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s on…] 사회주의의 황제들
자본주의의 원리에 관한 탁월한 분석, 사회주의의 이론과 실천으로 잘 알려진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다음 단계로 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냥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 선진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단계에서 경제적 생산력이 충분히 성장하고 모순이 숙성돼야만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들어설 수 있다는 논리다. 그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물질적 존재 조건이 낡은 사회 자체의 태내에서 충분히 성숙하기 전까지는 새롭고 고도한 생산관계가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의도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그는 1848년 독일과 프랑스를 휩쓴 시민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의 완성으로 보고,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곧바로 다음 단계인 사회주의 이행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당시 힘세고 건강했던 초기 자본주의는 위기를 거뜬히 극복할 만한 탄력과 유연성을 갖추고 있었다.

마르크스가 죽을 때까지도 선진 자본주의 사회는 경제적 불평등으로 계급 모순이 심화되는 가운데서도 산업혁명과 과학혁명, 해외 식민지 개척에 힘입어 사회주의로 이행할 조짐을 보이기는커녕 탄탄대로를 걸었다.

평생을 바친 혁명의 대의가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지 모른다는 조급증 때문이었을까. 마르크스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러시아에서 혁명의 기운을 느끼고 러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대단한 열정이었으나 그것은 그의 치밀한 연구와 치열한 실천에 걸맞지 않은 중대한 판단 미스였다. 그 혁명의 기운은 바로 20세기 말 실패로 끝난 현실 사회주의의 대실험을 낳았으니까. 그런데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마르크스가 예기(豫期)한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끝내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러시아에서 혁명의 기운은 그의 사후 수십 년 뒤에 현실화했다. 1917년 러시아의 사회주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은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정권을 장악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 그러나 레닌이 무너뜨린 제정 러시아는 선진 자본주의와 거리가 멀었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라고 말하기에도 어려웠다.

러시아는 산업혁명도 거치지 않았고, 자본가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공업이 매우 취약했을 뿐 아니라 지주가 농노를 착취하는 봉건사회였다. 그런 탓에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했어도 실상 그가 이룬 혁명은 마르크스주의에 따른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다.

사회주의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일까.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수십 년 동안 세계 각지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했지만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국가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

서유럽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진입하기는커녕 자본주의를 세계화하는 데 힘썼고, 이에 맞서 구소련과 동유럽은 사회주의 세계체제로 결속했으며, 식민지·종속국 상태에서 독립한 신생국들은 민족해방운동의 이념을 기본으로 삼고 여기에 새로운 사회주의 이론을 접목시키는 방식으로 변종 사회주의 국가를 세웠다. 이런 세계적 편제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시대를 이끌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야기가 좀 딱딱해졌지만, 여기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이탈한 20세기 현실 사회주의의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혹은 결정적 결함)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제왕적 권력자다.

사회주의 국가는 원칙적으로 공화국이어야 하므로 러시아를 비롯해 중국, 동유럽 국가 등 사회주의 혁명을 이룬 나라들은 일단 공화국의 형태를 취했다. 공화국의 필수 요소인 의회는 없지만, 의회의 역할은 일단 공산당이 대신한다고 치자.

문제는 의회보다 권력구조에 있다. 공화국이라는 외양이 무색하게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예외 없이 1인 집권체제를 채택했다. 뿐만 아니라 그 밑의 권력자들도 일사불란하게 서열로 정리됐다. 1인 집권에 정당도 사실상 공산당 하나뿐이니 무늬만 공화국일 뿐 실은 수직적 권력구조, 즉 옛 제국의 변형이며 부활이다. 그렇다면 일인자는 곧 황제가 된다.

구소련의 레닌-스탈린-흐루시초프-브레주네프,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화궈펑(華國鋒)-덩샤오핑(鄧小平)은 사회주의 일인자의 계보이자 동시에 ‘사회주의 황실’의 계보다. 메이저급만이 아니라 마이너급 사회주의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루마니아의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Gheorghe Gheorghiu-Dej)는 1952년부터 죽을 때까지 집권했고 그의 뒤를 이어 1965년부터 집권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sescu)는 1989년 공산당이 무너질 때까지 권좌에 있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는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1959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50년 동안이나 쿠바의 독보적인 일인자로 남아 있다. 이런 권력구조는 명백히 과거 제국체제로의 퇴행이다.

그래도 최고 권력자가 한 가문에서 세습되지는 않는다는 점이 역사 속 제국체제와 다르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자 한다면 북한 정권이 그 환상을 여지없이 깨버린다. 북한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집권한 김일성이 1994년까지 종신 권력을 누렸고, 그의 아들 김정일이 현재까지 일인자로 군림하고 있으며, 이제 곧 스물여덟 살의 셋째 아들 김정은에게로 권력 승계를 준비하고 있다. 3대의 권력 세습은 어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없었고, 더 나아가 전 세계 공화국의 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권력자의 자질이 유전자로 각인될 리 없다고 보면 그것은 심각한 역사적 퇴행이 아닐 수 없다. 한때 가장 진보한 체제로 간주됐던 사회주의가 그렇듯 권력구조의 퇴행을 보인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러시아는 제국체제였다. 멀리는 16세기 이반 4세가 ‘차르’라는 직함을 사용할 때부터, 가까이는 18세기에 표트르 대제가 정식으로 러시아제국의 명패를 세울 때부터 러시아는 수백 년 동안 제국이었다가 쿠데타 한 방으로 일거에 무너졌다. 또 1949년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기 전까지 중국도 자본주의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상태였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마지막 제국인 청나라가 붕괴한 뒤 수십 년간 군벌들이 할거하는 과도기를 거친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해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운 것이다. 특히 중국의 제국체제는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처음 건설한 것이었으니 그 역사가 무려 2천 년이 넘는다.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이나 쿠바, 북한도 마찬가지다. 전부 다 마르크스가 말한 선진 자본주의는커녕 자본주의 단계조차 아예 거치지 않고, 왕조 시대에서 권력의 장악을 통해 갑자기 인위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한 케이스다. 그 총체적 모순은 결국 20세기 말에 현실 사회주의가 한순간에 몰락하는 참극을 낳았다.

사회주의의 경제적 측면을 강조한 마르크스와 달리 현실 사회주의 혁명은 정치적 메커니즘을 통해 ‘위로부터’ 이루어졌다. 그랬기에 사회주의 국가들은 곧바로 경제 문제에 부딪혔다. 혁명에 성공하자마자 곧바로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해 경제 발전에 주력한 것은 그 때문이다.

1921년부터 전개된 구소련의 신경제정책은 ‘땜빵’으로나마 일시적으로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려는 노력이었고, 1958년 중국 공산당이 세운 인민공사는 개별 자본가들을 탄생시킬 수는 없었기에 고육지책으로 마련한 하나의 거대한 자본가였다. 물론 그 실험들은 결국 다 실패로 돌아갔다.

현실 사회주의에서 1인 집권제가 쉽게 자리 잡은 이유는 사회주의를 위한 경제적 토대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치적으로만 사회주의 혁명을 강행한 탓이다. 게다가 혁명 이전까지 수백 년간 제국체제를 유지해온 역사적 전통 때문에 사회주의 국가의 국민도 1인 집권제를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다.

황제가 지배하던 국가는 사회주의 공화국을 표방해도 역시 황제의 역할을 맡아줄 ‘한 명의 개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는 역사의 중요한 단계가 생략된 결과였다. 역사에는 지름길은 있어도 비약이나 생략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는 사례다.

만약 마르크스가 20세기의 현실 사회주의를 보았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생전에 자신의 이론에서 이탈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보고 스스로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오늘날의 마르크스는 아마 자신의 사회주의 사상이 아직 현실로 구현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할 것이다(특히 제왕적 지배자는 심각한 역사적 퇴행이자 타락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는 아직 진행형일 수도 있다.


일러스트·추덕영
남경태 인문학 저술가 및 번역가 dimeol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