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성과 차별성

나는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고 포스트잇 붙이기를 좋아한다. 감동적인 글귀를 만나면 짜릿한 쾌감을 느끼며 밑줄을 긋고, 언젠가 다시 한 번 읽을 것을 기약하며 포스트잇을 붙여둔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을 훑어보면 밑줄 위의 글들이 다시 읽어주기를 바라는 ‘침묵의 고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글을 쓸 때, 나는 전에 읽었던 관련된 책을 펴들고 포스트잇을 붙인 글귀를 찾아본다. 때로는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이 없어져서 포스트잇을 떼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다시 읽으면 또 다른 맛을 느낄 때도 있다.

하나의 책에 많은 밑줄이 그어져 있을수록 그 책은 그만큼 감동을 많이 받은 책인 것이다. 내가 가진 책 중에서 포스트잇을 많이 붙인 책 중 하나로 철학자이면서 신학자인 유대인 랍비 조너선 색스가 쓴 ‘차이의 존중(Dignity of Difference)’을 들 수 있다.

이 책에서 색스는 통일성과 차별성, 유일성과 다양성을 이렇게 말한다.

“흔히 하나님은 한 분이기에 구원에 이르는 길도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유일신 신앙의 중심 교리는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유일성은 다양하게 숭배된다는 게 맞다. 창조된 세계의 영광은 그 놀라운 다양성에 있다. 인류가 사용하는 수천 가지 언어들, 다양한 문화, 인간 영혼에 대한 갖가지 표현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들에 대해 지혜의 목소리를 들려줄 것이다. 내가 ‘차이의 존엄’이라는 말로 뜻하는 바가 이것이다.”
[Book & Life] 같음과 다름의 갈등과 조화
새로운 바벨탑이 세워지려는 시대

현대에 들어서면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며 모든 영상과 소리는 숫자로 전환됐다. 숫자로 바뀐 이 정보를 멀리 보낼 수도 있고 저장하고 검색할 수도 있는 정보통신기술이 급격히 발전하고, 인터넷이 보편화하면서 60억 인구의 지구는 글로벌화돼 국경이 사라져 갔고 더욱 더 인류가 하나라는 생각이 강조되고 있다.

글로벌화의 보편주의는 지역별로 집단화되면서 많은 혜택도 주었지만 커다란 해악도 끼쳤다. 시장 규모가 커져 대량 생산으로 인해 원가가 절감되고 소비가 촉진되면서 전에 누리지 못한 경제적 풍요를 누리기도 한다.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인해 우리는 과거에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먼 나라의 맛있는 과일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시장이 공개되고 확대돼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효율적인 최고의 기업만이 지배하게 됐다. 그 결과 상위 20%의 사람이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80%를 가져가는 파레토의 분포를 낳게 돼 소득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성경 주석가인 랍비 베를린은 성경 속 바벨탑을 최초의 전체주의로 해석했다. 인류 최초의 글로벌 프로젝트인 바벨탑 이야기는 전체주의와 통일성을 추구하며 신의 영역에 도전하려던 인간이 이에 실패함으로써, 전체주의가 개별주의의 다양성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는 똑같다는 사실, 즉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이며 육신을 가진 피조물이며, 배고픔과 갈등과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며, 생각하고 기대하고 꿈꾸고 열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서로 다르다. 저마다 독특한 개성과 언어와 문화와 공동체를 가지고 살아간다. 색스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갖는 것이 바로 이렇게 ‘다르다는 사실’ 때문이고, 우리는 모두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고 주장한다.

기계나 로봇이 인간과 같은 존엄성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대체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우선의 편의성 때문에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바벨탑을 쌓으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 창세기 때 바벨탑을 무너뜨리며 흩어 놓았던 인간의 언어는 컴퓨터의 언어로 다시 통일되는 것처럼 보인다. 10년 뒤 스마트폰의 위력이 어떻게 될지 상상하면 두렵다.



시장은 필요악인가

우리 모두는 비슷하지만 제각기 다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모든 사람의 능력과 기호가 다른 것을 인정하면서, 이 차이를 메우기 위해서 서로가 가진 것을 교환해 만족을 높이는 기술을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시장이다. 그러므로 시장에서의 교환은 서로가 윈윈(win-win)하도록 돼 있다.

그리고 이 시장의 기능에서 소유권을 인정하며 저마다의 영리를 추구하고 자유롭게 교환하도록 하는 것이 자본주의다. 애덤 스미스는 시장에서 재화나 용역의 흐름은 ‘가격’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해결해 주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극단적으로 “맥도날드 매장이 있는 두 나라가 서로 전쟁한 경우가 없다”는 이른바 ‘글로벌 아치(global arches)’ 이론을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개인끼리의 거래는 양쪽 모두 이익을 얻지만 수십억 거래가 축적되면 어마어마하게 불평등한 결과를 낳게 될 수 있다. 정보기술(IT)의 발전과 FTA의 확대로 인한 세계화는 이러한 현상을 가속화시켰다. 이제 시장의 기능만으로는 이러한 불평등을 해소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색스는 여기서 부자의 사회적 책임 즉, 리세스 오블리주(richess oblige)를 주장하며 “부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므로 거기에는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의무가 수반됐다”고 말했다.

다소 결점은 있지만 그나마 인류가 발견한 가장 완벽에 가까운 제도인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를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면, 가진 자들은 ‘베풂’의 의미를 자각해야 한다. 그들의 부는 엄밀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것, 또는 사회의 것으로 그들은 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점유’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세상 만물은 하나님의 걸작답게 제 나름의 존엄함을 지니고 있다. 색스는 “우리는 그것을 이용해도 좋다는 위임장을 받았지만, 그것을 파괴하거나 빼앗을 권한은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용서와 화해

너와 나 사이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같음’을 받아들이고, 시장의 역기능에서 오는 상대적 차이를 메우기 위해 베풂의 손길이 열리기 위해서는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색스는 성경 속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용서와 화해를 위한 사랑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경이 전하는 위대한 이야기 중 하나는 한 아기를 안고 와서 둘 다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을 앞에 두고 진짜 엄마를 가려낸 솔로몬 왕의 이야기다. 솔로몬은 아기를 죽게 하느니 차라리 아기를 다른 여인에게 주겠노라고 말한 여인이 진짜 엄마임을 알아차린다. 사랑은 소유 이상의 무엇이다. 사랑은 놓아줄 줄 아는 힘이다. 용서 역시 놓아줄 수 있는 힘이며, 용서가 없다면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이를 죽이고 만다.”

대체될 수 없는 모든 인간의 유일성으로 인한 서로 간의 ‘차이의 존엄’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자선을 베풀고 용서하게 되면, 우리는 다양성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도 배울 것이다. 나는 아직도 ‘차이의 존중’에 붙인 포스트잇을 뗄 수 없다. 언젠가 다시 읽고 싶기 때문이다.



일러스트 허라미
전진문 (사)대구독서포럼 운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