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를 찾아서 - 창덕궁 연경당

루한 장마가 지나면 삼복더위가 시작된다. 에어컨 바람도 한 두 시간이지 종일 맞고 앉아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던 일 덜컥 놓을 수도 없다. 가족과 함께 시원한 계곡에 발 담그고 수박이라도 먹으며 탁족(濯足)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눈먼 물고기 몇 마리 계류 바위틈에 놓아둔 어항에 들어오면 어죽이라도 끓여 시원한 소주 한 모금에 여름을 날려버린다 생각만 해도 참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서울이 불볕 더위로 달구어지고 도시가 서서히 여름의 한가운데로 치달린다. 선풍기 바람을 쐬어가며 책이라도 뒤적여 보지만 도무지 마음이 잡히지 않는다. 이럴 땐 소나기라도 한 줄기 내리고 매미라도 시원히 울어준다면 더위가 가실 텐데 날은 덥기만 하다. 종로3가 돈화문을 지나 창덕궁 후원인 부용지 아름다운 연못 언덕에 자리 잡은 규장각에 오르니 더위가 한결 가신다. 바람이 시원하다. 짙푸른 여름을 배경으로 새소리 매미소리 오케스트라 공연이 한창이다. 하루 해가 넘도록 마음 놓고 즐기다 연경당 사랑채로 자리를 옮긴다. 단정한 문갑 위에 놓인 복숭아형 진사연적과 해태형 청화백자 필통의 정갈함에 눈길이 머물다 사방탁자 위 분원 금사리 백자 대접에 올린 노란 참외를 바라보는 그 즐거움을 상상으로 그려본다. 구중궁궐 호사와 권위로 가득했던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절제된 풍모와 궁가의 사치스러운 기교가 동시에 보이는 연경당이야말로 조선 후기 건축의 백미다. 연경당은 순조 28년(1828) 조선시대 오대 궁궐의 하나인 창덕궁 후원에 사대부가의 풍모로 지어진 120칸 건물이다. 본래 창덕궁은 창경궁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이궁(離宮)이었으나, 정궁(正宮)이었던 경복궁이 임진왜란으로 불탄 이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고종 때에 이르러서야 중건됐기 때문에, 273년간 이궁이면서도 실제적으로 정궁의 자리를 지켜왔던 궁궐이다. 이처럼 임진왜란 이후 정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이들 궁궐의 후원 안에 지어진 연경당은 순조를 대신해 섭정의 자리에 있던 조대비가 왕세자의 명에 의해 건립하게 된 만큼, 필연적으로 당시 가장 빼어난 건축술로 지어졌다. 이는 곧 최고의 경지에 있던 도목수(都木手)와 동산바치(원예사)가 건축을 하고 뜰을 조성했다는 말이다. 연경당이 완성되자 조대비는 연경당의 아름다움에 칭찬을 아끼지 않고 건축을 담당한 도편수와 목수들에게 상을 내리고 말도 하사했다. 19세기 후반 왕궁 건물은 민가 양식으로 짓는 게 유행이었다. 그 좋은 사례가 창덕궁 낙선재다. 낙선재는 연경당과 마찬가지로 단청을 하지 않았지만 민가에서는 쓰지 못하는 장대석과 괴석 그리고 사고석 담장 같은 건축법으로 지었다.연경당은 계좌정향(癸坐丁向) 남향집으로 동사택(東四宅)이다. 연경당은 창덕궁 후원 골짜기의 안쪽에 넓은 터를 잡아 남쪽에서 북쪽으로 들어가면서 대문간행랑채 중문간행랑채를 차례로 세우고, 그 안쪽에 사랑채인 연경당과 안채를 연속된 하나의 몸채로 세웠다. 다음 사랑채의 동쪽에 독서당인 선향재(善香齋)와 정자인 농수정(濃繡亭)을 짓고, 안채의 서쪽에는 아래채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고 동서로는 중문간행랑채와 ㄱ자형으로 연이어져 있다. 안채 뒤 북쪽 담에 문을 내어 부엌을 만들어 음식을 장만하고 빨래와 바느질을 하는 허드렛일 공간의 반빗간(飯婢間)이 자리 잡고 있다. 연경당 건물 뒤편 숲으로 이어진 능선을 넘어가면 그곳이 창덕궁 후원의 백미 옥류천으로 곧바로 연결된다. 연경당 풍경은 시원하면서도 위엄으로 가득하다. 바깥행랑채 앞뜰에 서 있는 큰 느티나무에 여름철 매미들이 몰려와 구성지게 울어 대면, 매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무더운 여름철을 보냈을 것이다. 그 매미 울음소리가 바깥행랑채와 중문간행랑채를 지나 연경당 사랑채와 안채의 내부공간에까지 도달하게 되어, 인공적인 공간들이 자연의 소리로 충만하다. 장락문 현판이 걸린 솟을대문에 들어가려면 작은 실개천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 돌다리는 장대석을 시내 위에 가로질러 놓아 전체적으로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은 장방형을 이루며, 남쪽 끝과 북쪽 끝의 동쪽과 서쪽에는 직육면체의 기둥을 각각 하나씩, 모두 네 개를 세웠다. 이 실개천이 풍수에서 일컫는 명당수(明堂水)다. 양택(陽宅)에서 물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길지로 삼았다. 이러한 서출동류(西出東流)는 연경당에서 그대로 적용되니, 연경당 서편 동산 언덕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를 서쪽 끝 행랑채 마당 아래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일부러 틀어 연경당 앞으로 돌린 것이다. 이러한 명당수 개념은 궁궐 사찰 서원 민가에 두루 적용되었다. 경복궁 근정전 앞에 금천(禁川)이 흐르고 여기에 영제교(永濟橋)가 서 있고 창덕궁에는 금천교(錦川橋), 창경궁에는 옥천교(玉川橋)가 있다. 안강 옥산서원 외삼문 안에 작은 실개천을 계곡에서부터 끌어들여 서원을 출입하는 유생들이 반드시 건너게 한 것과 같은 이치다. 이 물줄기는 연경당 솟을대문 앞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흘러 애련지로 합수된다. 실개천의 호안(護岸)은 장대석을 쌓아 그 격을 높였는데 때로는 직선으로, 때로는 곡선으로 마감하여 자연스러운 물 흐름을 배려했다. 연경당 바깥 행랑 마당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 괴석을 심은 석함(石函)이 놓여 있다. 괴석은 일부러 돌을 기이하게 만들거나, 구멍이 숭숭 뚫어지거나 바짝 마른 진기한 자연석을 말하는데, 이것을 조경의 한 요소로 삼은 것은 중국의 궁중원림조경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괴석은 모두 중국에서 가져온 일종의 사치 풍류로 연경당 사랑채 안마당 샛담 아래 여럿 놓인 것 말고도 창덕궁 희정당 후원과 경복궁 교태전 후원 그리고 덕수궁 창경궁 등의 후원과 정자 주변에 두루 놓여 있다. 연경당 대문 앞 괴석을 심은 석분사면에는 꽃문양 장식을 하고 그 윗면 네 귀퉁이에 개구리 한 마리씩 돋을새김을 해 놓았다. 이중 세 마리는 안으로 기어들어가고 한 마리는 밖으로 기어 나오게 하여 정적 공간을 동적 공간으로 생동감 있게 만든다. 연경당 입구 동쪽 석함은 대석 위에 괴석을 얹어 놓은 것으로 그 전체적인 모습이 현대의 추상 조각을 보는 듯하다. 그 옆의 팔각 석주는 측우기의 밑면을 올려놓고 고정하는 대석이다. 이들 석물들이 있는 곳에도 큰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겨울 오후 석물 그림자가 연경당 바깥행랑채의 나무 판장벽에 드리워져 처마의 그림자와 쓸쓸한 풍경을 자아낸다.연경당 대문인 장락문(長樂門)은 솟을대문이다. 솟을대문은 종2품 이상 관료가 초헌( 軒)이라 부르는 외바퀴 수레나 사인교(四人轎)를 탄 채 대문을 드나들기 위해 대문의 지붕을 주변의 행랑채보다 한층 높일 수밖에 없었고 문지방 중앙에 홈을 파서 외바퀴가 지나가도록 했다. 이런 이유로 솟을대문은 지체 높은 양반집의 상징이었다. 장락문을 들어서면 바깥행랑채와 중문간행랑채로 둘러싸인 행랑 마당은 장방형으로 사랑 마당과 안마당으로 통하는 중문이 나 있다. 조선시대는 남녀 반상(班常)의 구분이 철저한 유교 신분 사회다. 따라서 남자들은 솟을대문인 장양문(長陽門)을 통해 사랑채인 연경당으로 드나들었고, 여자들은 평대문인 수인문(脩仁門)으로 출입하였다. 장양문을 들어서자 가운데 안채와 사랑채를 구획하는 샛담을 두고 선향재와 농수정을 배경으로 한눈에 연경당 사랑채가 당당하면서도 화려하게 자리 잡고 있다. 연경당은 사랑채의 이름인데 이 집 전체를 통칭하는 이름으로 쓰인다. 연경당은 정면 여섯 칸 측면 두 칸 뒷면 두 칸으로 ㄴ자 평면을 이루는 홑처마 팔작지붕의 굴도리 기와집이다. 정면 6칸 중 동쪽 한 칸은 누마루로 구성하고 가운데 네 칸 중 두 칸은 사랑방 온돌이고 두 칸은 대청 서쪽 첫 칸은 누다락이다. 사랑방은 사대부가 집 주인의 일상 거처다. 대궐에서 퇴궐하면 이 방에서 독서하거나 한가하게 쉬기도 하고, 손님이 찾아오면 맞이하여 문객(門客)들과 정담을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사랑방 가구는 사대부들의 학문과 식견에 밀접한 연관이 있어 서안이나 문갑 서탁 가께수리 등을 비롯한 연적 필통 벼루 붓걸이 등의 문방구류에 높은 심미안을 담아냈다. 이러한 사랑방 가구나 문구류의 특징은 장식이 배제된 절제미와 완벽에 가까운 비례미 그리고 작지만 단아한 맛 등이다. 사랑방 북쪽으로 두 칸의 침방이 있어, 사대부가에서는 사랑채의 주인대감이 내당에서 부인과 합방(合房)할 때를 제외한 평상시에 취침하는 곳이다. 이처럼 사랑채에 침방을 만들게 된 것은 조선시대 내외법(內外法)으로 태종 때부터 ‘부부의 별침’을 명했기 때문이다. 연경당에서 이 침방은 안채와 한 칸의 마루를 사이에 두고 연이어져 있다. 연경당은 그야말로 사대부의 풍치를 한껏 보여주는 아름다운 주련과 창호 그리고 궁가의 품격인 장대석 기단과 괴석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집이다.사랑채 침방과 연이어진 안채는 모두 열 칸 홑처마 팔작집으로 도리는 사랑채의 굴도리와는 다르게 격을 한단 낮춘 납도리집이다. ㄱ자 평면의 돌출된 한 칸의 상부는 누다락이고 그 북쪽으로 두 칸의 안방이 있다. 안방의 동쪽으로 두 칸 대청이 자리 잡고, 그 건너 두 칸의 건넌방과 한 칸의 마루방이 사랑채의 침방과 연이어져 있다. 그리고 대청과 건넌방의 전면인 남측에 개방된 툇마루가 붙어 있고 북쪽 면에도 반 칸 폭이 안 되는 좁은 툇마루가 붙어 있다. 안방은 안주인의 거처이고 누다락은 안주인의 여름철 거처다. 누다락 아래는 안방에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는 함실아궁이다. 일반 사대부 집에서는 이곳이 보통 부엌인데 연경당 같은 궁가에서는 부엌을 반빗간으로 따로 지어 분리했다. 안채 기둥에도 멋진 주련이 정갈하게 걸려 있고, 안마당 담장 곁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회화나무 정심수(淨心樹)를 심었다. 그 나무 밑둥치에는 흔히 ‘나무시집보내기’라고 하는 우람한 괴석을 박아놓았다. 그 곁에는 화초분과 해시계를 받쳐 놓는 석물이 자리하고 있다.사랑채 동쪽의 선향재는 책을 보관하고 독서하는 서재다. 중앙에 큰 대청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었다. 서향의 햇빛을 가리려고 맞배지붕을 덮어 차양을 만들었다. 향재 뒤쪽 언덕에 화초를 심은 화계(花階)가 있고 동산에 농수정 정자가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선향재에서 독서를 하다가 뒷문을 통하거나 정자 앞 계단을 올라 농수정에 않으면 연경당 일곽이 시원히 바라보이고 멀리 후원의 풍경에 마음이 사뭇 고요해진다. 여름이 한창이다. 창덕궁 후원 애련지에 꽃 핀 수련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이 골짝 저 수풀 사이로 날아다니는 꾀꼬리 한 쌍이 부지런히 새끼들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 산새들이 화답하고 연못 아래 잉어들이 여유롭다. 조선 역대 임금들이 정사의 고단함을 이곳 후원에서 자연과 함께 풀어내고 우주의 섭리를 궁구했으니 창덕궁은 하나의 작은 우주다. 연경당에 머무르던 순조의 왕세자인 익종은 순조 9년에 태어나 순조 27년 왕명으로 대리 청정하다가 연경당을 완성한 순조 28년에서 겨우 2년을 더 살다가 순조 30년(1830) 스물두 해의 생을 마감했다. 익종이 연경당에 머무르다 간 세상은 겨우 2년, 짧은 생애의 어둡고 무거운 마음을 후원에 나가 산보와 소요로 달랬으리라. 돌이켜 생각해보면 궁가나 민가나,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사 고민 없는 사람 없고 어려움 없는 삶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모든 어려움을 뒤로하고 역사는 이어가고 삶은 대를 이어오며, 내일은 또 그렇게 다가올 것이다. 지난날의 역사를 거울삼아 오늘을 열심히 살 뿐이다. 추사의 편액 글씨 경서(經書)로 날줄로 삼고 역사로 씨줄을 삼는 것이 학문의 근본이라는 ‘경경위사(經經緯史)’의 깊은 뜻을 새삼 새겨본다. 매미 소리에 또 긴 여름해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