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화 성공하면 미래 가치 ‘껑충’

최근 효성에서 상용화에 성공한 공업용 플라스틱 신소재 ‘폴리케톤’으로 만든 자동차 휠.
최근 효성에서 상용화에 성공한 공업용 플라스틱 신소재 ‘폴리케톤’으로 만든 자동차 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1990년대 중반 사장단 회의에서 “소재 사업을 강화해 제일모직을 듀폰 같은 회사로 성장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소재를 기반으로 조 단위 이익을 내는 회사가 돼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지난해 제일모직의 영업이익은 3217억 원이었다. 이 회장이 소재 사업의 경쟁력을 강조한 후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조 단위 영업이익에 이르려면 아직 멀었다.

이런 제일모직이 올해 소재 전문 기업으로 변신을 선언했다. 패션부문은 에버랜드로 넘기고 독일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핵심 재료 업체인 노발레드(Novaled)를 인수했다. 소재 산업 육성을 위해 앞으로 3년간 1조8000억 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제일모직은 소재 분야에 역량을 집중해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독일의 소재 기업 머크는 2011년 10월 경기도 평택 포승 첨단기술센터 내에 OLED 응용개발연구소를 열었다. 독일 본사의 OLED 연구소 구조와 똑같이 설계된 이 연구소는 독일 외 지역에 지어진 최초의 OLED 연구소다. 지난해 기자와 만난 유르겐 쾨닉 한국머크 대표는 “한국은 항상 첨단 기술과 연결돼 있고 신기술 개발 트렌드를 이끌어 간다”며 “세계 박람회에서 가장 먼저 전시되는 OLED TV는 한국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연구·개발(R&D) 시설을 갖춰야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를 따라갈 수 있다”며 “한국이 머크의 전략 국가 중 하나가 된 것도 같은 이유”라고 했다.

기업들이 소재에 주목하고 있다. 자동차와 정보기술(IT) 등 첨단 산업은 각종 산업의 융·복합을 추구하고 있고 완제품 조립 생산 능력은 평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제품의 핵심이자 기반이 되는 소재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주요 기업들이 그룹 차원에서 주력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해 앞 다퉈 소재 산업의 경쟁력 확보에 나서고 있는 까닭이다.

삼성그룹은 이달 경기도 수원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 ‘삼성 전자소재 연구단지’의 입주식을 열었다. 삼성전자와 소재를 주로 다루는 삼성SDI, 제일모직, 삼성정밀화학 등이 공동으로 투자했다. 삼성그룹이 기초 소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을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간 완제품이나 부품 연구에 집중해 왔다면 이제는 해외 의존도가 높은 소재 분야에서도 독자적인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 연구단지를 통해 삼성그룹은 소재 계열사들을 특화시키고 완제품 업체인 삼성전자와의 협업도 늘려갈 계획이다. 첨단 소재 개발에 시너지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다.
한국전기연구원 나노융합기술연구센터가 개발한 전통 창호를 닮은 태양전지
한국전기연구원 나노융합기술연구센터가 개발한 전통 창호를 닮은 태양전지
나노 소재를 이용한 색가변 필름
나노 소재를 이용한 색가변 필름
SK그룹과 LG그룹은 정보전자소재 산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리튬이온 분리막, 편광필름, 연성동박적층판 등의 첨단 분야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 LG화학은 3D 일체형 편광판, 인듐주석산화물(ITO) 필름 등 고수익 프리미엄 제품에 집중하고 있다. LG화학은 1990년대 말 국내 처음으로 차세대 촉매로 불리는 ‘메탈로센’을 개발했고 2008년엔 이 기술을 활용해 고무와 플라스틱 성질을 함께 가진 ‘엘라스토머’ 제품을 생산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소재 산업에 대규모 투자 줄이어
오랜 관심과 과감한 투자의 결실도 보고 있다. 최근 효성이 개발과 상용화에 성공한 공업용 플라스틱 신소재 ‘폴리케톤’이 대표적이다. 폴리케톤은 대기오염 유해가스인 일산화탄소(CO)와 에틸렌, 프로필렌 등을 결합해 만든 친환경 첨단 고분자 신소재다. 1938년 듀폰이 나일론을 개발한 이후 소재 업계에서 75여 년 만에 개발된 고분자다. 효성에 따르면 폴리케톤은 한국 기업이 원천 소재 기술을 처음 개발해 독점권을 갖게 된 첫 사례다. 폴리케톤은 내열성, 내화학성, 내마모성이 뛰어나 자동차 등 부품 산업을 주도할 핵심 소재로 꼽힌다. 이 소재를 활용한 부품, 완제품 등 전후방 사업까지 포함하면 최소 10조 원에 달하는 부가가치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소재 강국인 일본과 독일의 주요 기업들은 탄소를 기반으로 한 신소재에 관심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철보다 강도는 10배 높고 무게는 5분의 1 수준인 탄소섬유다. 탄소섬유는 항공우주나 자동차 등 산업 분야에서 소재 경량화를 위한 신소재로 각광받고 있다. 친환경, 고유가 추세에 섬유강화플라스틱 산업에서도 유리섬유를 대체하며 사용량이 증가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도 소재 산업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일본 도레이와 손잡고 탄소섬유를 이용한 차체 소재 개발에 애쓰고 있다. 이 밖에 강도는 철의 100배에 전기 전도성은 구리의 1000배인 탄소나노튜브(CNT)도 기존 반도체 자리를 대신할 것으로 전망된다. 탄소를 얇게 펼친 소재인 그래핀 역시 차세대 반도체와 휘어지는 디스플레이에 사용될 핵심 소재로 인정받는 물질이다.


강도는 철의 100배에 전기 전도성은 구리의 1000배인 탄소나노튜브(CNT)도 기존 반도체 자리를 대신할 것으로 전망된다. 탄소를 얇게 펼친 소재인 그래핀 역시 차세대 반도체와 휘어지는 디스플레이에 사용될 핵심 소재로 인정받는 물질이다.


세계 소재부품 시장에서 한국의 지위는 낮지 않다. 전통의 제조업 강국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을 제치고 세계 5위 수준이다. 그러나 핵심 소재 원천기술과 고부가가치 첨단 소재부품의 기술 경쟁력은 여전히 독일, 일본과 같은 선진국의 60%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다. 기술을 따라가는 입장이지만 가격 경쟁력에서는 중국에 쫓기고 있다.

특히 첨단 분야의 핵심 소재는 대외 의존도가 높다. 일본의 경우 소재 산업이 산업 경쟁력을 대표한다. 소재 산업은 대일무역 역조의 대표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소재 산업은 제조업의 근간이자 산업, 에너지, 환경, 문화 등 생활 모든 영역에서 혁신과 변화를 선도할 수 있는 기반 산업이다. 산업의 기초인 소재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춰야 부품에서 완제품으로 이어지는 전 과정에서 강점을 가질 수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전자와 자동차 등 주력 산업의 상대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선 핵심 소재에 대한 경쟁력 확보가 필수”라며 “제조업 경쟁력의 원천이 소재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재 산업은 핵심 기술을 확보하면 독과점화가 가능하고 다른 전후방 산업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매우 크기 때문이다. 원천기술을 가지면 로열티 수입을 올릴 수 있고 수익성도 높다. 그만큼 시간과 돈에 있어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독일의 대표적인 소재 기업인 머크나 바이엘, 바스프 등 기업들의 오랜 역사만 봐도 알 수 있다. 효성이 신소재인 폴리케톤을 개발하는 데 걸린 시간은 10여 년이었다. R&D 비용은 500억 원이 투입됐다. 상용화는 선진국 기업들도 도전했다가 번번이 실패한 최첨단 기술이다. 전문가들은 특히 핵심 소재 개발은 장기간에 걸쳐 막대한 투자비가 소요되기 때문에 선택과 집중을 통한 전략적인 R&D 투자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윤정현 한국경제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