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정채희 기자 l 사진 서범세 기자] “2개 필적은 상이한 것으로 감정됩니다.”

추리물을 보며 짜릿한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글자의 형태를 두고 감정물과 대조물의 동일 여부를 판단하는 ‘필적감정’은 전통적인 과학수사의 한 방법이다. 대충 끼적인 서명이 당신의 인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물건을 사고 직원에게 대리한 서명, 날림자로 대충 끼적인 서명 등 그간 아무렇게나 적고 버린 서명이 내 인생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면 믿어지는가.

최근 법률행위에서 도장, 인감만큼이나 서명을 자주 사용하게 되면서 서명의 필적감정이 점차 중요한 행위로 부각되고 있다. 카드사용 전표나 회사 서류 등의 서명을 비교해 서명의 주체 여부를 가리는 것이다. 내가 무심코 쓴 서명으로 위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15년 필적감정 전문가 서한서 예일문서감정원 원장이 말하는 필적감정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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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적감정이란 무엇인가요.

“필적학이 필체로 성향이나 성격을 파악한다면, 필적감정은 글자의 형태를 두고 감정물과 대조물의 동일 여부를 판단하는 일입니다. 업계 용어로 흔히 ‘이동(異同) 여부’를 판단한다고 합니다. 필적감정(문서감정)은 법과학의 한 분야로서 국립과학수사원(이하 국과수)이나 대검찰청에서도 관련 수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객관적인 과학수사의 방법을 기초로 전문성과 법률적 지식, 숙련된 기술, 법과학적 지식 및 화학, 물리 등의 이공학적 지식 등 다양한 학문이 응용된 종합과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적감정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제가 지금 기자님께 ‘본인의 이름을 10회 써 보세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아무리 신경 써도 10번 다 똑같이 쓰지는 못할 겁니다. 간격, 크기, 연결 여부 등이 틀리기 마련이죠. 그럼 무얼 보고 필적감정을 할 수 있느냐. ‘기억(ㄱ)’을 써도 ‘가’를 쓰는 기억과 ‘고’를 쓰는 기억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글자의 위치, 각도, 길이, 크기, 비율, 필압(筆壓) 정도 등 자획 구성과 형태를 살펴 특징을 비교합니다. 필적에는 개인에 따라 항상성과 희소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전제로 자료와 대조 자료 사이의 동일 여부를 식별합니다. 각 식별검사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두 자료 사이에 희소성이 높고 항상성이 있는 특징을 알게 될 때에는 두 자료의 필적은 같은 인물이 쓴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반면 희소성과 항상성의 특징이 인정되지 않고, 감정 자료에 없는 희소성이 대조 자료에 있을 때에는 이필(異筆)이라고 분석합니다.”

필적감정을 위한 준비물은 무엇인가요.

“감정을 받으려는 문서를 감정물이라고 합니다. 누구의 필적인지 혹은 본인의 필적인지 의심이 되는 감정물이지요. 이 감정물을 분석하기 위해 비교할 수 있는 필적이 필요합니다. 시필(감정사 입회하에 문제가 되는 필적을 당사자가 직접 수회 작성)과 평소 필적(평상시 사용한 수첩, 일기장, 각종 계약서 등)으로 필적감정이 가능합니다.”

주로 어떤 사건을 다루나요.

“전문 감정인이 맡는 사건은 형사·민사사건으로 나뉩니다. 형사사건의 수사 단계에서 발견되는 필적 대부분은 국과수에서 분석합니다. 민간 감정인은 주로 법원 관련 업무를 맡는데, 법원에서 증거에 감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 의뢰가 들어옵니다. 매년 법원의 전문 감정인으로 등록돼야 사건을 할당받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경로는 원고 또는 피고가 먼저 의뢰를 해 오는 경우입니다. 민사사건은 상속 문제, 재산분할 문제, 차용증, 보험청약서, 유언장과 관련된 사건이 주를 이룹니다. 아무래도 돈과 관련된 부분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경우에 따라 적게는 수백만 원, 많게는 몇천억 원대 단위도 있습니다. 연간 총 200~300여 건의 감정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막 끼적인 서명도 필적감정이 가능한가요.

“네, 가능합니다. 정형화되지 않은 형태의 서명필적도 가능합니다. 물론 비교할 서명이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카드사용 전표나 은행통장 개설 시 서명, 회사 서류 등의 서명으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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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로 필체가 줄어드는 시대, 필적감정 분야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나요.

“워드를 많이 쓰면서 비교할 수 있는 대조군이 줄어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필적감정은 사라지는 영역은 아닙니다. 아직까지 중요한 서류는 여전히 자필서명을 많이 하고 있으며, 지면에 하지 않더라도 전자패드에 서명하는 경우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인터넷에 게시된 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글, 문자메시지 등 문체를 분석하는 문서감정 역시 필적감정과 동일하게 개인 식별을 위해 사용됩니다. 지난 2011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박대성 지식검증 논란’이 문서감정의 단적인 예시입니다.”

최근에는 전자패드에 서명을 하는데, 이 역시 감정 대상인가요.

“네. 업계에서도 전자서명 필적감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전자서명은 일반적인 종이와는 달리 기기 종류에 따라 분석이 달라집니다. 필압의 여부, 첫 필획이 시작해 끝날 때까지 몇 초가 걸리는지 등의 분석을 통해 전자서명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법원에서 의뢰가 오면 시필 역시 전자서명에 받아 감정하는 등 만반의 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선을 찍 긋는다든지, 매대에서 점원이 대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향후 무성의하게 쓴 서명으로 어떠한 문제가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일관성 있는 자기만의 대조물을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대조물의 양과 질이 좋다면 그로 인해 더 신뢰도 높은 판정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필적감정의 신뢰도는 어느 정도인가요.

“필적감정을 하는 데 있어 100% 확실한 판단은 없습니다. ‘유사하다’, ‘추정된다’, ‘사료된다’, ‘가능성이 있다’ 등의 표현을 씁니다. 그럼에도 신뢰도는 10명의 감정인이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감정물을 분석했을 때, 9명에서 9.5명이 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하지만 감정인의 주관적인 판단, 그리고 대조물이 적절하지 못할 때에는 신뢰도가 떨어지기도 합니다. 국내 필적감정사의 가장 큰 사건으로 여겨지는 ‘김기설-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그 사례입니다(1991년 노태우 정권 당시 김기설 전국민족민주연합 사회부장의 분신자살 사건에 대해 검찰이 김기설의 친구였던 단국대 화학과 재학생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기소해 처벌한 인권침해 사건). 2010년에 강 씨가 재심을 청구해 무죄를 판결 받았지만, 감정인이 잘못된 시료로 객관적이지 못한 감정을 한 사례였습니다. 감정인이라면 대조물의 부족 등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 ‘모른다’고 해야 합니다. 감정물의 필적과 비슷한 글자만 따온다거나 하는 등 객관적이지 못한 시선으로 감정을 할 경우에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저 역시 조심하는 부분입니다.”


개인의 필적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데 동의하나요.

“개인 식별을 통해 사건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민사사건의 경우 둘 중에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많게는 수백억 원대를 놓고 다투게 되는데, 이때 필적감정이 사건의 방향을 제시해 재판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TV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 <PD수첩> 등과 같은 미제사건을 취재하는 프로그램의 의뢰를 받은 후 실제 해당 범인이 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사건에 일정 부분 도움을 주어 뿌듯합니다.”

서한서 감정사는…

예일문서감정원장이자 서울고등법원 외 전국고등법원 및 지방법원 등의 문서감정인으로 등재돼 있다. 서 감정사는 경북대 수사과학대학원 과학수사학과를 졸업했으며, 충남대 일반대학원 과학수사학과 겸임 교수로 활동했다. 필적·인영·문서·지문감정 등을 담당한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8호(2020년 03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