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이 가볍다. 하늘이 높다. 아침 창문을 여니 한기가 스친다. 보름 지난 달이 푸른 밤하늘에 처연하다. 며칠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더니 도시가 온통 가을이다.‘… 낡은 단청 밖으론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내 며칠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와서 … 절 뒷 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낙엽 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며 그리고 방금 켜지기 시작하는 등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황동규 시인의 시 ‘시월’이 마음 속 저편으로 물들고, 종묘(宗廟) 앞 뜨락에 싸락눈 내리는 날 기약하며 조선오백년 유교 역사의 정점, 종묘를 찾았다.서울은 아름답다. 인구 1000만이 넘는 이 거대한 도시에 북악(北岳)과 한수(漢水), 명산과 명수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 눈 들면 산이요. 길 나서면 계곡이라. 조선은 개국하자마자 북한산을 조산으로 터를 잡아 인왕산과 낙산을 좌우로 벌려놓고, 오른쪽에 사직을, 왼쪽에 종묘를 세우고 북악산 아래 경복궁을 비롯해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 덕수궁 등 5대 궁궐을 지었다. 남산을 안산으로 두고 청계천(이름도 좋다. 淸溪…. 소리 내어 불러보아도 맑은 물 옥구슬 굴러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맑은 물길을 따라 도성을 쌓았다. 광화문 너른 길 남쪽으로 터진 세종로 거리를 바라보면 남산이 도시를 따뜻하게 감싼다. 여름 비온 뒤 노량진 한강나루에서 바라보는 북한산은 한 폭의 산수화다. 자하문 건너 부암동 골짜기 백석동천 세검정 계곡의 수려함에 조선 선비들 발길이 잦았고, 문인 사대부들의 별장이 즐비하게 들어서기도 했다. 우이동 인수봉 자락엔 골짜기마다 명찰들이 자리하고 여름철 도성 피서의 명소이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랴. 한강 광진을 따라 내려오면 오리와 갈매기 물새들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압구정 정자의 멋스러움에 눈길을 빼앗기고, 노량나루는 충청 전라도를 오가는 나그네 도선으로 바빴다. 마포나루 새우젓국 비린내로 시끌벅적한 시장 풍경이나, 한강 하류 양천에서 초여름 한강을 거슬러오는 웅어를 잡아 올리는 겸재의 그림은 사람 사는 세상사 풍정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그런 서울에서 우리는 오늘도 즐겁고, 바쁘고 치열하게 살고 있다.서울 종로구 훈정동에 있는 종묘는 조선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왕 및 왕비, 조선시대 공신들의 신주와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그 중심건물은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이며, 기타 부속 건물로 구성돼 있다. 종묘를 도성에 배치한 원칙은 중국 주나라의 도성 제도에 근거하고 있다. ‘주례(周禮)’에 ‘종묘는 도성 내 왼쪽인 동쪽, 사직은 오른쪽인 서쪽에 둔다(좌묘우사).’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조선은 정궁인 경복궁의 왼쪽 즉, 동쪽에 자리하고 그 반대 방향 서쪽에 사직단을 배치했다.종묘는 태조 3년(1894) 12월에 착공, 다음해 9월에 완공하고 개성에서 추존 4대의 신주를 옮겨 모셨다. 완공 당시에는 정전과 공신당 등 비교적 작은 규모였다. 완공 이후 태조는 종묘 남쪽에 인공으로 산을 만들어 허한 곳을 보완했다. 이후 태종은 종묘 남쪽의 가산(假山)을 더욱 높여 터의 지기를 안온하게 하였으며, 정전의 동서 행랑을 짓고 공신당을 정전 담장 안 동쪽 계단 아래로 옮기는 등 종묘의 전체적인 기틀을 다졌다. 종묘 역시 임진란으로 소실되고, 광해군 즉위년(1608)에 중건했다. 그 후 몇 차례 개수와 증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종묘의 건물들은 제례용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전체적으로 좌우대칭으로 배치의 축을 통일한 구성을 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 지세에 순응하며 어울리게 적절하게 배치해 각 영역을 이루는 건물별로 개별적인 축을 따라 구성했다. 담으로 둘러싸인 종묘 정문을 들어서면 정전에 이르는 주도로가 북쪽을 향하여 철자형(凸字形)의 거친 박석으로 길게 깔려 있다. 가운데의 약간 높은 길은 신향로(神香路)고, 이를 중심으로 동쪽은 어로(御路), 서쪽은 세자로(世子路)다. 신향로는 정전 신문을 통해 묘정 월대로 난 신로에 이어지고, 어로와 세자로는 어숙실 일관에 닿는다. 어숙실은 재궁 또는 어재실이라고도 하는데, 왕이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정제하며 세자와 함께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이다. 원래 이곳에는 중앙의 뜰을 중심으로 북쪽에 어재실, 동쪽에 세자재실, 서쪽에 어목욕청이 있었다. 어숙실 서북쪽에 위치한 정전 일곽은 네모나게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묘정을 중심으로 남쪽 담 중앙에는 신문이, 동쪽에는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이, 그리고 서쪽에는 악공과 종사원이 출입하는 서문이 있다. 신문을 들어서면 동서 109m, 남북 69m의 넓은 월대가 펼쳐진다. 이곳은 제관들이 제사를 드릴 때 의식을 행하며 대기하는 공간으로, 그리고 종묘제례악을 연주하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월대의 중앙에는 신로가 상월대 아래까지 나있다. 월대는 그 끝을 장대석으로 쌓아 두르고, 그 윗면에 박석을 깔았는데, 곳곳에 차일 고리가 박혀 있다.종묘 정전과 영녕전은 묘당 건축의 특징에 따라 전면에 툇간을 만들고, 나머지 세 면은 벽체로 감싸 내부 공간을 어둡게 함으로써 신성함을 높이고 있다. 툇간 앞쪽은 벽체 없이 기둥으로만 구성되어 묘정으로 트여 있고, 뒤쪽은 벽체에 난 문을 통해 신위를 모신 건물 내부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문은 각 칸마다 두 짝씩 달려 있는데, 그 맞춤이 정연하지 않고 약간 뒤틀려 아래 위가 벌어져 있다. 마치 혼이 드나드는 통로로 처리한 듯한 생각이 들게 한다. 내부는 벽체로 칸막이를 하여 나누지 않고 전체가 하나의 공간으로 돼 있으며, 뒤 벽쪽에 있는 감실만 칸으로 나누어 신주를 모셨다.종묘는 조선시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것 중 하나다. 몇 차례의 증축을 거쳐 독특하고 고유한 격식과 공간을 갖게 된 종묘는 간결한 형태이면서도 어딘가 힘이 있고, 한눈에 모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길게 들어선 건축이면서도 거기에 감도는 정밀하고 신성한 분위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정전의 동·서 월랑이나 신로 등에 응용된 이러한 배치 기법은 한없이 고요한 종묘 공간에 동적인 기운이 감돌게 한다. 또 단청도 삼갈 만큼 단순하고 절제된 건축 구성은 종묘를 자체 완결적이고 기품 있는 건축물로 완성할 뿐만 아니라 마치 일상적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여 죽은 자와 산 자가 한데 어울리는 영적인 교류를 가능케 하는 듯하다. 이 모두는 조선 왕조의 개국과 함께 이상적 사회 건설을 위해 펼쳤던 성리학적 이념과 질서를 종묘 건축에 투영시키려고 노력한 결과다. 이 신성한 공간에선 지금도 매년 한 번씩 종묘제례가 펼쳐진다. 웅장한 음향효과에 도도한 기상을 담아 종묘제례 절차에 높은 권위와 격조를 부여하는 종묘제례악,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동작으로 음악과 완벽한 일치를 이루어내는 일무(佾舞)는 조선 왕조 500년의 빛나는 이상과 높은 예술정신을 표현한다.기본적으로 종묘는 한국 건축의 일반적 특성인 비대칭적 대칭 배치를 따르고 있다. 각 영역 내의 건물은 전체로 볼 때 대칭에 바탕을 둔 배치를 하고 있으나 개별적으로 볼 때 대칭을 벗어난 구성을 하고 있다. 한 예로, 정전의 동·서 월랑은 전체적으로 남북축을 중심으로 대치를 이루는 배치를 하고 있으나, 세부 처리는 그렇지 않다. 동월랑은 트여 있는 반면 서월랑은 벽으로 막혀 있어 대칭 속 에서 비대칭을 읽게 한다. 또한 종묘는 대칭적인 배치 속에서도 변화를 담고 있다. 정전 신로는 남문인 신문에서 시작하여 묘정 하월대 계단에 닿아 있는데, 중심축으로부터 약간 벗어나 있다. 이는 대칭인 듯하면서 정확한 대칭이 아니게 처리하여 신로의 흐름에 변화를 준 것이다. 정을 통해 동을 느끼게 하는 이러한 배치 기법은 대칭적인 월대와 기단, 그리고 지분에 동적인 기운이 감돌게 한다.종묘는 제례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화려하지 않다. 따라서 종묘의 모든 건축은 지극히 단순하고 절제돼 있다. 묘정 월대와 기단 위의 건물은 신로를 표시하는 선과 몇 개의 판위, 그리고 장식이 배제된 건축구조 등 과감히 생략된 조형과 단순한 구성으로 종묘에 구현해야 할 건축 의도를 철저하게 성취하고, 단청 또한 극도로 절제됐다. 신로 월대 기단 담 등 꼭 있어야 할 것만 두고 필요한 공간만 담은 구성 구조 장식 색채의 간결함은 종묘 건축을 상징적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특히 땅 끝까지 펼쳐지는 듯한 월대는 안정을, 무한히 반복되는 듯한 기둥의 배열은 연년세세 끊이지 않을 왕위의 영속을, 중력을 거부하며 수평으로 하늘 끝까지 펼쳐지는 듯한 지붕은 무한을 연상케 한다. 종묘 건축에 나타난 단순하고 절제된 건축 구성은 종묘를 자체 완결적이고 기품 있는 건축으로 만들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 깊은 곳에 감춰진 상징적 의미까지 읽게 한다. 그것은 마치 일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여 죽은 자와 산 자가 한데 어울리는 영적인 교류를 가능케 하는 듯하다. 그것은 종묘에 항상 감도는 신성한 기운의 원천이다. 이 모두는 조선 왕조의 개국과 함께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펼친 성리학적 이념과 질서를 종묘 건축에 투영시키려고 노력한 결과다.현재 종묘는 사적 제125호, 정전은 국보 제227호, 영녕전은 보물 제821호, 종묘제례악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돼 있다. 이러한 문화유산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종묘는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종묘 정전 텅 빈 월대에 어스름 저녁이 내린다. 하나 둘 도시의 가로등 불빛이 켜지고, 멀리 N서울타워에도 불이 밝혀진다. 또 하루가 저물고 밤이 온다. 조선 오백년 세월이 한 페이지의 역사로 지나고, 앞으로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그 숱한 사람과 사건이 모두 역사 속에 사라지고, 세월이 더 흐르고, 더 더 흘러 앞으로 수천 수만년 쯤 지나면 오늘의 역사는 점으로라도 찍힐까. 하늘을 본다. 달이 밝으니 별빛이 드물다. 황동규의 시 ‘시월’을 나직하게 외워본다.‘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바람은 조금도 불지를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 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 갔다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