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멀리 가을 부소산이 느릿하게 비끼어 있다. 풍경이 한가롭다. 백마강 마을에 아침이 온다. 시린 손 추스르고 등교하는 아이들 웃음이 따뜻하다. 강변 규암 신리 마을에서 부여 읍내로 나가는 버스는 가을걷이 한창인 들판을 가로질러 흙먼지를 뿌리며 벌써 떠나고, 세월만 덜컹덜컹 흘러간다.백제의 고도 부여는 역사 속의 영화만 남긴 채 얼마 안 되는 백제 유적과 유물을 국립부여박물관에 남기고 오늘도 말없이 흐르는 백마강과 부소산 낙화암 자락에 묵묵히 자리하고 있다. 백제 장인의 우수한 미적 감각을 멀리 일본 문화의 뿌리로 전파한 그 기백과 정신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백제가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하여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기까지 123년간, 그 화려한 문화의 꽃은 결국 시들고, 역사의 뒤안길 백마강 구두래 나루터 선창가에는 흘러간 빛바랜 가요만 늦가을의 서정을 달랠 뿐이다.백제는 공주에서 부여로 수도를 옮기고, 부소산 주위로 나성을 돌려 적의 침공에 대비했다. 부소산 남쪽으로 궁궐을 짓고, 궁 밖 평지에 정림사(定林寺)를 세웠다. 그리고 궁남지(宮南池)를 남쪽 너른 들판 가운데 조영하고 철마다 자연의 경관을 즐겼다. 왕들은 죽어서는 능산리 고분군에 묻혔다. 백제 장인의 탁월한 솜씨가 돋보이는 백제금동대향로도 그 곳 능산리에서 출토되었다.정림사지는 부여 읍내 한 가운데 있다. 정림사 터는 1942년 발굴했을 때에 ‘대평팔년정림사대장당초(大平八年定林寺大藏當草)’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돼 비로소 그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 대평8년은 고려 현종 19년인 1028년으로 그때까지 이 절의 이름이 정림사였으며 절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부여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이 정림사지 오층석탑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림사는 백제시대 다른 절처럼 남북 자오선 상에 중문과 탑과 금당(金堂, 대웅전)과 강당이 차례대로 놓인 금당 하나에 탑 하나인 일금당일탑(一金堂一塔)식 가람 배치를 하고 있다. 이에 비해 통일신라시대는 금당 하나에 좌우 대칭의 탑을 두는 것이 보편화됐다. 여기에 중문과 탑 사이에 직사각형의 반듯한 연못을 파서 가운데로 다리를 통해 지나가게 한 것은 백제사찰 조경의 특징이다. 서산 개심사 누각 아래 파놓은 경지(鏡池)라는 연못의 원형이 같은 백제계인 정림사지 연못에서 연유한 것이다.정림사지를 돋보이게 하는 건 바로 절터 가운데 의젓하게 자리한 국보 제 9호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목조탑의 전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돌로 세운 탑인데도 나무로 세운 듯 부드러운 맛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실제로 목조탑으로 건축했던 것처럼 기둥과 모서리에 배흘림 기법이 남아 있고 지붕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이 목조건축에서 보이는 두공처럼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 마무리했다. 특히 지붕 선은 처마를 살짝 들어 상승감을 주어 경쾌하게 마감했고 전체적인 미감이 목조탑에서 보이는 것 같이 부드럽다. 아직도 탑이 해체되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탑이니 복장(腹藏)에 무슨 보물이 들어있는지는 후세에 맡길 따름이다. 백제탑의 이러한 미감은 비단 정림사지 오층석탑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니 백제 금동 목조 미륵반가사유상이나 백제불상과 백제금동대향로 등의 유물에서도 다같이 발견되는 공통적인 미감이다. 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백제사람들에 의해 목탑이 석탑으로 변형된 것임을 알게 된 것은 초창기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 1905~44)의 연구에 의해서다. 그는 우리나라에만 독특한 축조물인 석탑들을 그 생김새의 변천에 따라 연대별로 추적했다. 그 결과 백제계는 목탑에서 석탑으로, 신라에서는 전탑에서 석탑으로 완성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마침내 그 두 계보가 통일신라에 이르러서 감은사지 쌍 탑과 같은 미감으로 완성됐음을 밝혀냈다. 정림사 탑은 높이가 8.33m나 되어 결코 작지 않은 탑인데도 멀리에서 보면 그리 육중한 느낌을 주지 않기 때문에 크다는 인상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탑에 다가갈수록 장중하고 위엄 있는 깊이가 느껴진다.궁남지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연못 가운데 최초의 인공 정원이다. ‘삼국사기’무왕 35년(634)조의 “3월에 궁 남쪽에 못을 파 20여 리 떨어진 먼 곳에서 물을 끌어 들이고, 못 언덕에는 수양버들을 심고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杖仙山)을 모방하였다.”는 글은 바로 이 궁남지를 두고 한 말이다. 전체적으로 둥근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이 있고 못가에는 버드나무가 한가롭게 가지를 휘 늘이고 있다. 연못 동쪽에서 주춧돌이 발견되고 기와조각이 흩어져 나온 점에 비추어 이 궁남지가 궁성의 이궁에 따르는 원지(苑池)였던 것으로 추측되며 주춧돌이 별궁건물의 흔적이 아닌가 여겨진다. 근처에는 3단으로 짜 올린 팔각형 우물도 있다. 또 무왕 39년(638)조에 “3월에 왕은 비빈과 더불어 큰 연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 궁남지에서 뱃놀이도 즐겼던 듯하다. 계획적인 인공연못인 이 궁남지는 물을 능산리 동쪽의 산골짜기에서 끌어왔다.부소산성 서쪽으로는 백마강이 유유히 흐른다. 공주 공산성에서 바라보는 곰나루 금강의 풍경이 굳세고 씩씩하다면, 부소산 낙화암에서 바라보는 백마강은 쓸쓸하기만 하다. 역사가 스러진 아픔이 배어서일까. 오늘도 구드래 나루터에는 백제 역사의 아픔만큼이나 애절한 백마강 뱃노래가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나온다. 원래 이 나루터는 부여에서 청양으로 통하던 나루였다. 지금은 규암으로 도로가 나고 다리가 놓이면서 구드래 나루는 역사의 흔적 속으로 묻혀졌다. ‘구드래’라는 말은 ‘구들돌’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하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러 가다 사비수 언덕 바위에 올라 부처님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한다. 또한 백제를 오가는 일본의 배들이 구드래 나루터를 통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 들어 왔는데, 일본에서 백제를 부를 때 ‘구다라’라고 부른 것은 ‘구드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어의 ‘구다라‘는 큰 나라(大國), 곧 섬기는 나라라는 뜻이면서 동시에 백제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일본의 고도 나라(奈良) 호류지(法隆寺)에는 일본국보 백제 관세음보살입상이 있는데 그 앞에 ‘구다라관음상’이라고 쓰여 있다.백제탑(정림사지탑)의 저녁 노을, 수북정에서 바라보는 봄날 백마강가 아지랑이, 고란사의 은은한 풍경소리, 노을 진 부소산에 간간이 내리는 부슬비, 낙화암에서 애달프게 우는 소쩍새, 백마강에 고요히 잠긴 달빛, 구룡평야에 내려앉은 기러기떼, 규암나루에 들어오는 돛단배…. 선인들이 꼽은 부여팔경이다. 이중 정림사지 노을과 규암 수북정에서 내려다보는 봄날풍경 빼고는 모두 부소산에서 볼 수 있으니 부소산이야말로 부여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어쩌면 통일신라의 고도 경주의 남산과 비견할 만하다. 남산 곳곳의 불상과 탑 그리고 유적이 신라의 보고라면, 부소산의 유적이야말로 전설로만 남아있는 쓸쓸함 그 자체이다. 부소산은 부여의 진산으로 해발 100m 정도 남짓한 작은 산이다. 백마강은 부소산을 동쪽으로 끼고 돌아 남쪽에 너른 뜰을 이루고 다시 동쪽으로 굽어 흘러 강경을 거쳐 서해바다로 흘러간다. 북으로 강을 두르고 바로 산으로 막아선 형상이 북쪽으로부터 내려오는 고구려 군사를 방비하기에 알맞게 되어있는 점에서 공주의 공산성과 흡사하다. 그래서 백제의 초기 도읍지로 추정되는 경기도 하남 위례성터와 함께 백제식 도성방식을 보여준다. 이 부소산에는 왕궁과 시가를 방비하는 최후의 보루였던 백제의 부소산성이 있다. 산성이 완성된 것은 성왕이 538년 수도를 사비로 옮기던 무렵으로 보이나 그보다 앞서 선왕인 동성왕이 500년경에 산봉우리에 산성을 쌓았다. 부소산 안에 백제군대의 곡식창고라 할 수 있는 군창터가 발굴되었는데 검게 탄 쌀과 보리 콩 등의 곡식이 발견됐다. 이는 나당연합군이 쳐 들어오자 백제군이 군량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불을 질렀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자루 아래, 백마강을 시원하게 볼 수 있는 육모지붕의 백화정(百花亭)이 있다.가을비가 내렸다. 저녁 어스름이 내릴 무렵, 구드래 나루터 마지막 유람선에 몸을 실었다. 유람선에 오르자마자 늙은 뱃사공은 익숙한 듯 카세트테이프를 튼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중년 여인의 낡은 목소리에 흘러간 가요는 그야말로 애달프다. 세월이 흘러간 옛 노래에 몸을 맡기고 나도 잠잠히 마음을 가다듬는다. 낙화암, 그야말로 강가 언덕 큰 바위 덩어리에 불과한 절벽에 붉은 글씨로 낙화암이라 새겨 있다. 이곳에서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니 감회가 새롭다. 아니 이젠 그 감각조차 못 느낀다. 배가 낙화암 아래를 지나 부소산 기슭 선착장에 도착하니 고란사의 저녁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 서둘러 부소산에 올랐다. 백화정, 이름으로 치자면 백가지 꽃이지만, 낙화암에서 강물에 몸을 던진 궁녀를 생각하면, 백화는 곧 궁녀를 지칭하는 것이다. 정자에 올라 넓게 펼쳐진 강 풍경에 시원함을 느끼다가도 금방 그 옛날 백제 성세의 부여를 생각해본다. 아득하다. 백마강 물새의 쉰 노래는 계속 흘러나오고, 저녁 어둠은 내리고 마음은 점점 고요해 간다. 수학여행의 하루 일정을 마감하는 듯 늦게 부소산에 오른 초등학생들이 선생님으로부터 백제 역사를 듣는다. 학생들이 얼마나 이해하고 의미를 되새길까. 설명이 끝나자 학생들은 백화정에는 오르지 않고 그 바위 아래 공터에서 백마강을 건너다보고는 휑하니 빠져 나간다. 역사도 그렇게 흘러가 버렸을 것이다.늦가을, 투명한 햇살 속에서 나는 보았다. 백제의 아름다움을. 이 땅에 뿌리내리고 대를 이어 살아온 촌부의 그 순박한 모습에서 백제의 순한 아름다움이 토장처럼 젖어 있었다. 가을 남은 햇살이 낮은 바람에 흩어지고, 부여 군청 앞 버스 정류장에 저녁이 오자 읍내버스는 서산 마애삼존불 얼굴 같은 사람들을 하나 둘씩 태우고 은산 규암 합정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텅 빈 정류장 가로등 불빛만 내리고 거리는 다시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