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부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금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았다는 유럽 자기. 국내에서도 유럽 자기의 향연을 감상할 수 있게 된 데는 복전영자 부천유럽자기박물관장의 공이 절대적이다.

스무 살 무렵 컬렉션을 시작해 평생을 유럽 자기와 함께 해온 그의 자기 예찬론.

[THE COLLECTOR] “유럽 자기의 아름다움을 공유하다” 복전영자 부천유럽자기박물관장
폭설이 내린 다음 날, 부천종합운동장의 눈밭을 헤치고 들어가 마주한 부천유럽자기박물관 내부 풍경은 더욱 경이로웠다. 3대 유럽 자기로 꼽히는 독일의 마이센, 프랑스의 세브르, 영국의 로열 우스터 등을 비롯해 신비로움을 간직한 수많은 유럽 자기들이 화려하고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며 낯선 방문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난 2003년 개관한 부천유럽자기박물관에 소장된 유럽 자기 작품은 약 900여 점. 지역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많을 때는 하루에도 200~300명의 관람객이 찾아드는 이 박물관의 탄생은 전적으로 복전영자 관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물관 초대 관장인 그가 부천시에 개인 소장품을 기증하면서 박물관이 생겨난 것. 이후 추가 기증자들의 소장품이 몇몇 더해지긴 했지만, 박물관에 전시된 거의 대부분의 작품은 그의 기증품이다.

이뿐만 아니라 지난 2005년에도 경북 김천시에 개인 소장품 1000여 점을 기증해 세계도자기박물관을 탄생시켰고, 2012년 5월에는 ‘꿈의 숲 아트센터’에서 ‘마이센으로의 초대’라는 제목으로 역시 개인 소장품 700점을 일반에게 공개해 수많은 이들과 유럽 자기의 아름다움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좀처럼 볼 수 없는 진귀한 유럽 자기의 매력을 알게 됐으니 그 공을 높이 인정받아 마땅하건만 그는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어 오히려 기쁘다”고 말한다.
세브르 평화의 화병
세브르 평화의 화병
마이센 사랑 이야기.
마이센 사랑 이야기.
국내에 유럽 자기를 전파한 장본인

수십 년간 공들여 모은 작품들을 어떻게 기증할 생각을 하셨어요.

“모든 게 그렇겠지만 자기 역시 하나 둘, 몇십 개까지는 ‘내 것’이고 사용도 가능하지만, 100개, 200개가 넘어가면 ‘내 것’이 아니에요. 장 안에 넣어둔 채 벌레 꼬이게 할 순 없잖아요.(웃음) 여러 사람이 함께 보면서 내가 느꼈던 그 즐거움을 나눴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기증을 시작하게 됐지요.”

그래도 마음이 많이 허전하셨을 것 같아요.

“물론 딸을 시집보내는 것처럼 가슴이 아프긴 했어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잘 돌봐줄 수 있을지도 걱정됐고요.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잘한 일 같아요. 관람객들이 작품을 보고 ‘기똥차다’고 감격스런 표현을 해줄 때는 큰 보람을 느끼지요.”

관장님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유럽 자기의 매력에 대해 알게 된 거네요.

“유럽 자기 쪽으로는 제가 거의 유일할 거예요. 제가 일본에서 온 지 21년 됐는데(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복전영자 관장은 귀화 한국인이다. ‘복전(福田)’이라는 성은 일본 이름의 성 ‘후쿠다’를 한자 그대로 옮긴 것), 그동안 모은 유럽 자기들은 대부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산 것들이죠.

우리나라에도 청자, 백자 등 자기가 유명하지만 소박한 선비에 가깝잖아요. 그에 비하면 유럽 자기는 너무나 화려해서 여성들이 보면 갖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죠. 그뿐만 아니라 유럽 자기를 보면서 유럽엔 이런 문화가 있었구나 하며 한국 문화와 비교도 할 수 있으니 교육적으로도 굉장히 좋은 자료라는 생각이 들어요.”
로열 우스터 과일 그림 금장 티세트.
로열 우스터 과일 그림 금장 티세트.
유럽 자기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 좋으시겠어요.

“두 개의 박물관에 기증을 하게 된 것도 그런 분들이 있어서였죠. 부천 박물관은 당시 시장이었던 원혜영 의원의 제안으로 성사됐고, 김천 박물관도 박팔용 시장이 먼저 기증을 요청해왔어요. 원 의원이 문화적 마인드가 대단해 물건을 한눈에 알아본 분이라면 박 시장은 도자기 인형을 좋아했던 딸 덕에 뜻밖에 유럽 자기의 진가를 알게 된 분이죠.

그 일화가 참 재밌어요. 유럽 출장을 가는 박 시장에게 딸이 도자기 인형을 하나 사다 달라고 했대요. 박 시장은 1, 2만 원 하겠지 생각하고 12개도 사다주마 약속했는데, 막상 사려고 했더니 한국 돈으로 700만~800만 원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란 거지요. 그 일이 있은 후로 유럽 자기에 눈을 떴다고 해요.”

아직도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이 많다면서요.

“한 500~600점은 갖고 있어요. 대부분 마이센 자기들인데 한국 자기도 많이 있지요. 모처에 있는 창고를 빌려 보관하고 있는데, 또 원하는 분이 있다면 기증할 의사도 있어요.”
세브르 라퐁텐 이야기 화병.
세브르 라퐁텐 이야기 화병.
컬렉션 비용으로 빌딩 한두 채쯤 샀을 듯

컬렉션을 시작하신 게 어머니 영향이라고 들었어요.

“어릴 때 어머니가 유럽 자기를 사 모으는 걸 보면서 나는 절대 하지 말아야지 그랬어요. 어머니가 유럽 자기를 사러갈 때 사탕 하나라도 얻어먹을까 하고 따라가곤 했는데, 자기 사는 데 돈을 다 써버려서 사탕 하나를 못 사주시는 거예요(웃음).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느 날 일본 롯폰기의 앤티크 숍 쇼윈도 앞에서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죠. 결국 그 숍에 취직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비즈니스일 뿐이라고 다짐했어요. 그러다 사장님이 가끔 뉴욕이나 홍콩에 가서 경매를 할 때 도와주곤 했는데 나도 모르게 몇 점씩 사오고 그러더군요.(웃음)”

그러다 점점 규모가 커진 거군요.

“그랬죠. 일본에서 서울로 왔을 당시에 보니 엄청난 양인 거예요. 그래서 평창동에 개인 박물관(셀라뮤즈자기박물관)을 열었어요. 그때도 반응이 정말 좋았는데 문제는 개인 박물관이다 보니 아무런 지원이 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계속 마이너스였죠.

그래서 아이디어를 낸 게 점심, 저녁 시간에 레스토랑을 겸하며 그 수입으로 박물관을 운영하는 것이었어요. 저녁에는 박물관 디너라고 해서 19세기 고급 식기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진짜 서울에서 이렇다 할 사람들은 다 왔던 것 같아요.”
세브르 수프볼.
세브르 수프볼.
댁에서도 유럽 자기를 사용하시나요.

“저는 좋은 건 써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남들이 알아주건 말건 여성들이 비싼 속옷을 입으면서 느끼는 자기만족과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커피를 한 잔 마시더라도 마이센 커피잔에 마시면 그 자체로 큰 즐거움이 되는 거죠.”

유럽 자기 컬렉션에 엄청난 금액이 투자됐을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가격이 얼마냐고 관심을 갖는데 저에게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들이에요. 소장한 물건들을 사고 싶다고 하는 분도 있었지만 팔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죠. 그냥 선물로 주기는 해도 되판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물론 스무 살 무렵부터 컬렉션을 시작했으니 그동안 들인 비용만 따지면 작은 빌딩 한두 채 값을 될 거예요.”

그 정도면 가족들 반대도 있었겠는데요.

“사실 남편은 계속 반대를 했어요. 술을 좋아하는 남편은 이 돈이면 좋은 와인을 마시고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데 왜 이런 걸 사느냐고 했죠. 더구나 들고 오는 것도 제가 아니라 남편의 몫이었으니까요.(웃음) 그런데 결국엔 제 뜻을 따라줬어요. 아무래도 남편이 계속 반대했다면 이렇게까지 하긴 힘들었겠죠.”
덜튼 제우스 화병.
덜튼 제우스 화병.
로열 코펜하겐 플로라다니카.
로열 코펜하겐 플로라다니카.
관장님이 그랬듯 자녀분들도 어머니의 성향을 물려받았나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남매가 모두 결혼해서 미국에 사는데 오히려 막 쓰기 좋은 플라스틱을 선호할 정도죠. 큰딸이 결혼할 때 크리스티 경매에서 좋은 문갑을 하나 사서 보냈더니 고맙다는 말은커녕 짐 되게 이런 걸 왜 보냈느냐고 하는 거예요. 아들, 며느리도 마찬가지고요. 처음엔 좀 서운했지만 뭐,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이 있는 거니까요.”

유럽 자기와 함께 한 인생이 어느덧 50년이 다 됐네요. 여전히 꼭 갖고 싶다 하는 게 있으신가요.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런 마음이 덜해요. 그 대신 한국 자기들 중에 좋은 걸 보면 탐나고 갖고 싶고 그래요. 지금은 석간주와 해주 항아리를 나름대로 수집하고 있어요. 석간주를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매력을 느끼죠. 2013년 5월이면 부천유럽자기박물관 개관 10주년인데 석간주와 해주항아리로 ‘조선의 눈물’ 기념전을 계획하고 있어요.”

기증하신 작품이나 소장하고 있는 물건 중에 가장 아끼는 작품이 있다면요.

“나한테는 다 똑같이 귀하고 소중해요. 나와 인생을 함께 해온 내 삶의 동반자들이니까요.”



박진영 기자 bluepjy@kbizweek.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