings)>(2011년)에서 한 말이다. 그러면서 “나의 드로잉은 잡화(雜貨)”라고 강조해 왔다. 사소한 것들이 무작위로 섞여 의도하지 않은 주제들을 작품에 옮기는 과정에 충실하고 있다. 작가로서의 정신, 인생, 세계 심지어 우주 역시 그의 작품에선 한낱 ‘자연스러운 잡화’로 희석된다. 내용도 형식도 서로 뒤섞여 어느 화파에도 속하지 않은 화법의 잡화(雜畫)가 완성돼 왔다. 처음 출발은 자화상이었다. 초창기부터 특별한 의식처럼 열중했던 자화상 그리기는 100여 장이 넘어서면서 “그 안의 내 얼굴에 조상의 얼굴이 그대로 묻어나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근원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초창기의 자화상 작업(1994~1997년)은 가족사로 자연스럽게 옮아와 <혈류도(혹은 혈시도)> 시리즈(1997~2002년)로 확장됐고, 2002년도 대안 공간 사루비아다방 전시로 마무리됐다. 이후부터는 일명 ‘드로잉 프로젝트’가 새롭게 시작됐다. 폭발적인 에너지가 분출되듯 여느 예술 장르에 얽매이지 않은 김 작가만의 자유로운 형식과 특유의 유연함은 몸의 감각들과 함께 고스란히 묻어난다. 작업 속도도 빠르고 작업량도 엄청나다. 삶을 감싼 거대한 세상을 작은 퍼즐조각으로 파편화시킨 것처럼 남다른 감각이 눈부시다. 그에게 드로잉은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류(血流)이자, 정신과 육체를 지탱하는 연료다. 그래서일까. 그는 조각난 드로잉 파편이 곧 ‘작은 우주이자 거대한 자화상’이라고 강조한다.


김 작가에게 지금의 드로잉 시대를 열게 한 결정적 계기는 199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에 작업실 화재로 온힘을 다 바쳤던 자화상 시리즈와 400여 점이 소실됐다. 참으로 허망하기 그지없을 사고였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아깝기는커녕 오히려 한편으론 시원했단다. 자신에게 집착했던 것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대단한 배포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주변의 다양한 요소들에 집중하는 그만의 화법은 볼수록 매력적이다. 탈장르이면서 복합장르이고, 동시에 새로운 장르를 추구해 온 김 작가의 드로잉은 풍부한 에피소드와 스토리텔링으로 무장하고 있다.


이를테면 전시장 안에 지은 작은 집 모형 작품이 대표적이다. 작품명은 <트와일라이트 존 스튜디오(Twilight Zone Studio)>’다. 제목에서 ‘Twilight’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사전적으로는 대략 황혼(기), 땅거미, 쇠퇴기, 불가사의한, 비밀스러운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자신만의 작은 스튜디오가 지닌 성격을 설명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그 집 안에 들어서면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마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시계토끼를 따라 들어간 것처럼 별세계를 만나게 된다. 맞은편 벽에 걸린 그림 주변으로 앙증맞은 책상과 테이블, 크고 작은 틀과 상자들, 마네킹이나 갖가지 인형, 재미난 오브제들이 자리 잡고 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서 그 재미에 푹 빠지게 된다.

국립현대미술관, ‘2016 올해의 작가’ 수상 기념전. 갤럭시(galaxy), 드로잉 1450여 점 가변 설치, 620×2700cm,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2016 올해의 작가’ 수상 기념전. 갤럭시(galaxy), 드로잉 1450여 점 가변 설치, 620×2700cm, 2016년

번뜩이는 허허실실(虛虛實實)의 감성미학, 김 작가의 작품이 지닌 또 다른 매력이다. 그는 작품의 주제를 돋보이게 하거나 깊이를 더하려는 노력에 치중하지 않는다고 선을 긋는다. 특히 정치적 제스처 역시 의도적으로 피한다. 작품 자체가 일상의 투영이기 때문이다. 소재는 즉흥적이고, 매체는 거의 무의식적 혹은 자동적으로 결정하며, 작업 과정은 잡념 없이 최대한 열중한다. 굳이 작품에 담고 싶은 메시지를 꼽으라면 ‘나란 누구인가?’ 정도다. 작가의 길에 들어선 이래 온갖 다양한 표현의 영역을 넘나들었지만, 일련의 모든 작품들을 통틀어 인생의 거대한 자화상을 완성해 가고 있는 여정에 한창인 셈이다.


“나와 관련된 나의 외부세계 또는 내면세계에 관한 모든 것들을 전부 다 끄집어내서 그려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가장 적합한 매체가 드로잉일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나에게 드로잉은 사실 드로잉 그 이상이다. 특히 현대미술에 있어서는 드로잉이 어떤 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현재 내가 발견하고, 느끼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드로잉이란 매체 역시 그림 이상의 조형적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드로잉을 대하는 내 태도에서 아주 손쉽고 자유스러우며, 솔직하고 비정치적으로 양심에 거리낌 없이 그려 낸다는 점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김 작가는 늘 공정하고 폭넓은 관점으로 바라본 주변 세계의 표정들을 채집하고 있다. 최근의 시리즈는 그 종합판이다. 현실과 비현실, 삶과 죽음,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감성 등의 중간지대가 그만의 트와일라이트 존이다. 실제로 작가의 작업실도 이 작품과 거의 흡사하다. 삶의 실천 방식으로써 드로잉이 채택된 이유는 간단하다. ‘나를 중심으로 짜인 세계의 전모를 한 번 드러내 보자’는 삶의 자세다. 평소 “뼛가루로 빚은 눈물 한 방울이 나의 마지막 드로잉이 될 것이다”라고 강조한 그의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점도 그 이유다. 그래서 김 작가에게 드로잉은 자신의 모든 것을 세상에 꺼내놓는 절실한 수단이다.


김 작가의 드로잉 하나하나는 꼭 짧은 시어(詩語)를 닮았다. 공중에 흩어진 무수한 낱말들이 제각각의 의미를 품고 내려앉아 견밀한 문장으로 태어나는 과정과도 흡사하다. 그의 드로잉 작품들은 부지불식간에 낚인 단어들이 어떻게 우리의 가슴에 스며들어 똬리를 틀 수 있는가를 확인시켜 준다. 나를 둘러싼 세계를 전부 드러내고 싶은 작가적 욕심은 적어도 그에겐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유익한 창작 방식이 되고 있다. 회화, 드로잉, 사진, 판화, 입체, 설치, 퍼포먼스 등을 넘나드는 그의 작품 세계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2016년)과 ‘이중섭미술상’(2018년)을 수상하며 빛을 발하고 있다. 그의 입지에 비해 작품 가격은 아직 높지 않은 편이다. 전시 가격 기준 평면회화 100호(162.2×130.3cm)는 2000만 원, A4 크기 드로잉은 100만 원 선이다.


아티스트 김을은…

형식 뛰어넘는 드로잉, 잡화의 미학
1954년생. 원광대 학부에서 금속공예와 홍익대 대학원에서 귀금속을 전공했다. 졸업 이후 한동안 금속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1986년부터 회화로 전향했다. 김을 작가의 작품은 강한 주제의식이 반영된 초기의 자화상 시리즈를 시작으로 산(山)을 소재로 한 대자연의 독창적인 공간 해석 등 무게감 넘치는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2000년대 이후에는 회화, 오브제, 사진, 입체설치 등의 다양한 장르가 혼합된 새로운 형식의 드로잉 작업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2016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최종 3인의 후보에 선정됐고, 이후엔 독일 쾰른 등에서 국제적인 활동 역량을 펼치고 있다. 1994년 서울 금호갤러리를 시작으로 2016 올해의 작가상(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18 이중섭미술상 수상 개인전(조선일보 미술관), 2017 스리 스텝 투 더 레프트, 원 스텝 포워드(독일 쾰른 초이 & 라거 갤러리), 2018 트와일라이트 존 스튜디오(독일 쾰른 쿤스트라움) 등 25회의 국내외 개인전을 가졌다. ‘2018 이중섭미술상’(조선일보 주최)과 ‘2016 올해의 작가상’(SBS·국립현대미술관 공동 주최)을 수상했으며, 2011 <마이 그레이트 드로잉스(My Great Drawings)>를 비롯해 7권의 드로잉북이 출간됐다. 참여한 레지던시는 2009 PSB베이징(중국), 2009 경기창작센터 파일럿프로그램(안산), 2019 경주국제레지던시(경주) 등이 있다.


김윤섭 소장은…




김윤섭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2019 안양국제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정부미술은행 운영위원, 인천국제공항 문화예술자문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숙명여대 겸임교수, 계간조각 편집장, 2020 경주국제레지던시아트페스타 전시감독,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등으로 활동 중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0호(2020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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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20-05-26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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