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부자는 드물다. 물론 남편의 부를 이어받은 부자는 더러 있지만 동서양을 통틀어 자수성가한 여성 부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여성의 사회 참여가 허용된 것이 지극히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 화식열전에 따르면‘파(巴)의 청(淸)이라는 과부는 단사(丹砂)가 나오는 굴을 발견해 여러 대에 걸쳐서 그 이익을 독점했기 때문에, 그 자산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녀는 과부이기는 했으나 가업을 잘 지키고 재력으로 스스로를 지키며 사람들로부터 침범당하지 않았다. 진시황제는 청을 정녀(貞女)로 인정해 손님으로 대우하며, 그녀를 위해 여회청대(女懷淸臺)를 지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녀는 기부를 많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돈 없어 공부 못하는 젊은이를 위해 써 달라”는 말 한마디만을 남기고 평생 김밥 행상을 하며 번 돈으로 조금씩 땅을 사둔 것이 큰 재산이 되자 외아들에게 상속하지 않고 전 재산을 충남대에 장학금으로 내 놓은(1990년)‘김밥 할머니(이복순·법명 정심화)’의 감동을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여성 부자로 첫손에 꼽을 수 있는 인물은 단연 최송설당 여사다. 최송설당(1855~1939)은 1885년 경북 금릉에서 아버지 최창환과 어머니 경주 정씨 사이에서 무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나 1939년 84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본관은 화순(和順)이고 대대로 평안도 선천에서 세거하였는데 그의 증조부 대에 홍경래의 난을 만나 외가 쪽이 연루돼 증조부와 조부가 억울하게 죽고 아버지가 전라도 고부로 피해 전전하다가 김천으로 옮겨와 정착했다. 최송설당은 그야말로 자수성가의 모범이다. 최송설당의 회고 기사를 보면 얼마나 어렵게 돈을 모았는가를 알 수 있다. “본가가 본래 몹시 빈한해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어머니는 바느질품을 팔아 근근이 살다가 바느질삯으로 받은 엽전으로 2냥 반짜리 밭을 한 뙈기 얻었지요. 그래서 그것을 자본삼아 가지고 농사를 시작했더니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밭 한 뙈기가 논 한 마지기가 되고 논 한 마지기가 닷 마지기 열 마지기 이렇게 늘어 갑디다.… 나도 참 고생 많이 했소. 환갑을 지날 때까지도 젓가락을 들고 앉으면 집어먹을 것이 없었답니다.…” 최송설당이 어떤 과정을 거쳐 궁으로 들어가 고종의 보모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여러 기록으로 유추해 보면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고 부를 어느 정도 이루어 지방에서는 제법 알려진 부자였을 때 어려웠던 엄비를 만난 것으로 짐작된다. 엄비는 명성황후가 살아 있을 당시 상궁 노릇을 하다가 고종의 눈에 들에 잠깐 모셨는데, 명성황후에게 미움을 사 궁에서 쫓겨나 경상도 동래까지 숨어 다니며 지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죽고(1886) 이어 남편과도 사별하자 불교에 귀의했다고 하며, 이때쯤 최송설당이 엄비와 만났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1895) 후 1896년 엄비를 따라 상경해 궁에 들어가 고종의 보모가 됐고, 영친왕을 낳고 힘을 얻은 엄비의 도움으로 자기 조상의 누명을 벗기고, 조카들을 벼슬길에 나가게 했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1939년 동아일보 기사에 “1908년, 정주 선천 금릉 한평 고부 등 전국 13개소에 흩어진 자기 조상의 산소를 찾아 비석을 세웠고, 1911년 많은 돈을 기울여 조선 본산의 절에 불기와 불등을 바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최송설당이 이때 가문의 여러 대의 한을 풀었음을 알 수 있다. 딸만 셋 있는 가정의 한 많은 아버지의 맏딸로서 남자도 하기 힘든 일을 기어이 해낸 최송설당을 당시의 사람들은‘치마를 둘러서 여자지 사내대장부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조상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고 전국에 흩어진 묘소에 비석을 세우고 거기에다 전국의 사찰 본사에 불등을 바쳐 한을 풀고 기원하며, 모친의 88세 미수연을 열었을 때 그녀의 나이도 어느덧 환갑이었다. 그 때부터 그녀는 여생 동안 남은 재산을 어떻게 쓸 것인가 고민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5년 뒤 그해 먹을 몇 가마의 양식까지 그야말로 전 재산을 김천고보 설립을 위해 쏟아 넣었다. 이용선이 쓴‘거부열전’에 따르면 최송설당이 1930년 32만 원이란 거금을 내놓아 김천고보를 설립한 것은 김천에 사는 고덕환 이한기가 법조계 원로인 전 법무부장관 이인에게 부탁하고 이인이 박영효 이규완 등에게 부탁해 이뤄졌다고 한다. 그러나 허철회의 논문‘최송설당의 시가연구’에 따르면 그녀는 만해 한용운과도 친숙한 사이로, 그의 설득과 조언을 받아 기부하게 됐다고 한다. 어쨌든 당시의 32만 원이란 참으로 엄청난 돈으로, 당시 쌀로 계산하면 3만여 가마(쌀 한 가마 약 13원)나 된다. 이러한 장거는 전국적으로 소문이 났고 1935년 여사가 죽기 4년 전 김천고보 운동장에 여사의 동상이 세워졌고, 그 제막식에는 당시 쟁쟁한 명사인 송진우 안재홍 여운형 등이 참석했다. 또한 1939년 6월 16일 85세를 일기로 서거한 최송설당의 장례식은 여인으로서는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참으로 장엄하고 성대하게 거행됐다.비록 자식을 두지는 않았지만 참으로 보람 있는 쾌거가 아닌가. 대체로 부자의 재산을 육영을 위해 학교에 넣는 경우가 가장 오래가고 확실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최송설당은 참으로 머리가 좋고 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탁월한 기품과 비범한 재질로 한글과 한문을 수학해 교양을 닦고 문학적 소질을 키웠다.“삼동(三冬)에도 타고난 성품을 더럽히지 않는 자, 물중(物中)에 설중송(雪中松)이 있는 고로 외람됨을 무릅쓰고 이를 호로 삼는다.”1922년 최송설당은‘송설당집’3권을 펴냈으며, 위의 말은 그 서문에 있는 글이다. 운양(雲陽) 김윤식(金允植)의 서문, 전 내부대신 남정철, 전 판서 윤용구의 글도 있는 것으로 보아 사회적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허철회의 논문에 따르면 최송설당은 50편의 가사와 한시 258수를 지었다고 하며, 내방가사 작가 중 최다의 작품을 남긴 사람이며, 은촌 조애영의 내방가사에 영향을 주고 계보를 전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가사‘창송(蒼松)’일부를 감상해 보자.“(전략)류수광음(流水光陰) 변천한들 네 빛 네 뜻 고칠쏘냐풍상질고(風霜疾苦) 늙은 몸이 본색본심 불변하니천종만종(千種萬種) 초목 중에 너 같은 류 또 있느냐백운명월(白雲明月) 좋거니와 백설 중에 빛이 난다 창송백운(蒼松白雲) 두 글자를 상합하니 송설이라.” 이 가사는 자신의 호‘송설당’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한시‘사친(思親)’을 보면 다음과 같다.“深深漢江水 깊고 깊은 한강물처럼高高三角山 높고 높은 삼각산같이 昊天在其上 부모님의 은혜는 넓고 커 하늘같이 한없고雙手遠難攀 두 손으론 너무 멀어 오르기 어렵네.”이 시는 부모님의 은혜는 한강보다 깊고 삼각산보다 높다며 지극한 효성을 읊고 있다. 가난한 선비 집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착실히 수학해(修身), 선조를 설원하고 집안을 일으켜서(齊家), 육영의 학교를 설립해 사회에 봉사하니(治國) 이만하면 참으로 위대하게 잘 산 한 평생이라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