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 = 문현선 대중문화연구자]한 사회를 정확히 바라보려면 대중문화 콘텐츠를 접할 필요가 있다. 그 속에 그 사회의 시대상과 판타지, 그리고 정서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열광했던 사랑 이야기는 어떻게 한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됐을까.
[종종 멜로드라마는 뉴스 이상의 리얼리티를 표방한다. 영화 <어느날 밤에 생긴 일>(왼쪽), TV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자신이 원하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독립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기는 백만장자의 상속녀 엘리는 아버지의 요트에서 탈출해 뉴욕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비행사인 구혼자 킹이 뉴욕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가 난생 처음 타본 버스 옆자리에는 해고당한 신문기자 피터가 타고 있었다. 엘리의 정체를 알아차린 피터는 특종을 독점하기 위해 그녀의 드라마틱한 모험에 기꺼이 동참한다. 생활에 필요한 뭔가를 얻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할 필요 없이 살아온 여자 주인공과 생계를 위해서라면 신념이나 윤리까지도 접어 두면서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해야 하는 위치에 서 있던 남자 주인공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티격태격 투덕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피터가 위험에 처한 엘리를 도와주고, 엘리가 피터의 논리를 성공적으로 반박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서서히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에 빠진다. 교통편을 구하러 간 피터가 특종을 위해 자신을 배반했다고 오해한 엘리는 홧김에 킹과의 결혼을 강행하려 하지만, 아버지의 조언으로 피터의 진심을 알고 버진 로드에서 달아난다. 아버지의 전용기로 피터를 따라잡은 엘리, 두 사람은 소박한 모텔에서 드디어 행복한 밤을 맞는다.

이 더할 나위 없이 로맨틱한 서사는 불황기의 미국 사회를 지배했다. 자본가와 노동자, 상류층과 중산층, 유명인과 언론, 구세대와 신세대, 자유연애와 순결주의, 여성성과 남성성 등 사회 내 양가적 가치가 서로 다른 계층을 대변하는 두 인물의 허니문을 통해 성공적으로 봉합된 것이다.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프랭크 카프라의 로맨틱 영화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은 1930년대 할리우드 스크루볼 코미디의 전형으로서 이 장르의 주제와 스타일을 확립했다. 불황이라는 조건은 사회의 균열과 불안을 조장한다. 근면과 성실과 노력이 성공의 밑천이 된다는 신념은 의심받고, 사람들은 사회 구조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하며, 일반의 삶과 동떨어진 상류층의 생활은 더 이상 순수한 동경의 대상일 수 없는 증오와 지탄의 표적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불황은 단순한 현상 이상의 사회적 불안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은 경직된 노동 계급과 큰 유산을 물려받은 타락한 여인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적 불일치를 극복하고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계급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인간관계라는 것이 가능한 미국 사회의 전통적 이상을 성공적으로 재확인시킴으로써 사회의 불안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로맨틱 코미디 또는 멜로드라마가 갈등하는 사회 모순을 봉합하는 데 효과적인 현대의 대중신화로서 그 기능을 확립한 순간이기도 했다. “햇빛에 바라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라고 하던가. 사람들은 멜로드라마가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 ‘사실’은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허구’는 종종 단순한 ‘사실’ 이상의 ‘진실’을 전달한다.

대부분의 경우, 멜로드라마는 상호 모순적인 입장과 가치에 의해 분열된 현실을 봉합하는 효과를 지닌다. 그러나 그 봉합은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다. 봉합의 균열들에 주목함으로써 우리는 특정한 대중서사가 봉합하기 위해 애쓰는 모순과 갈등의 실체를 추적할 수도 있다. 영국의 사진작가 대런 아몬드는 “달빛은 햇빛이 다 보여주지 못한 것을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햇빛은 그림자를 만들지만 달빛은 그림자를 지우면서 실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허황하게만 보이는 멜로드라마가 때때로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기사나 뉴스들보다 더 리얼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장르, 멜로드라마
멜로드라마는 누가 뭐래도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장르다. 대중서사 장르의 일반적인 정의에 따르면, 멜로드라마는 ‘장애가 많은 연애 이야기’를 가리킨다. <아씨>와 같은 고전에서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 이르기까지 화제의 중심이 되는 소위 ‘잘나가는’ 우리 드라마는 장르를 불문하고 ‘장애가 많은 연애’의 요소를 담고 있다.

심지어 “이기고 싶었다. 너 때문에,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너란 여자 하나 때문에 미치도록 이기고 싶었다”라는 대사가 비련의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비장한 역사드라마에서 불쑥 튀어나와도 전혀 낯설지 않다. 또한 이 드라마들 속에는 젊은 남녀라는 주인공들 외에도 대부분 그들의 다른 관계들이 등장한다. 여자 주인공의 언니나 남동생, 남자 주인공의 여동생이나 형, 자매가 한 남성에게 호감을 가지거나 형제가 한 여성에게 순정을 다하는 구조는 우리 드라마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형태다.

대부분의 혼인관계가 이를 둘러싼 친족 구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을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를 주름 잡았던 <아씨>는 그 전형이었다. 가족주의의 선택으로서 정혼자와 자유연애의 대상으로서 신여성, 그리고 남자 주인공 사이의 삼각관계는 오랫동안 우리 드라마에서 전형적인 구도를 형성했다.

1970년대 영화계의 전설이 된 <미워도 다시 한 번> 시리즈는 이러한 통속 멜로 장르의 전형으로 손꼽힌다. 1980년대 말에 이러한 구도의 대척점에서 <모래성>(1988년)이 등장했다(<미워도 다시 한 번>의 또 다른 대척점으로는 1979년에 조기 종영된 <청춘의 덫>을 꼽을 수 있다. 시대를 앞서 가는 서사 덕분에 거의 방송이 중단됐던 이 드라마는 1999년에야 리메이크돼 완성됐다). 이 드라마는 당시 대한민국 방송 사상 최장수 드라마로 손꼽히는 <전원일기>의 어머니 김혜자가 남편의 일탈을 알고 이혼을 감행하는 모습을 보여줘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이다.

트렌디드라마, 도시의 젊은이를 말하다
엄밀한 의미에서, 젊은 남녀 주인공의 관계성에 집중하는 본격적인 로맨스 코미디는 1990년대에야 등장했다. 1980년대 일본 트렌디드라마의 영향력을 강하게 드러냈던 1990년대 미니 시리즈에서는 도시를 배경으로 다양한 직업군의 젊은 남녀 주인공들이 선을 보였고, 이들의 소비 패턴은 도시 젊은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결정했다.

<질투>(1992년)는 <사랑이 꽃피는 나무>(1987년)로 청춘의 심벌로 자리를 굳힌 최수종과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는 광고문구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최진실을 내세운 트렌디드라마의 원형이었다. 여행사 직원인 여자 주인공 하경과 드라마 작가인 하경 어머니, 변호사인 하경의 친구 채리, 방송국 PD인 하경의 남자친구(남사친에서 연인으로 발전) 영호, 피자집을 경영하는 영호의 연상 여자친구 영애는 피자집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커피 전문점에서 친구를 만나며 편의점에서 야간 데이트를 즐겼다.

덕분에 피자는 국민 먹거리가 됐고 편의점 사업은 놀라운 기세로 골목 상권을 장악하게 됐다(하경의 빨간 티코 덕분에 경차 시장이 활성화됐다는 소문도 있다). 이 드라마의 성공 요인을 “오렌지족이라고 불리는 요즘 젊은이들의 풍속도를 건강하고 밝은 이미지로 그려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고 분석한 당시의 신문 기사는 한편의 멜로드라마가 담고 있는 사회적 의미를 확인시켜준다.

<질투>의 성공은 <파일럿>(1993년), <마지막 승부> (1994년), <사랑을 그대 품 안에>(1994년), <별은 내 가슴에>(1997년)에 이르는 트렌디드라마 열풍으로 이어졌다. 이 드라마들의 서사는 가난하지만 씩씩하고 상냥하며 선량하고 예쁜 여자 주인공이 숱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공통적인 줄거리를 지닌다. 그리고 동화 속의 신데렐라처럼 그들은 매우 운이 좋은 편이고 그들의 조력자들은 모두 마법에 가까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 사이에 가로놓인 사회적 신분과 자산 규모의 차이는 서로의 결점을 보완해주는 ‘진정한 사랑’에 의해 얼마든지 극복 가능한 것이었다.

IMF, 신데렐라의 동화를 끝내다
의대생 ‘쓰레기’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응답하라 1994>의 여자 주인공 성나정이 첫 직장에서 면접을 통과하고도 입사 취소 통보를 받는 장면에서도 확인되는 것처럼, 1997년은 어렵사리 입시를 통과해 충실한 대학 생활을 마치고 졸업한 20대에게 가혹한 연대가 아닐 수 없었다. 가혹한 현실은 멜로드라마 주인공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그들의 운명마저 바꿔놓았다. 멜로드라마의 현실은 점점 모호하게 변해 갔고 더 이상 현실을 말하지 않았다.
거세지는 한류의 파고를 확인시켜주었던 <가을동화>는 2000년대의 대한민국이 아니라 그저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내는 탈역사적인 시공간을 제시했다. 그리고 어쨌거나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던 여자 주인공들은 이제 더 이상 현실의 무게를 감내하지 못하고 죽어가기 시작했다. <세상 끝까지>(1998년)의 서희, <안녕 내 사랑>(1999년)의 연주, <진실>(2000년)의 자영, <가을동화> (2000년)의 은서, <아름다운 날들>(2001년)의 연수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외유내강의 젊은이들이지만, 결국 그녀들에게 덮쳐오는 것은 피하기 힘든 ‘불치병’의 마수다(<아름다운 날들>의 연수의 경우, 시청자들의 요구에 의해 극적으로 살아나기는 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 1990년대 멜로드라마의 전형을 닮고 있었던 여자 주인공들은 거의 불행한 질병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들은 마치 세상의 모든 불행을 짊어지고 가혹한 운명의 장난에 시달리다가 아름답지만 비극적으로 산화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보인다. 남아도는 재력으로 그녀들을 생활의 어려움에서 구제해주었던 1990년대의 백마 탄 왕자님들은 이제 드라마 속에서 설 자리를 잃은 것만 같았다.

그 대신 그들은 함께 몰락하는 위험을 감수한다. <가을동화>의 남자 주인공 준서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사랑하는 은서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의 현실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이 드라마가 2000년대 범아시아적 한국 드라마 열풍을 이끄는 도화선이 된 것이 우연의 일치만은 아닌 것이다.

현대의 신화(神話)
한국의 멜로드라마

2000년대 중반에 이르자 멜로드라마는 다시 한 번 변환을 꾀한다. <옥탑방 고양이>(2003년), <발리에서 생긴 일>(2004년), <파리의 연인>(2004년), <프라하의 연인>(2005년), <마이 걸>(2006년), <궁> (2006년), <커피프린스 1호점>(2007년) 등 드라마에서 직접적인 사회 변동의 여파를 겪고 성장한 여자 주인공들은 이제 더 생활력을 자랑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러한 생활력은 그녀들의 더 어릴 뿐 아니라 보다 확고한 재력과 사회적 지위를 자랑하는 왕자님들을 만나기 전까지만 빛을 발한다.

<발리에서 생긴 일>의 수정이 자신의 마음을 주지 않은 것으로 자존심을 지킨 것이나 <파리의 연인>의 태영이 자신의 모든 행복을 혼자만의 상상으로 치부해 버린 것과는 달리 <궁>의 채경은 아주 완벽한 신데렐라로 성공한다. 이 드라마들의 서로 다른 결말은 이후 멜로드라마 장르의 하위 분류를 예상케 한다. 다른 한편으로, 남성의 경제력에 기대지 않고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해 가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드라마들도 존재한다. 이런 드라마들 대부분은 연상의 여자 주인공을 타이틀 롤로 내세운다.

<내 이름은 김삼순>(2006년), <여우야 뭐 하니> (2006년)가 연상연하 커플의 성공을 그린 뒤, 2018년에는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와 <남자친구>가 선보였다. 신화는 고대의 인간이 자신과 그를 둘러싼 세계에 품고 있었던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설명의 방식이다. 다시 말해, 신화는 한 사회의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과 관계에 대해 품고 있는 모든 것, 현실에 대한 인식과 기대를 반영한다. 멜로드라마, 특히 TV 드라마의 멜로 장르가 ‘현대의 신화’로 긍정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가장 대중적인 미디어로서 TV 드라마는 시청자의 기대에 호응하는 서사로서 대중의 현실 인식과 기대심리를 반영한다. 현대의 신화로서, 가장 한국적인 장르로서 멜로드라마는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고 꿈을 그려낸다 할 것이다.

TV 드라마는 문학과 마찬가지로 은유나 상징을 활용해 현실을 반영한다. 1990년대 한국 드라마에서는 젊은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 엄마들이 그렇게 죽어 나가곤 했다. <겨울안개>(1989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1996년) 등 드라마는 평생을 가족에 대한 헌신을 사명으로 여기고 살아온 현모양처가 불치병 선고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국 드라마 속의 ‘불치병’은 급속한 현대화 속에서 누적돼 온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이 ‘성공’이라는 공식석상에서 소외해 온 ‘구석의 약자들’에 대한 최후통첩이었다.

사랑을 위해 영원을 사는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
‘현대의 신화’로서 TV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하는 한편, 사회 구성원의 간절한 기대를 추구한다. <인현왕후의 남자>(2012년), <구가의 서>(2013년), <별에서 온 그대>(2014년), <밤을 걷는 선비>(2015년), <달의 연인>(2016년)에 이르기까지, 2010년대에는 전반적으로 세기를 뛰어넘어 자신의 유일한 사랑을 찾아 세월을 뛰어넘어 그녀를 기다리는 남자 주인공들이 돋보이는 판타지 드라마가 눈에 띈다. 그 절정은 바로 <도깨비>(2017년)였다.
[2010년 이후에는 세기를 뛰어넘는 멜로드라마가 인기를 얻었다. TV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달의 연인>.]

도깨비 김신은 자신의 신부를 찾기 위해 무려 900년의 세월을 기다린다(원래의 목적은 사람으로서 죽음을 맞기 위해 도깨비 신부를 찾는 것이었지만, 드라마의 결말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남자 주인공은 결국 사랑을 하기 위해 천년에 가까운 세월을 견딘 것이다).

사랑을 위해 영원을 사는 이 남자들은 어마어마하게 긴 세월을 살면서 수많은 경험을 통해 무소불위의 능력과 거대한 부를 축적했음에도 청춘의 얼굴과 체력을 유지함으로써 ‘영원한 사랑’을 획득한다. 무한한 포기를 일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엔(N)포세대에게 ‘영원한 사랑’보다 더 아득한 판타지는 없는 셈이다.

문현선 연구원은…
인문연구모임 문이원 연구원이자, 공작소 파수(破守) 스토리텔러 & 캐릭터 프로파일러, 레 필로소피(LP) 인문 프로그램 ‘타로와 별자리’ 인문학 강사로 활약 중이다.
자료: ‘한국 드라마 4대 킬링 법칙’이라는 제목으로
주간지 상하이 TV(2001년 12월 제3호)에 실린 기사 내용 요약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5호(2019년 0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