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여주시립 폰박물관장

[한경 머니 = 문혜원 객원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

“휴대전화는 산업 유물, 수집가 안목이 역사가 되죠”
이병철 여주시립 폰박물관장은 30여 년간 휴대전화를 수집했다. 흔해 빠진 휴대전화를 모은 데에는 휴대전화가 산업 유물로서 가치가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자기 집에 세계 최초 휴대전화 박물관을 열었던 그는 2014년 여주시에 박물관 전체 유물을 기증했다.


남한강변 신륵사 건너편에 자리 잡은 여주시립 폰박물관. 박물관을 찾는 이들은 누구나 자기가 사용하던 휴대전화를 찾아 저마다의 추억에 젖곤 한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휴대전화가 보급될 때부터 휴대전화를 사용하던 60대 중반부터 30대 후반까지 폰박물관 유물을 보며 매우 흥미 있어 한다는 것. 과연 그랬다. 기자 역시 처음 사용하던 휴대전화를 찾아보기도 하고, 지인이 사용하던 독특한 휴대전화를 찾고는 추억에 젖었으니 말이다.


이병철 여주시립 폰박물관장은 기자를 보자 대뜸 “언제부터 휴대전화를 썼느냐”고 물었다. 고등학교 때 처음 PCS폰을 썼다고 답하자 “그럼 37세에서 40세 정도 되셨겠군요” 하는 답이 돌아왔다. 휴대전화를 사용한 연대만으로 나이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휴대전화 박사나 다름없었다. 연아폰, 초콜릿폰으로 불리던 옛 폰의 모델명도 SCH-W770, LG–KV5900으로 줄줄 읊었다.


그가 설립하고 기증한 폰박물관은 유물 수만 해도 4000여 점. 개인이 일일이 모은 수집품으로는 방대한 양이었다. 박물관에는 휴대전화만 있는 건 아니었다. 휴대전화 이전 전화의 역사부터 시작해야 했기에 모스(전신), 벨이 최초로 발명한 물 전화기, 전화교환원이 사용했던 자석식 교환기 등까지 망라됐다.


“누군가는 꼭 수집해서 보존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으로 시작하게 된 거죠. 저는 한낱 우표나 모으고, 책 쓰는 것을 좋아하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장은 1985년 <석주명 평전>을 내며 ‘나비박사’ 석주명 선생의 업적을 알린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후 그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세계 탐험사 100장면>, <발굴과 인연>, 여성 위인전기인 <참 아름다운 도전 1, 2>, <우리 글 바르게 잘 쓰기> 등을 펴내기도 했다. 다음은 이 관장과의 일문일답.

“휴대전화는 산업 유물, 수집가 안목이 역사가 되죠”

휴대전화를 모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휴대전화 수집을 시작하니 ‘그까짓 쓰고 버리는 기계를 왜 모으느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들었습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핀잔에 가까웠죠. 예전에 사용하던 전화기 아직 가지고 계신가요. 아마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겁니다. 예전에 사용하던 휴대전화는 이미 중국이나 베트남 등으로 팔려 나갔기 때문이죠. 거기서 또 광물을 채취하니 예전 휴대전화는 자취를 감추게 된 거죠. ‘잘못하면 휴대전화가 다 없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전 휴대전화가 대단히 중요한 산업 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전달하는 매개체이기 때문이죠. 누군가는 모으고 남겨 둬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해지자 가족들과 상의한 끝에 휴대전화를 수집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제 휴대전화 수집은 다른 수집가들의 개인적인 취미생활과는 결이 달랐던 거죠.”


그렇다면 어렵게 모은 휴대전화를 왜 시에 기증하셨나요.
“여주시에 유물을 모두 기증한 것은 2014년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열정을 바쳐 모은 유물을 나라에 기증한 것은, 제 컬렉션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감상하고 소유하는 수준을 넘어, 우리가 살았던 시대와 사람들을 기억해 줄 후손에게 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휴대전화를 기증하겠다는 생각은 이미 오래전부터 해 온 것이어서 아무 조건 없이 기증했습니다. 제가 유물을 여주시에만 기증한 것은 아닙니다. 정부 주도로 산업박물관을 세운다고 했을 때 울산시에도 수집 초기에 모은 휴대전화 2141점을 기증한 바 있죠. 울산시가 저의 기증품을 보관하다가 국립산업박물관을 유치하면 그곳으로 넘긴다는 조건이었죠. 하지만 산업박물관 계획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어 기증품은 울산시 박물관 수장고에 있을 겁니다. 울산시에 기증한 유물들은 내수품 위주였고, 현재 폰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은 수출용과 외국 제품입니다. 여주시립 폰박물관은 세계 역사 위주로 테마와 스토리텔링을 곁들여 만들어진 박물관입니다.”


휴대전화 수집의 기준이 있나요.
“저는 유물 값을 깎지 않고, 무조건, 당장, 현금으로 산다는 것을 유물 구매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유물 값을 깎지 않았기에 더 많은 유물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제값을 치르는 더 중요한 이유는 제 나름으로 유물의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주제별로도 휴대전화를 전시했기에 같은 기종도 여러 대 구매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1000만 화소 카메라폰(SCH-B600)이 그 예죠. SCH-B600은 뒷면 렌즈가 엄청나게 크고 카메라를 켰을 때는 렌즈가 3단으로 튀어나오는 디자인입니다. 그냥 앞면만 보이게 전시했더니 아무 특징 없는 둔탁한 바형 폰으로 보였습니다. SCH-B600의 특징을 제대로 살려 전시하기 위해 하나를 더 사서 뒷면이 보이게끔 전시해야 했습니다. ‘카메라폰의 역사’, ‘기네스북에 등재된 폰’ 등 다양한 주제에 맞추다 보니 SCH-B600은 결과적으로 6대나 구매해야 했습니다. 한 제품만 해도 1000만 원에 달하는 돈이 든 셈이죠. 수집을 하는 사람들이 대개 그래요. 컬렉션을 갖추다 보면 빈털터리가 되기 십상이죠. 오죽했으면 저희 딸이 영국의 일류 미술대학에 3곳이나 합격했는데 입학금을 마련하지 못해 그만 입학을 포기하고 말았겠어요.(웃음)”


국내는 물론 해외 수출품까지 모두 수집하려다 보면 어려움도 크셨을 것 같습니다.
“세계 최초의 휴대전화인 모토로라의 다이나텍 8000X를 수집할 때였습니다. 대부분의 제품은 주로 해외 인터넷 경매를 통해 거래되는데 다이나텍 8000X는 역사성 때문에 경쟁률이 굉장히 높은 제품이었죠.
경매 마감 시간까지 경쟁자보다 높은 가격에 구매하기 위해서는 분이 아닌 초를 다투는 경합을 벌여야 합니다. 한국 시간으로 오전 4시가 경매 마감 시간이라면 밤을 꼴딱 새운 채 새벽 3시 59분 40초대부터 바짝바짝 피가 마릅니다. 정확히 오전 4시에 경쟁자들보다 더 높은 가격을 써내 마침내 제품을 낙찰 받았을 때의 기분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어렵게 한 점 한 점 모았기 때문에 휴대전화의 역사 흐름에 맞춰 모든 제품을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폰박물관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응답하라 1997>에 등장한 휴대전화들, <녹두꽃>에 나온 전신기 등은 모두 폰박물관에서 고증을 거쳐 빌려 준 유물이었습니다. 고증에 어긋나 돕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1930년대 독립군용으로 쓰겠다며 무전기를 빌리자고 왔는데, 무전기는 1941년에 나왔으니 빌려 줄 수 없었죠. 저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고증에 얼마나 철저한지를 유심히 봅니다. 할리우드 영화 <퓨리>가 고증이 잘 된 예죠. 영국 보빙턴 전차박물관을 설득해 유일하게 기동이 가능한 티거 전차를 빌려다 실물 탱크전을 스크린에 재현해 냈습니다. 한국 영화 <고지전>도 고증이 아주 잘됐습니다. <퓨리>나 <고지전> 같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영화인들은 어느 박물관이라도 설득할 프로의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제작비를 줄이겠다는 생각으로 영화에 꼭 필요한 소품을 포기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다룬 영화는 역사 교과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휴대전화를 수집하면서 국내 브랜드가 세계 시장을 추월한 것에 대한 감회도 남다르셨을 것 같습니다.
“여주시립 폰박물관 유물 중 초기 모델들은 모토로라, 노키아, 소니 등 글로벌 기업 차지였습니다. 후발주자인 삼성과 LG는 처음에는 그저 수입 제품에 로고만 바꿔 달았을 뿐이죠. 초라한 시작은 3세대부터 전세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모토로라와 노키아 등 세계 굴지의 기업이 스마트폰 개발에 미적지근하게 반응했기 때문이죠. 결과적으로 스마트폰 시대에 살아남은 것은 삼성과 LG밖에 없게 됐습니다. 우리 기술이 세계 최고임을 자부하는 만큼 폰박물관의 역할이 더 막중할 듯싶습니다. 앞으로 기업체의 후원과 시의 예산 지원이 확충돼 정말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키우고 싶은 바람이 있습니다.”

“휴대전화는 산업 유물, 수집가 안목이 역사가 되죠”

얼마 전 인터넷에는 한 초등학생의 귀여운 고민이 회자됐다. 방학 숙제로 고안해 냈다며 미래의 휴대전화는 배터리를 탈·부착하는 방식으로 개발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배터리가 분리되지 않아 늘 보조 배터리를 가지고 다니는 고충을 해결할 방법이라고 했다. 이 학생은 ‘현재 기술로는 불가능하겠지만’이라는 단서까지 달았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면치 못하면서도 이 관장이 세운 폰박물관의 설립 취지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에 수긍하게 된다. ‘그까짓 거 뭐 하러 모으냐’는 핀잔에도 그가 꿋꿋이 길을 개척한 까닭이기도 했다. 이 관장의 얘기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수집가의 안목이 역사가 됩니다.”

“휴대전화는 산업 유물, 수집가 안목이 역사가 되죠”

“휴대전화는 산업 유물, 수집가 안목이 역사가 되죠”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1호(2020년 06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