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가마 등 전통소재로 상상력을 붓질했지요”

김형근 화백은 한국 미술계에서 ‘파격’이라는 수식어를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는 작가다. 새로운 소재를 바탕으로 창의적인 작가정신을 표현하는 그의 작품들은 화단에 늘 신선한 자극을 불어넣었다. 1996년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도자기전을 열어 도자기 회화라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백자의 순수함에 회화적인 기법을 도입하면 어떨까 생각했던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물론 백자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겠지만 서양화 기법을 도입해 그린다는 것은 당시만 해도 새로운 발상이었죠. 제가 개인전을 연 다음부터 김기창 변종화 화백이 도자기화를 선보이기 시작했습니다.”36점을 가지고 연 첫 도자기화 개인전은 화가 김형근에게 ‘선구자’라는 수식어를 선사했다. 당시 평론계에서는 그의 도자기화 작품에 대해 ‘동서양의 접목’ ‘백자화(畵)의 새로운 탄생’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김형근이라는 이름을 처음 세상에 알린 1970년 국전 대통령상 당선작 ‘과녁’ 역시 마찬가지다. 대범한 구도의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묘사된 이 그림을 통해 그는 당시 사실주의와 인상주의가 주도하는 국전 스타일에 대혁신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도대체 이 같은 창의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는 정규 미술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은 자신의 이력에서 그 답을 찾았다. 누구에게도 사사하지 않고 학맥이나 인맥으로부터 자유로웠기에 단 시일에 국내 대표적인 서양화가로 우뚝 설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유교적 가풍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나 미술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꿈도 못 꿨습니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습니다. 유년기엔 일본 도쿄 소국민신문사가 주최한 어린이그림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6·25전쟁 중 정치대학(건국대 전신) 법학과를 졸업한 그는 학업과 작품 활동, 군 생활을 오갔다. 인고의 세월을 거쳐야만 하나의 보석이 탄생하듯 그에게 시간은 자신만의 미술 세계를 그려나가는 캔버스와 같았다. 그는 지난 1968년 제17회 국전에서 특선, 그 이듬해인 1969년에는 문공부장관상을 한 1970년 제19회 국전에서는 ‘과녁’이라는 작품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김 화백은 전통미와 초현실주의를 결합해 독특한 미술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20대 후반 갑작스럽게 찾아온 질병으로 27시간 동안 사경을 헤맨 후 그는 초현실주의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살바도르 달리로 대표되는 초현실주의 작가의 작품 속에서 그는 정신세계를 탐미하는데 매료됐다. “죽음의 문턱 직전까지 가본 경험을 겪은 뒤부터 제 관심사는 사실주의에서 초현실주의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소재는 우리 민족의 손때가 묻은 꽃가마 토기 백자 의관 등으로 넓어졌습니다.”그의 대표작 ‘연가’에 나온 여인상 역시 김 화백의 꿈꾸는 이상이다. 언뜻 보면 인물화와 같은 인상을 주지만 그는 특정 인물에 대한 묘사보다는 화면의 분위기나 색채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꽃과 여인의 목에 두른 스카프의 대조, 여인의 어깨 뒤로 그려진 배경, 손에 앉아 있는 새와 여인의 대조를 통해 현대미와 토속미를 함께 강조한다.사실주의 타파에서 시작된 초현실주의 신봉자답게 그는 구도, 비례 등 당시 미술계에서 신주단지처럼 떠받들던 것들을 과감하게 탈피했다. 그는 작품 속에서 공간과 거리, 구도 등을 완전히 무시했다. 작가가 나서서 거리나 구도를 설명해 주기보다는 관객 스스로가 거리, 구도를 자유롭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의 그림에는 명암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음·양각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관객의 상상력을 저해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저에게 흰색은 여백이 아니라 하나의 색깔입니다. 동양적인 사고에서 여백은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고리지만 저는 그것을 전체와 조합하는 하나의 색채로 인식하고 싶었습니다.”그래서인지 그는 바탕에도 붓 터치를 해 바탕과 사물과의 대비를 표현한다.지금까지 그는 국내 활동보다는 미국 일본 등 해외 활동에 주력해 왔다. 그의 작가 인생에서 국내에서 개인전을 연 횟수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1971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문화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연 김 화백은 그 해 미국 최고의 화랑 중 하나인 월리(Wally)F 갤러리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 미국에서 활동한 1세대 서양화가로서 그는 지금까지 한국 미술의 세계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그 공로로 미국 뉴저지 시는 매년 4월을 ‘김형근 화가의 달’로 공포하기도 했다.그의 작품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초동 검찰청 본관에 걸린 1만 호(4×17m)짜리 ‘진실, 소망’은 국내 최대의 회화작품이며 여의도동 수출입은행에 걸린 회화작 ‘우리의 사계(2×20m)’와 600개의 도자기를 소재로 만든 ‘영혼의 장(3×5m)’도 그의 대표작이다. 칠순을 훌쩍 넘긴 노화백은 요즘 작품 소재를 한국적인 아름다움에서 세계적인 아름다움으로 바꾸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다양한 작품을 갖고 그는 올 하반기께 국내에서 개인전을 열 생각이다.“작가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 속에서 작품의 소재를 발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젠 전 세계 관객들이 모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소재를 발굴하고 싶습니다. 유리병 꽃병 등이 바로 그런 소재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