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ra, Jordan
‘영원한 시간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 빛 같은 붉은 도시’ 영국의 시인, 존 버곤 신부는 페트라를 다녀와 이렇게 묘사했다.하늘을 가릴 듯 높은 암석들 사이로 환상과 신비감이 그득한 미로와 같은 계곡을 따라 2km 정도 시크를 지나면 저 멀리 한 줄기 빛이 번져온다. 발걸음을 멈추자 붉은 사암의 거대한 바위의 좁고 깊은 틈 사이로 홀연히 천년 왕국, 붉은 도시가 나타났다.판타지 동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페트라는 요르단(Jordan)의 국보 1호로 고대 도시의 일부였다. 1985년 12월 6일 유네스코(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찬란한 유적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인류의 가슴에 신비감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의 페트라는 성경에 나오는 에돔 왕국과 나바티안 왕국의 수도였고, 그후 로마와 비잔틴 문명이 지나간 흔적이 보이는 곳이다.수많은 인파에 압도당해 겨우 몸을 추스를 즈음, 거대한 석조 궁전이 시야를 가로 막고 선다. 새로운 문명과의 충격적인 조우다. 궁전 아니면 신전으로 생각되는 헬레니즘 양식의 건물 정면은 거대한 암벽을 직접 파서 만든 것이었다. 정면에 있는 거대한 기둥 문으로 들어서자 복도가 나타나고, 이 복도를 따라가면 암벽을 파서 만든 방들이 나타난다. 정교하거나 특별한 기교를 부린 장식은 없으나 그 자체로 장엄하고 웅대하다.이 공간에 서면 신화 속 주인공이 된 느낌이다. 뙤약볕 아래 페트라 요새를 이곳저곳 거닐어 본다. 페트라 시는 대부분의 건물들을 이같이 암벽을 파서 만들었다. 결코 좁지 않은 지역에 펼쳐진 이곳에는 극장과 온수 목욕탕, 원형극장과 상수도 시설까지 갖추어진 도시가 붉은 사암으로 둘러싸여 신화처럼 버티고 있었다.뽀얀 흙먼지 일으키며 달려가는 마차도 신비롭다. 마치 천년 세월을 거슬러 고대 왕국에 들어선 느낌이다. 근위병들도 역사 속에서 실존하는 현실의 인물 같아 생생하다. 천연의 요새로 사방이 절벽인 이 도시는 마치 지하 왕국이 연상될 만큼 신비롭다. 나바티안이라고 불리는 민족에 의해 건설된 페트라는 실크로드의 길목으로 수많은 대상들이 거쳐가는 상업의 요충지로 한때 크게 융성했으나, 대상 무역의 쇠퇴와 함께 폐허가 되어 여러 세기 동안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굽이진 언덕을 돌아 도시를 들어서면 아스라이 보이는 도시의 모습이 중동의 신화처럼 베일에 숨겨져 있다. 회색 빛 도시의 이미지를 간직한 이곳은 붉은 도시의 알몸을 드러낸다. 이 도시에 대한 이야기가 옛 기록에 나오고 있지만 소멸한 많은 도시들이 그렇듯이 페트라 역시 그 위치가 한동안 잊혀졌다. 그러다 1812년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 하르트라는 스위스의 한 젊은 탐험가가 현지인 안내자와 함께 이 신비에 가득찬 유적을 발견한 것이다.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유대 민족을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긴 여행을 하던 중 당시 에돔 왕국의 수도이던 이곳의 통행 허가를 못 받아 멀리 우회하여 느보산으로 갔다고 한다. 이를 말해주듯 이곳에는 ‘무사와디 (모세의 계곡)’라고 불리는 곳과 ‘모세의 샘’이라고 불리는 우물이 여러 곳에 있다.이곳 페트라에는 암벽을 깎아서 만들어 놓은 거대한 암벽 도시의 유적이 고대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으며 주변의 경관은 숨 막힐 듯 장관이다. 이곳의 건축 양식은 초기의 단순하고 투박스러운 나바테안 고유의 건축양식으로 시작해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건축양식을 거쳐 후기의 세련되고 건축미가 넘치는 그리스, 로마식 건축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흐름에 따른변천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1950년대 이루어진 발굴 작업으로 이 지역에 적어도 기원전 7000년경에 문명이 존재했었음이 드러났다. 당시 농경문화를 간직한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부터 에돔이 이 지역을 다스리던 기원전 1200년 사이의 역사적인 정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에돔 왕국은 셀라를 수도로 하고 있었으며, 그 실체는 성경을 통하여 추정해 볼 뿐이다.무엇보다도 페트라는 나바테안들이 남긴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인해 그 명성을 얻었다. 유목 생활을 하던 서부 아라비아에서 이주해 온 부족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의 일이다. 이들은 기원전 580년경 에돔족과 혼합되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서 주후 106년경까지 페트라를 중심으로 거주하면서 이곳을 나바테 문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나바테안들은 왕의 대로를 장악하고 이 지역의 무역과 상권을 주도하였으며, 페트라를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주후 106년 로마에 점령당하기까지 문명의 절정을 이룩했다.페트라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더불어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이며, 영화 ‘인디애나 존스-마지막 성배’의 촬영 장소로 더욱 유명해 진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펼쳐져 있는 천년 왕국의 고대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하고 신비로운 것들이며, 유럽 문명의 근간을 이룬 성서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아스라이 잊혀진 지구상의 변방에 불과한 곳이 되어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준다. 깊은 계곡으로 진입하는 초입의 황량한 광야에는 남루한 베드윈 족들이 염소 떼를 한가히 몰고 있으며, 마치 고대세계에서 영원의 시계가 멈춰 버린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중동의 고원과 척박한 사막지형의 여정은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신의 섭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원초적 나약함을 일깨워 주었다. 그 땅에는 영혼을 어루만져줄 성수인 빗줄기도, 마음을 어루만져줄 초록의 나무와 풀들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사막의 척박함으로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없던 곳,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이유로 인해 신은 이 땅에 존재하고 계신지도 모를 일이다.<사진>1 장미같이 붉은 도시, 페트라를 앵글에 담고 마음에도 담아보자.2 뙤약볕 아래 페트라 요새를 거닐고 있는 관광객들.3 전 세계에서 찾아든 다큐 제작진들.4 7000년 전 나바티안의 에돔 왕국, 거대한 암벽 도시의 유적 페트라.5 아랍어로 협곡이라는 의미를 가진 ‘시크(Siq)’를 돌아보고 있는 관광객들.6 약 25m의 고린도식 석주가 늘어선 ‘보고’.7 로마 원형 극장, 바위산 자체를 깎아서 만들었다. 나바테안들의 우직한 추진력이 발휘된 작품이다. 약 30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너비가 40m에 이른다.8 영화 ‘인디애나 존스, 마지막 성배’의 촬영 장소로 더욱 유명해 진 곳이다. 시크길은 그 자체로 환상적이다. 9 시크길을 진입하고 있는 관광객들. 10 페트라 시크길 진입로 앞에서 경호하는 나바테안 경호원.시크 >> 하늘을 가릴 듯 높은 암벽들 사이로, 미로와 같은 균열 부분이 2km 정도 이어진다. 이 암벽 사이의 좁은 통로를 아랍어로 협곡이라는 뜻의 ‘시크(Siq)’ 라고 부른다. 이 시크를 따라가면서 고대 수로가 벽면을 따라서 이어진다.보고 >> 페트라의 유적 중 대표적인 것으로 ‘보고’ 라고 부르는 건물이 있다. 전면에 6개의 코린트식 석주가 서있는 높이 약 25m의 건물로 기원전 1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 출입구 좌우 벽면에는 그리스의 이시스신을 상징하는 식물이 조각되어 있고, 2층에 장식된 6개의 코린트식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여인 모양의 양각이 새겨져 있다. 건물 정면 제일 윗부분에는 항아리 형태가 조각되어 있는데, 그 속에 나바테안들이 보물을 숨겨 놓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수도원 >> 수도원이라고 부르는 건물은 페트라의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전면의 폭이 50m, 높이가 45m에 이른다. 수도원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 건물 내부 벽면에 십자가 몇 개가 새겨져 있는 데서 유래했다. 나바테안들이 이 건물을 세웠던 원래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내부에 십자가를 새긴 것으로 미루어 서기 4세기 이후 비잔틴 시대에 교회 건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암석 자체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색깔과 기하학적 또는 물결무늬들이 방 전체를 휘감고 있어 어떤 궁중 벽화나 장식보다도 현란하고 황홀하다.바로의 궁전 >> 이집트의 나바테 문명에 대한 영향은 이집트의 건축 양식의 특징인 거대한 탑문에서 볼 수 있다. 페트라의 한복판에 있는 바로의 궁전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곳에 시집온 그의 딸을 위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1927년에 있었던 지진으로 일부가 파괴되었다.로마 원형 극장 >> 바위산 자체를 깎아서 만든 것으로 나바테안들의 기발한 독창성과 우직한 추진력이 마음껏 발휘된 작품이다. 약 3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너비 40m의 로마 원형 극장은 2세기경의 유적으로 33층의 계단식 의자가 모두 바위를 깎아 만든 것이다. 이 극장은 각종 예술 행사나 오락적 행사를 위한 기능보다는 제의적 기능을 갖춘 장소로 추정되며, 왕의 장례식이나 각종 회의 및 종교 의식을 거행한 것으로 여겨진다.글·사진 함길수 자동차 탐험가© 한경매거진&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