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김수정 기자]“혀와 이(치아)는 다른 무엇들보다도 서로 가깝다. 그러나 이는 언제고 혀에 상처를 낼 수 있다.” 가족에 대한 풀라니족(서아프리카에서 중앙아프리카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사는 이슬람 민족)의 잠언이다. 한없이 가깝고, 그래서 또 매섭게 부딪치는 애증의 이름, 가족. 지금 우리에게 가족이란 무엇일까.
[big story]행복의 시작과 끝은 ‘가족’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노래 ‘양화대교’ 중에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 시대에 들어섰지만 행복지수는 여전히 묘연하다. ‘2019년 세계 행복 보고서’에서 한국의 행복지수는 5.895점으로 54위에 머물러 있다. 과연 이 간극은 무엇이고,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
지난 4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만 19∼80세 5020명을 대상으로 한 ‘한국인의 행복과 삶의 질에 관한 종합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들에게 행복의 최우선 조건은 가정을 이루는 것으로 조사됐다. 어떤 조건이 더 충족되면 더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하는지 설문조사를 한 결과, 1순위 응답을 기준으로 전체 31%가 ‘좋은 배우자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라고 응답했다.
[big story]행복의 시작과 끝은 ‘가족’
이어 ▲건강하게 사는 것(26.3%) ▲돈과 명성을 얻는 것(12.7%) ▲소질과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것(10.4%) ▲여가생활을 즐기는 것(7.6%) ▲자녀 교육을 잘하는 것(6.5%) ▲더 많이 배우고 자기 발전을 하는 것(3.7%) 순으로 나타났다. 그래서일까.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는 노랫말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공감이 뚝뚝 묻어난다.

100세 시대, 가족의 행복 조건
바야흐로 100세 시대다. 늘어난 생애주기만큼 그 기간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가 지상 최대의 난제로 떠올랐다. 인간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가족과 건강은 떼놓을 수 없는 관계다. 마치 공기가 없으면 우리가 살 수 없는 것처럼 가족과 건강을 잃는다면 제아무리 돈과 명예를 갖는다고 한들 행복할 리 만무할 터.

대표적인 예가 치매다. 흔히 치매는 환자보다 가족이 더 아픈 병이라고 불린다. 실제로 치매 환자인 부모를 모시고 있는 중년 남녀가 우울증상을 보유할 가능성은 치매 환자가 없는 사람보다 1.7배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거의 매일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비율은 가족 중 치매 환자가 있으면 없는 사람보다 7배 이상 높았다.

최근 한국식품커뮤니케이션포럼(KOFRUM)에 따르면 임현우 가톨릭대 의대 교수(예방의학)팀이 2017년 전국에서 수행된 지역사회 건강조사 자료에 참여한 40∼50대 중년 남녀 7만7276명(가족 중 치매 환자가 있는 사람 760명, 없는 사람 7만6516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이같이 드러났다.

연구 결과 우울증상 보유율은 가족 중 치매 환자가 있는 사람에서 4.4%로 없는 사람(1.9%)보다 2배 이상 높았다. 연구 대상자의 연령, 성별, 소득 등 다양한 요인을 감안한 결과 가족 중 치매 환자가 있는 사람의 우울증상 보유율은 치매 환자가 없는 가정 사람의 1.7배였다. 특히 집에서 직접 치매 환자를 돌보는 중년 여성의 우울증상 보유율은 가족 중 치매 환자가 없는 중년 여성 대비 2.3배 높았다.

임 교수팀은 논문에서 “(치매 환자를 돌보다) 거의 매일 우울증상이 일어난다고 하는 사람은 흥미 상실, 우울감, 수면 문제, 피로감, 식욕 감소, 자살 생각 등에 시달린다고 응답했다”며 “치매 가족의 우울증 완화를 위한 더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치매 환자의 인지 기능 손상이 악화됨에 따라 병간호에 필요한 신체적·정신적 부담이 커져 가족 등 간병인의 우울증 발생 위험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점점 더 전통적인 부모 부양에 대한 의무가 흐려지고, 1인 가구, 핵가족화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치매 간병에 대한 가족 분쟁은 앞으로도 늘어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관련 복지 지원은 물론, 각자 생애 설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생애 설계란 가족이 앞으로 살아갈 길을 미리 가 보는 것으로, 미리 준비할수록 자산관리에 여유가 생기고 실수나 분쟁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상속·증여·신탁 등
철저한 재무 설계 필요
비단, 건강이 가족 행복의 1순위일지라도 ‘금전적인 여유’도 없어선 안 될 요건이다. ‘2019년 한국복지패널 기초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가족 관계와 건강 만족도가 소득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먼저 가구원들의 건강에 대한 만족도를 소득집단별로 살펴보면 저소득 가구의 경우는 건강에 대해 ‘불만족한다’고 응답한 가구원이 39.59%로 만족하는 가구원(29.44%)보다 많아 ‘만족한다’는 응답이 많은 일반 가구(64.28%)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본인의 건강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가족관계에 대한 만족도를 살펴보면 ‘만족한다’는 응답이 일반 가구의 경우 86.42%, 저소득 가구는 68.9%로 나타나 상대적으로 저소득 가구에서 가족관계에 대한 만족도의 비율이 낮은 것으로 분석됐다. 저소득 가구에서는 가족관계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응답한 비율 또한 7.35%로 나타나 일반 가구(1.94%)보다 높음을 알 수 있다.
[big story]행복의 시작과 끝은 ‘가족’
아울러 늘어난 가족 간 상속 분쟁도 가족 행복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초고령화로 인해 부부가 함께 사는 기간은 과거에 비해 훨씬 늘었고, 황혼이혼이 급증하면서 부부간 재산 분할이나 상속 문제는 점차 화약고로 변해 가고 있다. 또 최근에는 이혼이나 재혼의 증가로 가족 구성원에 변화가 생기며, 재혼 배우자와 피상속인의 장성한 자녀들 간 잔혹한 상속재산 다툼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상속·증여에 대한 체계적인 준비도 가족의 행복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가족의 의미를 묻는 작품 3선]

영화 <어느 가족>
[big story]행복의 시작과 끝은 ‘가족’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단골 소재는 ‘가족’이다. 그는 끊임없이 영화를 통해 가족의 의미, 역할, 그리고 사랑에 대해 묻고 또 묻는다. 제71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작품인 <어느 가족>은 할머니의 연금과 좀도둑질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누구 하나 혈연이나 법적으로 가족의 연을 맺은 사람이 없다. 그저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받거나 학대당한 사람들일 뿐이다. 살아가는 방식도 비참하고, 기묘하다. 생존을 위해 도둑질, 막노동, 유사 성행위를 서슴지 않고, 사망한 할머니 하츠에의 시신을 집에다 묻은 채 계속해서 연금을 받아서 쓴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있을 때 더없이 화목하다. 한 집에서 음식을 나눠 먹고, 웃음과 온기를 나눈다. 영락없는 가족의 모습이다. 감독은 마치 우리에게 묻는 듯하다. ‘이들이 가족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혈육 중심의 가족사회에서 기묘한 대안 가족을 통해 가족의 본질을 파고드는 수작.

영화 <결혼피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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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에서 뉴욕으로 건너온 부동산 딜러 웨이퉁은 애인 사이먼과 동거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웨이퉁의 부모님은 그가 하루 빨리 결혼해 손주를 안겨 주길 고대한다. 이에 웨이퉁과 사이먼은 부모님과 자신 모두를 만족시킬 방안을 생각하는데, 웨이퉁이 관리하는 건물의 세입자인 웨이웨이와 위장결혼을 하는 것. 미국 영주권이 필요했던 웨이웨이는 그들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한다. 아들의 결혼 소식에 뉴욕까지 찾아온 부모님은 대만의 전통 혼례식을 치르고 웨이퉁, 사이먼, 웨이웨이는 걷잡을 수 없는 사건사고에 직면하게 된다. 영화 <결혼피로연>은 아시아의 명장, 이안 감독의 출세작이다. 1993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동양과 서양, 동성애와 이성애, 그리고 부모와 자식에 관한 이야기들을 가족이란 이름으로 유쾌하고 뭉클하게 묶어 낸다. 코로나19로 강제 방콕에 지치고 우울하다면 가족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보기를 추천한다.

시트콤 <모던 패밀리>
[big story]행복의 시작과 끝은 ‘가족’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아온 미국 시트콤 <모던 패밀리>가 올해 4월 시즌 11을 마지막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시즌을 거듭하는 동안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골든 글로브, 에미상, 미국 작가조합(WGA) 상을 여러 차례 수상했다. <모던 패밀리>은 그야말로 다양한 현대 가족군상의 모습을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함께 풀어낸다. 작품 속에는 동양 아이를 입양하는 게이 부부, 자신의 딸보다 어린 남미 출신의 부인과 결혼한 성공한 사업가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딸인 클레어는 남편과 세 남매를 키우고 있다. 이 드라마는 영화 <해리포터>의 매직처럼 시즌을 거듭하면서 성장해 가는 아역배우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큰 재미이자, 묘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가족의 구성은 독특하지만 그 어떠한 막장코드는 없다. 그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가족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일상의 에피소드를 재밌고, 잔잔하게 풀어낸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1호(2020년 06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