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감을 나누고, 경험을 공유하다
프라이빗뱅크(PB)센터를 통해 자산관리와 투자 상담 외에도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을 사귀거나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얻는 자산가들이 많다. 따라서 각 금융사는 PB센터를 더욱 고급화하고 스크린골프장, 와인 바, 갤러리 등을 갖춘 복합 문화·사교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특히 소규모 클래스와 파티를 자주 주최하며 PB센터와 고객 간, 그리고 고객 서로 간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 ‘하나회’라는 골프 모임은 하나은행 PB센터 고객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사교 모임이다. 1998년 하나은행 PB센터가 주최한 골프대회에서 안면을 튼 PB센터 고객들이 골프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자고 의기투합해 만들어 약 15년간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 부부 8쌍이 겨울을 제외한 매월 넷째 주 목요일이면 골프장에 모인다. 참석률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거의 100%다.오랫동안 함께 모임을 갖다 보니 결혼식, 장례식을 서로 챙기는 것은 물론, 웬만한 친인척보다 더 끈끈한 친밀 관계를 갖고 있다. 여름에는 골프장을 해외로 옮겨 하와이나 필리핀으로 가족 동반 여행도 떠난다. 이들은 비슷한 경제 수준에 비슷한 연령, 그리고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이야기가 잘 통하기 때문에 이 모임이 오랜 기간 잘 유지될 수 있었다고 본다.
현재 국내 은행 및 증권업계에서 고액자산가를 대상으로 한 ‘로열 마케팅’의 최일선에 선 곳은 각 금융사의 PB센터다. 그리고 최근 로열 마케팅의 중심에는 각종 클래스를 중심으로 한 사교 모임이 있다. PB센터 고객 중 10~20명 소수만 모여 클래식 음악회, 건축과 미술, 예술과 명품, 인문학 프로그램, 와인·싱글 몰트위스키 클래스, 골프대회 등 다양한 콘텐츠의 서비스를 향유한다. PB센터를 이용하는 자산가들은 각자 취향에 따라 이런 테마에도 관심을 갖지만, 이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다른 회원과의 만남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모임 대부분은 럭셔리 인테리어를 갖춘 PB센터 지점에서 이뤄진다. 각종 클래스를 진행해 줄 전문가를 외부에서 초청해 편안한 분위기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와인 소믈리에, 싱글 몰트위스키 전문가, 프로 골퍼, 미술 큐레이터, 오케스트라 등이 10~20명을 위해 PB센터에서 강연과 공연을 갖는다. 건축 클래스의 경우, 명망 있는 건축과 교수를 초청해 건축과 관련된 이야기를 사적으로 나눈다.
이 모임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건축과 교수와 수원 화성을 함께 걸으며 설명을 듣는 야외 모임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VIP 고객의 문화 콘텐츠와 서비스를 전담하는 미래에셋증권 WM비즈니스팀의 박수지 차장은 “비슷한 자산 규모를 가진 PB센터 고객들이 문화, 예술 등을 공유하며 만남을 갖는 것에 대해 만족도가 매우 높다”며 “분위기가 처음에는 서먹서먹해 하고 경계심이 있지만, 행사 주최 직원이 서로를 일부러 소개해주고 자연스럽게 식사 등을 같이 하면서 고객 간 친밀감을 높여 나간다”고 설명한다. 문화 강좌 외에도 재테크나 절세에 관련한 토론 모임도 있다. 전문가를 중심으로 소수가 모여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투자 정보를 교환하기도 한다. 특히 PB센터 고객 중에는 미국 영주권자·시민권자도 다수 있는데, 이들은 해외 금융 자산의 미국 국세청(IRS) 신고건 등에 대한 정보를 교환한다.
상속·증여의 경우 가업 승계를 생각하고 있는 최고경영자(CEO)들이 모여 함께 계획과 경험을 공유한다. 하지만 아무리 친해지고 경험을 공유해도 어느 정도 금기시 하는 선이 존재한다. 사교 모임을 통해 재테크나 금융 상품에 대한 정보 교환은 많이 하더라도, 각자의 자산 규모에 대한 언급이라든지 공동 투자에 나서는 것은 서로 매우 꺼려한다고 PB센터 측은 귀띔했다.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같은 PB센터 고객이라도 여러 부류로 나뉜다. 골프 모임의 경우 남성 CEO가 주로 모이고, 문화예술 강좌의 경우 사모님들이, 건축 클래스 등은 부동산 자산가들이 주로 모인다. 하나은행 강남PB센터 김종호 부장은 “사교 모임에서 소극적인 사람은 거의 없다”며 “적극적으로 서로를 알려고 하고 여러 정보 교환도 매우 활발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또한 “인맥 형성과 네트워킹을 위해 사교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고객이 점점 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PB센터는 VIP 고객들의 요청에 따라 파티 장소도 제공한다. VIP 고객이 속해 있는 동문회나 동호회 모임을 PB센터에서 갖고 싶다고 요청하면 주로 저녁 시간에 PB센터의 공간을 무상으로 대여한다. VIP 고객은 케이터링 서비스만 불러 PB센터 내에서 스탠딩 파티를 개최할 수 있다. 사교 모임은 2세가 더 활발
PB센터의 사교 모임 주선은 최근 고객의 2세를 대상으로 확대되고 있다. PB센터 중심의 고객 자녀들 모임은 수입차 브랜드 동호회, 요트 동호회, 쿠킹 클래스, 재즈카페 동호회, 2세 경영인 모임 등 다양하다. 미래에셋증권 PB센터는 VIP 고객의 자녀를 위한 ‘금융인턴십’과 ‘금융캠퍼스’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VIP 고객의 자녀들에게 차별화된 금융 교육 콘텐츠와 다양한 직업군에 대한 진로 탐색 경험을 제공한다. ‘금융인턴십’은 중고등학생 자녀를 대상으로, ‘금융캠퍼스’는 대학생 자녀를 대상으로 한다. 자녀에게 올바른 경제 가치관과 인생의 진로를 탐색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기 때문에 PB센터 고객의 호응을 얻고 있다.
특히 결혼 적령기를 맞은 PB센터 고객의 자녀를 위한 단체 맞선 파티는 반응이 뜨겁다. 맞선 행사 원조 격인 하나은행은 매년 자산 10억 원 이상인 고객의 자녀 약 100명을 대상으로 단체 맞선 자리를 주선한다. 호텔이나 선상에서 맞선 파티가 이뤄지며 아나운서가 사회를 맡고 다양한 이벤트가 이뤄진다. 현재 하나은행 맞선 행사를 통해 결혼한 커플도 상당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결혼할 경우 하나은행 고위 임원의 주례는 물론 벤츠나 크라이슬러 등 고급 웨딩카와 함께 유명 연예인의 축가 서비스도 제공한다.
하나은행뿐 아니라 신한은행, 우리은행, 외환은행 등도 VIP 고객의 자녀를 위한 미팅 행사를 적극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김종호 부장은 “혼기가 차도 결혼을 하지 않은 자녀는 여느 부모처럼 VIP 고객들의 큰 고민거리”라며 “그래서 이런 맞선 모임을 많이 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맞선 모임은 자녀의 참여 의사를 확인하고 남녀 각각 참가자 리스트를 받아본 뒤 진행된다. 이 모임 역시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호텔 등 외부 맞선 행사 뒤 PB센터에서 3개월에 한 번씩 단체 만남을 지속해 나간다. 이러한 고객 2세 모임은 맞선 개념을 넘어서 정기적인 사교 모임이나 취미 동호회로 발전된다. 2세들 역시 자산관리에 대한 노하우를 공유하는 등 재테크 모임도 있다.
박수지 차장은 “이런 행사에는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다”며 “PB센터 고객이 대부분 상당한 재력가여서 그 딸에게 맞는 남성의 수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PB센터 측은 “VIP 고객들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런 자녀들의 만남에 대한 만족도가 높고 자녀들끼리 결혼해 사돈이 된 사례도 있다”고 귀띔했다.
PB센터는 이와 같이 사교 모임 서비스를 점점 확대해 가는 추세다. PB센터 초기에는 문화 마케팅으로 VIP 고객들에게 큰 오페라 공연의 티켓을 제공하는 등 대규모로 이뤄졌다. 당시는 초부유층(UHNW) 시장이 그렇게 크지 않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점점 슈퍼리치들이 확대되고 PB 센터의 고객 수가 급증하면서 과거의 고객 서비스와 마케팅은 현실적으로 힘들어졌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기점으로 소규모 사교 모임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후 3~5년간 PB센터 서비스의 중심에 사교 모임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PB센터가 사교 모임을 주선하며 얻는 효과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VIP 고객과 PB센터가 더욱 밀착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소규모 모임을 통해 고객들은 더 특별하게 관리를 받고 있다는 서비스 만족도가 높아진다. 그리고 고객끼리 네트워킹이 되고 친밀도가 높아지면서 고객 이탈을 막는 효과도 있다.
둘째, 사교 모임을 통해 신규 고객을 확보할 수 있다. PB센터 고객이 아니어도 그 친구나 친인척의 경우 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데, 그들은 대부분 비슷한 경제 수준이므로 잠재 고객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자녀 맞선 모임도 마찬가지다. PB 고객인 부모에 이어 2세들까지도 PB센터 고객으로 영입할 수 있다.
김종호 부장은 “신규 고객 확보에 있어 기존 고객의 소개가 가장 중요하다”며 “따라서 PB센터 이벤트 담당 부서가 다양한 모임이나 행사를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횟수를 늘리고 있다”고 밝혔다. PB센터 업계는 자산가들의 인맥 형성 욕구가 점점 더 확대됨에 따라 사교 모임은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진원 기자 zinon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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