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김수정 기자]인터뷰로 만난 뮤지컬 배우 카이는 ‘모범생’보다는 ‘모험생’에 가까웠고, 온실 속 화초처럼 예술을 탐미하기보다는 영화 <위플래시>의 주인공처럼 치열하게 예술을 연마하는 사람이었다. 도대체 그에게 예술은 무엇일까. 뮤지컬 <베르테르> 연습에 몰입 중인 카이를 만나 이야길 나눠 봤다. 사진 이승재 기자 | 장소 협찬 더스크(DUSK)


무대 위 카이의 모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단지 ‘실력이 빼어나다’, ‘감동적이다’라는 말로는 뭔가 입체감이 부족해 보인다. 그렇다면 그 틈새를 이 단어로 채워 보는 건 어떨까. ‘우아하다.’ 그렇다. 카이의 무대엔 항상 그만의 우아함이 묻어난다.


세계적인 무용 비평가 사라 카우프먼은 저서 <우아함의 기술>에서 “우아한 사람은 우리의 이상적 자아이자 세상에서 편안하게 존재하고 싶은 우리의 꿈을 구현한 인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아한 사람, 남을 의식하지 않고 편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사람, 평온해 보이는 사람에게 감동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람들이 카이의 무대에 감동하는 이유도 흡사하다. 그의 퍼포먼스엔 인위적인 맛이 없다. 자연스럽고, 섬세하며 압도적이다. 여기에 성악으로 빚어진 깊은 음색과 발성, 탄탄한 연기력까지 더해지면서 그는 국내 최정상 뮤지컬 배우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필모그래피도 화려하다.


서울예고를 수석 졸업한 후 서울대 성악과 졸업, 같은 대학원에 재학하며 최고의 성악 엘리트 코스를 밟은 카이는 지난 2008년 첫 앨범 <미완(未完)>을 내놓고 팝페라 가수로 데뷔했다. 이후 2011년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를 통해 뮤지컬에 발을 들인 뒤 <삼총사>, <아리랑>, <더 라스트 키스>, <프랑켄슈타인>, <벤허>, <엑스칼리버> 등 대작 뮤지컬의 주인공을 연달아 꿰차며 승승장구했다. 그 기세를 몰아서 오는 8월 뮤지컬 <베르테르> 20주년 기념 공연의 주인공 베르테르로 분해, 또다시 ‘인생캐 경신’을 예고하고 있다.


뮤지컬 <베르테르>는 ‘베르테르’와 ‘롯데’의 숭고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원작으로 한 한국 창작 뮤지컬이다. 이번 작품에서 카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애절함, 절망, 그리고 희망을 오가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약해 보이지만 깊은 여운을 남기는 ‘베르테르’의 복잡한 내면을 그만의 섬세한 연기로 선보일 예정이다. 과연 그가 그려낼 베르테르는 어떤 모습일까. 아울러 배우의 삶 외에도 후배 양성, 유튜버 활동, ‘뮤드림 프로젝트’ 등 훈훈한 나눔 활동 등 변화무쌍한 그의 일상을 엿들어 봤다.


우선 뮤지컬 <베르테르> 얘기부터 해 보죠. 20주년 공연의 타이틀 롤을 맡게 된 소감이 궁금해요.

“감사하죠. 사실 예전부터 주변에서 ‘카이, 정기열이란 사람은 참 베르테르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는데 실제로 베르테르를 연기할 수 있게 돼 더 기쁩니다. 무엇보다 이번 시즌이 20주년 기념 공연이기도 하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힘든 시기에 이런 무대가 주어졌다는 것에 더 감사하고, 애틋하죠.”


과거에 ‘알베르트’ 역할을 제안 받고, 고사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네, 맞아요.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뮤지컬에 데뷔하고 얼마 안 된 시점이었어요. 뮤지컬 경험도 거의 전무했고, 소속사도 없었던 때인데 <베르테르> 제작사 측에서 먼저 연락을 해 와 알베르트 역할을 제안하셨어요. 고민 끝에 고사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제가 좀 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해요. 다시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돼 정말 다행입니다. (웃음)”


고사하신 이유가 궁금해요.

“사실 제가 오래전부터 이 작품을 무척 하고 싶었어요. 2003년에 엄기준-김소현 페어로 처음 뮤지컬 <베르테르>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베르테르 역할을 해 봐야지’라고 마음먹었죠. 물론, 알베르트 역할을 제안해 주셨을 때 정말 좋았어요. 다만, 왜 그때 고민이 됐나 생각해 보니 제가 ‘베르테르’란 인물의 감성을 깊게 이해하고 감동했기에 그 감성을 오롯이 느끼고 싶다는 열망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저와 닮은 점도 많고요.”


어떤 점들이 본인과 비슷한가요.

“베르테르라는 인물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의 표제를 꼽자면 ‘질풍노도’라고 생각해요. 조광화 연출님도 그 부분을 언급한 바 있고요. 아시다시피 전 이제 어린 나이도 아니고, 뮤지컬 배우로 10여 년 이상 활동하면서 기성배우로 자리 잡았죠. 하지만 아직도 저 역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어요. 일도, 사랑도, 모든 것에서요. 그런 면에서 베르테르와 많이 닮은 것 같아요. 무엇보다 저는 베르테르가 참 편해요. 베르테르 대사를 보면 굉장히 시문학적인 대사가 많은데 어색하다는 느낌이 없어요. 저 역시 책을 좋아하고,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니까요. 그래서인지 나약하지만 계몽적이고, 예술적인 감수성이 풍부한 베르테르의 말과 행동이 제겐 지극히 현실적인 표현이자 감정이라고 느껴져요.”


다른 점이 있다면요.

“음, 저는 생존 본능이 강한 편이라 베르테르와 같은 선택을 할 것 같진 않아요. 다만, 저는 그의 자살을 단지 나약하다고 받아들이진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누구보다 강렬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사랑과 자기 목숨을 바꿀 수 있는 것. 그런 건 보통의 용기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 아닐까요.”


요즘 한창 연습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하루 일과 및 팀 호흡은 어떤가요.

“거의 매일 연습하고 있어요. 보통 정오에 시작해서 8~9시간 정도씩 연습에 매진합니다. 아직은 서로 알아가는 단계지만 진도도 생각보다 빠르고, 팀워크도 좋습니다. 좀 다른 얘길 수 있는데 아무래도 제가 기존에 주로 대형 작품들을 많이 하다 보니 그때는 모든 프로세스마다 분업화를 통한 효율성이 매우 중요했어요.

그에 비해 <베르테르>는 사람의 감정을 섬세하고 촘촘히 연결해야 하는 작품이라 초반에는 작품에 대한 토론과 대화를 정말 많이 나눴어요. 그것이 조 연출님의 연출 방식이자 니즈였거든요. 그렇게 서로 각자 배역에 대해 서슴없이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인물 간 관계성도 좀 더 촘촘해지고, 연습할 때 큰 힘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카이 씨와 함께 베르테르 역할을 맡은 엄기준, 유연석, 규현, 나현우 씨에 대한 느낌은 어떤가요.

“좋죠. 자주 만나서 연습하고, 얘기도 많이 나누고 있어요. 우선 기준이형은 그간 저랑 다른 작품들을 많이 해 왔는데 엄기준이란 사람이 가진 어떤 본능적인 감각, 감성에 늘 감탄하죠. 연석이는 지금까지 많은 TV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서 봐 온 것처럼 연기하는 패턴이 상당히 매끄러워요. 남자로서도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고요. 규현이는 ‘아이돌이란 이미지가 오히려 그의 예술성을 가로막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품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명확하고, 그것을 표현해 내는 데 자연스러워요. 무엇보다 (아직 대중에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현우도 매우 준비가 잘 돼 있는 친구예요. 앞으로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는 덕목이 많다고 생각해요.”

뮤지컬 배우, 가수 외에도 다양한 부분에 도전하고 계세요. 최근에는 유튜브 채널

‘카이클래식’에서도 활약 중이더군요.

“네. 유튜브를 시작하려고 관련 책을 10권 정도는 읽은 것 같아요.(웃음) 일단은 제가 그 시장이나 알고리즘을 잘 알지 못했으니까 공부가 필요했거든요. 그런데 책마다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점이 ‘스스로 가장 재밌는 걸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고민을 많이 했죠. 내가 가장 잘하고, 재미를 느끼는 건 뭘까. 생각해 보니 저는 클래식 음악더라고요.

그래서 ‘클래식 음악, 삶의 기본이 되는 모든 것’이란 주제를 가지고 출발하게 됐어요. 물론, 저도 초반이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콘텐츠로 어떻게 다가갈지 여전히 궁금증이 많아요. 다만 제가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사람들과 함께 얘기하고 즐거움을 공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장 큽니다. 무엇보다 제가 항상 기본과 기초를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변화하지 말라는 건 아니거든요. 시대가 변하고 있고, 매체의 흐름도 바뀌고 있잖아요. 유튜브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도전했죠.”


매사 생각이 많다고 들었어요. 요즘 가장 골똘히 빠져 있는 관심사가 있다면요.

“몇 가지 있는데요. 첫 번째는 이걸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공유예요. 지식과 경험의 공유요. 제가 예전에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의 자서전을 읽고 크게 공감한 적이 있는데, 그가 그런 말을 했죠. 30대에는 자신의 일을 해야 하고, 40대엔 자신이 잘하는 일을 해야 하고, 50대가 되면 자신의 에너지를 젊은 세대 육성에 쏟으라고요.

사실 저도 30대에 후학 양성 제안을 몇 차례 받았는데, 그때는 제가 무대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보고 싶어서 고사했어요. 이제는 조금씩 눈을 후배 양성에도 돌리고 싶어요. 실제로 주변에 뮤지컬을 준비하는 친구들 중 관련 학과를 졸업하고도 기본 발성에 대해서 제대로 배워 보지 못했다는 얘길 종종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단지 뭔가를 가르치고 이끈다기보다는 제가 경험을 통해 쌓아 온 지식들을 공유함으로써 도움을 주고 싶어요. 두 번째는 해외 진출이죠. 지금은 현실적으로 여러 면에서 꽉 막혀 있지만 저는 그 끈을 놓지 않고 있어요. 비록 제가 해외 진출에 성공하지 못할지라도 반드시 그 뒤를 잇는 후배가 나올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 초석을 다져 주고 싶어요. 마지막은 배우로서의 자립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요. 제가 의미하는 자립은 소속사 없이 홀로 선다는 것이 아니라 배우라는 건 결국 스스로를 믿는 사람이거든요. 사실 저는 참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지난 10여 년간 무대에 서면서 스스로를 굉장히 의심하고 채찍질을 많이 했어요. 이제는 그 과정을 지나 좀 더 성장하고 굳건해지는 시기가 시작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지금도 종종 흔들리기는 하지만 예전보다 스스로를 믿고, 굳건해진 배우로서 무대에 서고 싶어요.”

*[인터뷰②]카이 “선한영향력? 제겐 일종의 면죄부기도 해요.” 로 이어집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3호(2020년 08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