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섭 박사의 바로 이 작가 - 박성수
어디든 언제든 나는 있다, 한지 위에 펜과 유채, 149×212cm, 2020년
어디든 언제든 나는 있다, 한지 위에 펜과 유채, 149×212cm, 2020년
[한경 머니 기고 = 김윤섭 아이프 아트매니지먼트 대표·미술사 박사] 인생은 사랑이다. 서로 다른 온갖 사연들이 뒤엉켜 갈 길을 찾지 못하더라도, 결국 그 출구의 해법은 사랑에 있다.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우리의 소소한 잔정들마저 끊어 버렸다. 어느 때보다 체온이 그리운 시절이다. 손을 잡고, 볼을 부비고, 온 가슴으로 안아 보던 사랑의 표현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박성수의 그림이 더욱 따뜻하게 다가온다.

박성수 작가는 흰색의 강아지 ‘빙고’와 빨간색 고양이 ‘모모’를 주인공으로 삼아 다양한 에피소드를 펼쳐낸다. 사랑, 일상, 고백, 기억, 자존감 등. 언제 어디서나 겪고 맞이할 다양한 요소들이 흥미와 재미를 더한다. 잔잔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치고, 수수하면서도 세련된 감각이 돋보인다. 이야기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진정 어린 솔직담백한 고백들이 담겼다.

기억 저편에 잊힌 감정들을 소환하고, 언제 어떠한 감정으로 삶을 사랑해야 하는지 고백하는 과정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박 작가의 그림이 지닌 힘이다. 낡은 시간에 몸과 마음도 지쳐 무뎌져 가는 삶이지만, 그래도 충분히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깨우쳐 주는 그림들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구성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는 없다. 한 땀의 바느질로 큰 옷을 짓듯, 사소한 이야기 퍼즐로 추억 안에 숨겨졌던 삶의 빛을 찾아내 준다.

2006년쯤 Y는 베이징의 한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떠났다. 우리는 둘 다 그림뿐이었고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해외 레지던시는 포기할 수 없었다. 차를 판 300만 원을 가지고 Y는 떠났다. 그 당시 나는 아버지 사업을 도와 일명 ‘밥줌마 알바’부터 식구를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끼니마다 두 번의 간식을 챙기는 일을 했었고, 다행히 틈틈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여차하면 아버지가 주시는 월급을 Y에게 부쳐야지 각오했었다. 나도 따라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에게 ‘돈을 대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다행히 Y는 베이징에서 전속갤러리의 지원과 좋은 컬렉터들을 만나 어려움 없이 작품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어려운 형편에 그림쟁이로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Y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작가로서의 재능이나 태도는 어느 누구 못지않다는 생각은 한 번도 변함이 없었다. 어쩌면 기회와 응원이 더해져 빛이 나는 것은 준비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힘인 것 같다.

매일 베이징으로 가고 싶었다. 한 달에 한 번 가고 올 때마다 베이징공항과 한국의 집까지 눈물바다를 만들었다. 그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에도 그랬고, 부러움에도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가 마지막 한 달여를 베이징에 머물게 됐는데, 이미 작업실은 Y의 에너지로 꽉 차 있었다. 한 귀퉁이 이층의 작은 공간에 자리를 펴고, Y랑 중국 화방에서 사 온 미술 재료들로 작업을 시작했다. 빙고와 모모의 시작은 그러했다. 빙고와 모모는 바로 나다.

박 작가가 지금의 그림 속 주인공 캐릭터인 빙고와 모모를 만들게 된 계기를 설명한 대목이다. 글에서처럼 박 작가는 미술가 부부다. 지금에야 둘 다 역량 있는 유망작가 부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다. 미술대학을 졸업하면서 출발선은 같았지만, 전환점은 남편(Y)이 먼저 돌았던 셈이다. 마치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처럼. 박 작가는 앞서간 토끼를 원망하지 않았고, 거북이의 걸음으로 눈앞의 최선에 집중했다. 얼핏 동화 속 토끼처럼 남편은 제 갈 길만 매정하게 치고 나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거북이의 느릿한 걸음을 위해 미리 험한 길을 부드럽게 닦아 주고 있었다. 지금은 서로 다름을 존중할 줄 아는 최고의 파트너가 됐다.
별별사랑, 캔버스에 유채, 72.7×60.6cm, 2016년
별별사랑, 캔버스에 유채, 72.7×60.6cm, 2016년
뜨거운 포옹을 하고 있는 빙고와 모모, 작품 <별별사랑>처럼 둘은 연리지의 한 몸이 됐다. 인생의 여정은 탄탄대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여곡절의 연속이다. 친구가 필요하고, 연인이 필요하며, 더불어 함께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너와 내가 남이 아니듯, 이 세상은 또 다른 분신들과 살아야만 무사히 완주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대작 <어디든 언제든 나는 있다>를 보면 박 작가의 큰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삶이 얼마나 다양하고 광대한지, 동시에 답이 얼마나 간결한지를 보여 준다. 조금은 무디지만 그녀만의 사랑해법이 참 매력적이다.
애틋하게 살벌하게, 캔버스에 유채, 100×80.3cm, 2020년
애틋하게 살벌하게, 캔버스에 유채, 100×80.3cm, 2020년
간혹 상대의 상처마저 포용할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이다. 누더기가 됐더라도 나를 믿고 함께해 줄 상대가 있다면 해피엔딩을 기대할 만하다. 작품 <애틋하게 살벌하게>처럼. 가슴이 찢어지고 팔이 끊어지는 고통의 상처를 말없이 꿰매 주는 빙고의 모습이 너무나 처연하면서도 사랑스럽다. 서로의 눈동자에 비친 빙고와 모모 모습에서 우리의 삶에 아직 희망이 있음을 읽게 된다. 평소 박 작가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특별하게 느끼게 해 준 작품’을 그리고 싶다”고 한다. 소박하지만 인내력이 필요한 바람일 것이다.

박 작가에게 호감을 가진 이라면, 거의 ‘일일 드로잉 작가’로도 기억한다. 거르지 않고 하루에 한 점의 드로잉을 그리는 편이다. 일일 드로잉을 페이스북에 일기처럼 연재한 적도 있다. 촌철살인 같은 간결한 문구와 어우러진 드로잉은 너무나 긴 여운을 전한다. 가령 “나는 여러 개의 방이 있어요. 방마다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은 다 달라요. 힘들지만 다 잘하고 싶어요. 다 다른 방마다 다 다른 당신에게 잘하고 싶어요”라는 문장이 적힌 드로잉 작품 <나 정말 잘하고 싶어요>는 볼수록 가슴이 찡하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고백이 또 있을까.

좋은 그림이란 어떤 것일까.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보는 이의 마음에 긴 울림을 전할 수 있는 공감대’는 좋은 그림의 덕목에서 빠지진 않을 것이다. 박 작가의 그림이 그렇다. 스토리가 쉽고 직설적이지만, 작품이 전하는 여운만큼은 길고 깊다. 무엇보다 제작 과정도 성실하다. 채색 과정에서 물감의 농도를 조절하기 위해 깊게 덧바르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한다. 물감의 반복적 덧칠 과정은 기억을 되살리는 중요한 심미적 기능이기도 하며, 동시에 유화물감의 덧칠로 이야기가 숨겨진 듯 스며들게 표현하고 있다.

최근엔 여성의 삶과 감수성을 진솔하게 반추한 작품들을 자주 선보이고 있다. 일명 ‘손목 시리즈’로 불릴 만한 작품에선 다양한 여성의 손놀림이 대조적인 조화를 연출한다. 그 이면엔 어머니나 할머니가 겪은 삶의 애환과 무게까지 녹아들었다. 한 명의 딸로 태어나 미래의 자신에게 전하는 고백과도 같다. 일상의 삶은 멀리서 봐야 희극이라 했듯, 가까이 보면 저마다의 사정들로 분주하다. 그의 그림은 평범한 인생살이의 순리에서 출발한다. 그만의 위트 넘치는 화술(話術, 畵術)은 그대로 사랑의 언어가 됐다. 박성수의 A4 크기 드로잉은 50만 원이며, 10호(45.5×53cm) 작품은 전시 가격은 200만 원 선이다.

김윤섭 소장은…
김윤섭 대표는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2019 안양국제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정부미술은행 운영위원, 인천국제공항 문화예술자문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숙명여자대학교 겸임교수, 2020 경주국제레지던시아트페스타 전시감독, 아이프(AIF) 아트매니지먼트 대표,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서울시 미래유산보존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8호(2021년 0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