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BLESSE OBLIGE

세상 세(世)자에 정할 정(定). ‘서로 나누며 성장해서 세계로 나아간다’는 뜻의 ‘세정’이 탄생했을 때부터 나눔은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앞서 세정의 전신인 ‘동춘섬유공업사’가 세워졌을 때 이미 나눔의 봄바람이 불었는지도. ‘나눔 경영’ 롤 모델로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있어 늘 모범 사례로 등장하는 박순호 세정그룹 회장의 나눔 역사는 그렇게 4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박순호 세정그룹 회장 “가진 것을 나누는 것, 당연하지 아니한가”
지난 2005년 방영됐던 TV 드라마 ‘패션70s’를 기억하는지. 1960~70년대 패션산업을 중심으로 주인공이 옷가게 종업원에서 패션업계를 주무르는 인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다룬 이 드라마에는 세정그룹 박순호 회장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어린 시절 그저 옷이 좋았던 소년이 20대 청년이 돼 작은 의류회사를 창업하고, 열정과 패기, 그리고 오랫동안 현장에서 익힌 감각과 실력으로 나날이 성장, 4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매출 1조 원을 훌쩍 뛰어넘는 패션계의 거두가 된다는 드라마틱한 내용이 바로 박 회장의 스토리.

40여 년 전 첫 브랜드였던 ‘인디안’을 비롯해 ‘올리비아로렌’과 ‘앤썸’, ‘트레몰로’, ‘헤리토리’, ‘NII’, ‘센터폴’, ‘크리스 크리스티’ 등 다수의 유명 브랜드를 보유한 국내 대표 패션 전문 기업인 세정은 그렇게 박 회장이 맨손으로 시작해 일궈낸 결과물들이다. 대기업 계열사도 아니고 더구나 패션으로 시작해 유통, 건설, 정보기술(IT)에 이르기까지 10여 개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으로 성장해 탄탄한 입지를 자랑한다는 점에서도 세정이 상징하는 바는 크다.

그러나 무엇보다 세정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수식어가 바로 ‘착한 기업’ 또는 ‘나눔 경영’. 세정의 창업주로 세정의 전신인 동춘섬유공업사가 1974년 간판을 내걸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그의 경영철학, 인생가치관과 맥락을 같이 하는 부분이다.
박순호 세정그룹 회장 “가진 것을 나누는 것, 당연하지 아니한가”
배불리 밥 먹는 게 소원이었던 소년의 40년 나눔 실천

부산에 기반을 둔 기업인 세정은 그 지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회공헌과 나눔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박 회장이 개인적으로 실천하는 나눔뿐만 아니라, 기업 차원에서 전 직원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각종 후원사업과 봉사활동 등은 수많은 기업들에 귀감이 됐다. 박 회장의 나눔 활동은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지원과 홑몸노인 지원은 기본, 행복한 연금 기부 캠페인 전국 1호 가입자가 돼 자신의 연금을 고스란히 내놓았는가 하면, 자녀의 결혼 축의금을 기부했고,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에 부산 지역 최초로 가입하는 등 온몸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기부의 모델이 되고 있다. 지난 2011년 그 공로를 인정받아 행정안전부(현 안전행정부)가 제정한 ‘대한민국 자원봉사 대상’에서 대통령표창을 받기도 했지만, 그에게 진짜 상은 자신으로 인해 조금씩 나눔과 기부의 씨앗이 퍼져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박 회장에게 나눔은 어쩌면 지나칠 수 없는 숙제였다. 그가 지내온 환경과 역사가 그랬다. “어린 시절 배불리 밥을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가난한 시절을 보냈고, 20대 초반부터 의류업체에서 일하며 창업하기까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고된 날들에도 의지로 견뎌내며 성공 신화를 쓴 박 회장은 어려운 환경에 놓인 수많은 이들에게서 어린 시절의 그, 젊은 시절의 그를 발견했던 건지도 모른다.
창업과 더불어 40년 가까이 나눔을 실천해오고 있는 박순호 세정그룹 회장은 장학 사업, 어려운 이웃 돕기, 홑몸노인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창업과 더불어 40년 가까이 나눔을 실천해오고 있는 박순호 세정그룹 회장은 장학 사업, 어려운 이웃 돕기, 홑몸노인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세정’ 하면 생각나는 단어가 바로 나눔입니다. 기업을 시작하던 당시부터 나눔이라는 화두가 계속돼 온 것으로 아는데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첫 나눔 활동은 오순절평화의마을에서 시작됐습니다. 아내가 오래전부터 오순절평화의 마을에서 봉사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웠지요.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우리 주변에 온정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너무 많더군요. 그래서 저소득층을 위한 후원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이후 임직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어졌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직원들에게도 나눔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하셨죠.

“세정그룹이나 세정나눔재단에서 진행되는 자선바자회나 불우이웃돕기, 지역의료 무료 봉사, 집 고쳐주기 등 정기적인 나눔 행사도 있지만, 휴일에도 임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일일 봉사를 자처하고 있어요. 또 임직원들은 매월 급여에서 우수리를 떼어 매칭 그랜트 기부 방식으로 기부금을 조성하고 있지요. 매칭 그랜트란 임직원이 낸 성금만큼 회사도 기금을 지원하는 건데요, 그렇게 모은 기부금으로 끼니를 챙기지 못하는 아동들에게 밥상을 지원하고, 한 부모 가정 자녀 10명을 꾸준히 후원하는 데 쓰고 있습니다.”

2011년에는 330억 원을 출연, 세정나눔재단을 출범시켰습니다. 그동안에도 수많은 나눔 활동을 해오셨는데, 굳이 재단을 설립한 이유가 있나요.

“지금까지 회사 차원에서 나눔을 실천하면서 체계적이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많았어요. 그래서 재단을 설립했지요. 자립 기반이 취약한 사회복지시설 및 단체에 대한 지원과 장애인, 홑몸노인, 소년소녀 가장 등 소외계층 이웃에게 지속적으로 체계적인 지원을 할 목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재단에서는 어떤 활동들을 하고 있나요.

“출범 이후 첫 사업으로 생활이 어려운 어린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장학 사업을 전개했어요. 그동안 5억5000만여 원의 장학금을 지급해왔지요. 장학 사업은 해를 거듭할수록 후원 금액과 횟수를 점차 늘려나가며 그 규모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세정나눔재단의 또 다른 대표 사업은 주거환경 개선 사업입니다. 결손가정, 홑몸노인 등 저소득층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해 그들의 건강을 지키고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으로 연 30회가량 진행 중입니다.

지난 4월에는 ‘세정 사회복지사대상’을 제정하고 처음으로 14명에게 시상을 했어요. 사회복지사들의 과중한 업무, 열악한 근무 환경과 처우 등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된 가운데 투철한 사명감과 숭고한 봉사정신을 바탕으로 헌신하는 그분들의 노고를 격려하고 사회복지사의 진정한 가치를 일깨우고자 제정된 상입니다.”

박순호 세정그룹 회장 “가진 것을 나누는 것, 당연하지 아니한가”
지난 2008년엔 아너소사이어티에도 가입하셨죠.


“당시 부산에서는 아너소사이어티 1호 회원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아너소사이어티’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할 만큼 참여가 두드러지지 못했어요. 전국적으로도 가입자 수가 20여 명에 불과했을 정도지요. 그런데 이후 수많은 기업인들이 참여하고 홍명보 감독, 배우 수애 씨 등 많은 인사들의 가입이 이어지면서 전국적으로 참여가 확대됐고, 이제는 부산 지역에서만 가입 회원이 30명을 돌파했습니다. 처음에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가입할 때 ‘나눔 문화를 지역사회에 확산시키는 데 조금이나마 노력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적이 있는데, 고액 기부자 클럽이 활성화되는 데 미력하나마 보탬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보면 기쁘고 뿌듯하지요.”

사회적 책임에 충실하니 성공이 따라오더라

우리나라 나이로 70을 바라보는 박 회장은 그러나 창업을 했던 20대 청년의 그때와 똑같은 열정을 지금도 갖고 있다. 기업에 대한 책임감으로 여전히 현장형 최고경영자(CEO)로 살고 있는 그는 지금도 제품의 품질을 직접 꼼꼼히 챙길 정도다. 기업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책임감도 남다르다. 세정의 고객이자 곧 국민에 대한 책임, 기업이 근거한 지역사회에 대한 책임, 나아가 국가의 발전과 행복에도 기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강하다. 굳이 전후를 따지자면 돈을 좇아간 게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충실하다 보니 ‘성공’이 따라온 셈이었다. 숱한 위기를 겪으면서도 결코 나눔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던 고집스러움의 결과이기도 하다.
박순호 세정그룹 회장 “가진 것을 나누는 것, 당연하지 아니한가”
박 회장님의 나눔 철학은 경영철학과 어떻게 닿아 있습니까.

“우리 사회는 그동안 많은 발전을 이뤘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워졌어요.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물질적 성장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나눔의 가치를 외면하고 물질적 풍요로움만 추구한다면 사회는 갈수록 각박해질 테고, 어려운 이웃들은 늘어가지 않겠어요. 나눔엔 척도도 없고, 어떤 형태든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잖아요.

의지만 있다면 봉사 활동이 됐든 멘토링 후원이 됐든, 재능기부가 됐든 자신의 상황에 맞는 나눔 활동을 찾아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지요. 개인의 철학을 넘어 기업가 입장에서도 나눔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윤 창출과 사회 환원입니다. 나눔은 더불어 사는 사회의 가장 기본이자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기업은 지속 가능한 발전 속에서 고용 창출과 성실한 납세로 국가와 국민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하고, 나눔과 봉사로 지역사회와의 공동 발전을 도모해야 해요.”



기업이 성장해오면서 나눔의 규모도 커졌는데요, 내년이면 벌써 창립 40주년입니다. 소감이 어떻습니까.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동안 사업을 일구면서 정말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등 커다란 위기도 있었고, 재래시장 도매 방식 납품에서 대리점 체제로 유통을 변화시키는 등 중대한 결정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1974년 당시 132m²(약 40평) 규모에 편직기 4대와 미싱기 9대가 전부였던 동춘섬유공업사를 세우고, 처음 편직기를 통해 원단이 짜여 나오는 것을 보면서 신기하고 감격스러운 마음에 기계 옆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던 일들도 생각나네요. 돌아보면 지난 세월의 모든 것들이 피가 되고 살이 돼 지금의 세정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앞으로 세정이 50년, 60년, 100년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테고요.”

대기업 틈바구니, 넘쳐나는 해외 브랜드 속에서 로컬 브랜드의 자존심과 경쟁력을 지키고 있습니다. 자부심이 클 것 같아요.

“인디안이 내년이면 마흔 살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해외 브랜드들 속에서도 굳건히 남성 어덜트 시장에서 매출 1위를 유지하고 있어요. 최근 국내 패션업체들은 투자비용과 위험 부담으로 국내 자체 브랜드 개발보다 이미 해외 시장에서 테스트를 거친 수입 브랜드 사업을 전개하는 경우가 많은데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고 봐요. 오히려 치열한 연구·개발(R&D)을 통해 해외에 수출할 수 있는 국내 브랜드를 만들어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시키는 데 노력을 해야죠.”

오랫동안 현역에서 활동 중이신데요. 박 회장님에게 일은 어떤 의미인가요.

“삶의 원동력이지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기 역할을 찾고 그 역할에 충실할 때 사회에, 그리고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일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찾는 일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정의 미래, 그리고 나눔에 관한 계획이나 목표가 있다면 뭔가요.

“먼저 기업인으로서는 한국의 문화를 담은 글로벌 명품 브랜드를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한국형 글로벌 브랜드로 해외 시장에 진출해 한국의 색깔과 문화를 전파하고 싶어요. 나눔은 지금껏 그래왔듯이 그룹과 개인, 그리고 재단 각각의 역할에 맞게 나눔 활동을 전개해나갈 겁니다. 재단은 사회복지법인으로 소외계층을 중심으로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고, 그룹은 향후 문화나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사업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홑몸노인들의 편안한 노후를 위해 실버타운을 건립하고 싶은 소망이 있답니다. 나눔은 이제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됐으니까요.”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