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경 머니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고요한 마음속의 거문고 현(絃)이 떨리듯 팽팽한 긴장감이 밀려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끝 모를 평온의 기운이 또 다른 쪽에서 쉼 없이 피어난다. 햇살이 미처 깨지 않은 안개 자욱한 새벽녘 숲속의 정경이다. 마치 흑백사진처럼 중성화된 풍경에 꽃 한 송이가 비현실적으로 떠 있다. 진달래꽃의 형상을 가졌지만, 꽃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사진과 회화 기법을 혼용한 박훈성의 최근 작품은 오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마음의 거문고를 타듯, 박훈성의 조형 어법은 ‘심금(心琴)’을 울리는 특별함을 품고 있다.
박훈성 작가의 그림은 흔히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통찰력 넘치는 그림’으로 이름나 있다. 간결한 선묘로 압축해낸 가녀린 나뭇가지가 떠받친 꽃송이가 주인공이다. 얇은 나뭇가지와 활짝 핀 꽃은 진짜처럼 생생하지만, 배경엔 낙서를 해놓은 것처럼 헝클어지거나 날렵한 선(線)들이 함께 있다. 그래서 구상과 추상의 느낌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뤄, 마치 방금 빈 공간을 지나친 바람의 흔적이라도 보여주는 것처럼 기운생동의 흐름이 엿보인다. 그것은 서양화와 한국화의 느낌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수묵화 같은 심플한 사진 작업이 먹 선을 연상시키는 연필 드로잉과 어우러져 새로운 형식의 흥미로움을 더한다.
그림이 간결해 보여도 제작 과정만큼은 많은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무심결에 내려 그은 몇 가닥의 선처럼 보이지만, 그 이전에 수십 번의 선묘 연습을 반복한 이후에 나온 것이다. 박 작가의 드로잉 선묘는 일필휘지의 동양 미학을 압축해낸 기법이다. 단순한 꽃 그림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볼수록 서정적이라기보다 명상적이고 철학적인 통찰력이 깊게 우러나온다. 그는 여백미를 뽐낸 추상과 구상의 경계에서 통찰의 꽃을 피운다.
공(空) 사상에선 일체 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고 한다. 그 유한성 때문에 인간은 삶의 의미와 존엄성을 논하며, 겸양의 미덕을 찾게 되는지도 모른다. 박 작가 작품의 구성요소를 살펴보고 있으면, 이 공 사상의 묘미가 떠오른다. 실재와 닮은 꽃의 형상, 비현실적으로 가늘게 꼬인 나무줄기, 바람결을 스치듯 공중에 부유하는 드로잉 선묘들, 아예 화면 바탕을 둥글게 뚫어 놓은 구멍 등. 이 모든 것들이 한데 모여서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진지함 혹은 덧없음, 진실과 거짓 그 무엇도 아니다. 그냥 존재하거나 의미하는 것을 상기시킨다. 생각을 위한 생각, 사유하는 그림으로서의 박훈성 그림이 지닌 매력이다.
박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인간의 고정된 시각과 개념에 변화를 주기 위한 이미지와 사물과의 관계를 탐구하는 과정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래서일까. 모든 작품에 ‘사이(between)’라는 일관된 제목을 붙였다. 꽃 중에서 지극히 소박한 소재인 진달래, 동백꽃, 나팔꽃 등이 출현한다. 그것도 고작해야 한두 송이. 무질서하면서도 심플해 보이는 드로잉으로 배경을 삼고, 극사실적으로 묘사된 꽃송이를 공중에 띄워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섬세한 꽃의 형상은 어느 것이 더 리얼한가에 대한 문제보다 그 사물의 본질에 의문을 먼저 제기한다. 그의 본질적인 물음은 시각적인 것을 뛰어넘는 하나의 관념이다.
그래서 박 작가의 <사이(Between)> 작품들은 상반된 두 세계를 공존시키는 묘한 환상이나 초자연적인 감각을 지녔다. 무질서한 드로잉과 날카로운 칼자국, 화면을 꿰뚫은 구멍 등이 서로 교차하는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을 것만 같은 꽃의 이미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한다. 얼핏 무기교의 미학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그 장면들은 우연을 가장한 것이며, 철저하게 계산된 장면들이다. 오히려 그들의 조우는 필연적인 숙명에 가깝다. 적어도 박 작가의 감각지도에선 그렇다. 단독이 아니라 서로 극적으로 대면할 때 비로소 존재감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박 작가의 그림을 두고 평면과 3차원의 공간을 넘나들며, 생성과 소멸이라는 양극적 주제를 조형적으로 구현해낸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미지와 사물 사이의 상상력은 본질의 탐구와도 연관성을 갖는다. 그는 허상에 지나지 않을 흔한 형상에 심오한 가치를 부여한다. 마치 이름 없는 들꽃에 고유의 이름을 지어주듯, 박훈성의 꽃은 독립된 자아를 대변하며 새로운 자아로 다시 태어난다. 비록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 꽃의 형상이지만, 그 꽃을 대하는 감상자를 시각적 유희 그 너머로 인도한다. 그곳에서 잊혔거나 잠들었던 내 자아를 발견하는 것은 뜻하지 않게 선물을 받게 되는 보너스 행복이다.
박 작가의 그림에서 실재와 비실재의 경계는 모호하다. 사물 본연의 모습에 치중한 극사실 기법을 구사하면서도 주인공들이 놓인 상황은 스치는 상상 속의 한 장면을 캡처한 것 같다. 겉으론 꽃의 형상을 빌어 실상과 허상, 구상과 추상, 현재와 과거 혹은 미래, 현실과 비현실, 조화와 부조화 등의 모호한 이중적 경계를 보여준다. 마치 관습화된 상식에 끊임없이 감상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화두를 건네는 듯하다. 아마도 감상자에게 최대한 본질에 근접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박 작가 작품의 전시 가격은 대개 10호 500만 원, 50호 1800만 원, 100호 3000만 원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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