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장 레옹 제롬에게 잠시 배운 후 보르도로 돌아갔는데 그곳에서 로돌프 브레스댕을 만난다. 르동은 상상의 세계를 즐겨 묘사한 브레스댕의 영향을 받는 한편 그로부터 드로잉과 판화 테크닉을 배우게 된다. 이후 그는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무의식의 저변에 자리한 신비한 세계를 묘사하기를 즐겼다. 그는 당시 문단을 풍미하던 상징주의 문학에 공감, 보들레르와 말라르메와 친교를 맺기도 했다. 그가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84년 위스망스가 자신의 소설 ‘거꾸로’에 르동의 작품을 언급하면서부터였다.
르동이 살았던 19세기는 산업혁명과 과학의 발전으로 사람들의 의식과 일상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여러 가지 과학적 성과들이 속속 발표되면서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우주 자연의 비밀을 풀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특히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환경이 변화했을 때 개체 간의 경쟁이 일어나고 자연의 힘으로 선택이 반복되는 가운데 진화가 이뤄진다고 한 주장은 당대인들을 열광시켰다.
한편으로 과학의 발전은 사람들로 하여금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불신을 갖게 만들었고 상당수의 지식인들은 그 대안을 동양사상에서 구하려 했다. 그런 가운데 불교가 그 유력한 대안으로 등장했고 지식인 사회에 바람을 일으켰다. 선한 업을 많이 쌓음으로써 누구나 부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은 서구인들에게 일종의 ‘정신적 진화론’으로 비쳤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불교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전통적인 접신론(接神論·theosophy)을 결합시켰다. 접신론은 우주와 신,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실타래로 연결됐다는 전제 아래 그 신비를 추적하려 한 사상으로, 특히 19세기 후반 헬레나 블라바츠키에 의해 유럽 사상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당대의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은 많건 적건 불교와 접신론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르동의 작품은 그러한 시대의 정신적, 과학적 조류를 폭넓게 흡수해 자기 방식으로 소화한 상상의 산물이다. 르동은 만물의 미세한 부분에는 ‘신의 배아’가 자리하고 있으며 이것은 진화의 과정을 거쳐 꽃을 피운다고 생각했다. 특히 식물 가지의 끄트머리는 신이 내리는 은총의 빛을 받아 그 배아가 꽃망울을 터트리게 되는 장소라고 여겼다. 그중에서도 눈은 영혼의 각성을 상징한다고 봤는데 르동의 초기 작품은 이러한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다.
르동의 작품은 1890년대에 들어와 면모를 확 바꾼다. 태초에 우주의 거대한 폭발인 ‘빅뱅’이 일어나 별들이 우주 공간을 메운 것과 마찬가지로 화면은 거대한 꽃다발이 폭발해 꽃으로 가득 메워진 것 같다. 흑백이 지배하던 화면도 현란한 색채감으로 보는 이를 매혹한다. 한편으로 꽃들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는 모습은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미생물의 세계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당시 파스퇴르에 의해 이뤄진 미생물학의 발전과 신지학의 정신적 진화론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르동의 초상화 중에서 이런 꽃의 무리는 여자와 아이의 초상에서만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당시 서구인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던 인종주의와 남성 우월주의적 사고의 반영이다. 당시 서구인들에게 있어 아이와 여성은 비이성적이며 감정을 억제할 줄 모르는 히스테리컬한 존재였다. 그들은 꽃망울이 개화하듯 정신적인 개화를 향해 나아가야 할 대상인 것이다.
정석범
한국경제신문 문화전문기자.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홍익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고 저서로 ‘어느 미술사가의 낭만적인 유럽문화기행’, ‘아버지의 정원’, ‘유럽예술기행록’ 등이 있다.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