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동재의 미학세계 탐험

상 쌀알이라는 것은 일상에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대상이다. 예를 들어 사과 봉지에서 떨어뜨린 사과는 다시 주워 담아도 흘린 쌀 한 톨은 좀처럼 주워 담지 않는다. 쌀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억울한 노릇이다. 크기가 5mm에 불과하지만 쌀 한 톨이 제대로 영그는데 걸리는 수고는 사과와 다를 바 없는데 말이다. 이처럼 ‘하찮게’ 여겨지는 쌀을 가지고 작가 이동재는 하찮지 않은 작품을 캔버스에 구현한다. “쌀을 작품 재료로 응용하게 된 것은 2002년에 벤처농업대학에서 농산물을 이용한 작품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으면서였어요. 살아가면서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이상 쌀을 대하지만,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쌀이 가지고 있는 남다른 의미를 잊고 지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국인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요소 중 하나가 쌀 아닐까요. 이런 생각이 단초가 돼 여러 종류의 곡물을 가지고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쌀이라는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이자 뿌리다. 따라서 미술 작품 속에 활용된 쌀은 곡물이라는 1차원적인 개념을 넘어 우리 민족의 역사, 생명, 본질 등을 담보하는 도구이기도 하다.한편 곡물이 담고 있는 이런 의미 못지않게 곡물 자체의 재료적 매력도 크다. 그는 백미, 흑미를 비롯해 팥 콩 녹두 등으로 색 점을 찍어 이미지를 재현하는데, 각각 고유의 색과 일정한 크기를 지니고 있어서 다양한 표면 질감을 연출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의 작업에서 잡곡 한 톨은 인상파의 터치처럼, 점묘파의 점처럼, 인쇄매체의 망점처럼 그리고 디지털 화면의 픽셀처럼 하나의 이미지를 조합해내는 소립자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앞서 말한 씨앗(혹은 종자)이라는 의미와 고유의 형태적 특성이 결합돼 완성된 작품은 시너지 효과를 얻게 된다. 관객들이 작품을 보면서 다양한 상상을 하며, 다각적인 시각으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쌀 그림 하면 작가 이동재를 떠올릴 만큼 곡물을 이용한 회화는 그를 상징하는 요소가 됐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시력은 예전보다 떨어지고 허리도 안 좋아졌다. 방법적인 면에서는 디지털적인 재현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를 구현하는 방법은 지극히 원시적이기 때문이다.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원하는 이미지를 확대 복사해 폭 5mm 크기로 잘라놓은 후, 얇게 자른 종이를 한 장 씩 캔버스에 올려놓고 음영을 주고자 하는 위치에 쌀알을 붙여나가야 한다. 마치 참선이나 수도를 하듯 단순 노동을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것. 이런 작업을 오래 하다 보니 성격에도 영향을 미쳐 좀더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행동을 하게 되더란다지난 전시 때에는 ‘작업 공간 열어보기’라는 주제를 내걸고 기간 내내 전시장에서 작업 과정을 시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직접 바라보아도 쌀알을 붙이고 붙이지 않고를 반복했을 뿐인데 형태가 나타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진법 수치인 0과 1의 조합을 통해 모든 정보를 표현하는 디지털 원리를 생각하면 좀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예컨대 흔히 사용하는 컴퓨터 워드프로그램의 경우 우리는 단어와 문장을 입력하지만 컴퓨터는 이 단어와 문장을 0과 1로 이루어진 언어로 받아들이고 이를 저장하거나 복사하고, 그 결과를 다시 우리가 알 수 있는 기호(즉, 한글이나 알파벳 같은 문자)로 변환해 보여주는 것이다. “디지털적인 기법 자체는 독창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도트를 찍어서 작업하는 작가도 있고, 접착 메모 용지(포스트 잇)를 사용하는 작가 등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법이죠. 쌀로 만든 작품을 오래 보존할 수 있을지 염려하는 사람도 있는데, 생명력이 100년 정도 지속되는 사진보다 더 오랜 시간 보존될 수 있습니다. 고대 고분에서도 변형되거나 부패되지 않은 쌀이 출토될 정도니까요.”다양한 색상의 캔버스 위에 제인 구달, 아인슈타인, 엘리자베스 여왕, 제임스 딘, Mr. 빈, 마릴린 먼로, 장미희, 해골, 심장, 뇌 그리고 작가 자신의 얼굴 등을 쌀로 표현한 그의 작품은 마치 팝아트를 연상시킨다. 컴퓨터를 통해 디지털화한 초상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까닭에 기계적이고 통일된 선으로 이루어진 인물의 모습에서 산업적이고 현대적인 이미지가 전해지는 것. 이처럼 그의 작품에는 시대를 넘나드는 각계각층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동재가 모델을 선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선별 기준이요. 굳이 꼽는다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그 다음에는 개인적인 취향이나 기호에 따라 임의로 선택해 작업을 하는 것이죠. 제인 구달 박사는 침팬지를 연구하면서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회성을 침팬지 사회에서도 발견했잖아요. 인간의 오만함을 고발한 면이 인상적이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모델로 삼았습니다. 콩으로 Mr. 빈을, 현미로 가수 현미씨를 형상화한 것은 예술적 유희라고 할 수 있죠. 심오하고 무거운 주제를 담기보다는 저나 보는 사람들 모두 기분 좋고 유쾌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쌀의 반투명한 물성과 낱알의 두께로 인해 평면 작품이지만 보는 위치에 따라 이미지가 또렷하게 드러나기도 하고 흐릿해지기도 한다. 또한 작아도 쌀 곡물이 일정한 크기가 있어서 옆에서 보면 물성이 드러나기 때문에 액자를 끼우면 감상 포인트를 놓칠 수 있다. 그래서 이동재는 손상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액자를 끼우지 않은 채 작품을 전시한다고 한다. 그는 본래 동국대와 동대학원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최근 4년여 간 쌀 작업을 주로 한 까닭에 그의 다른 작품을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가 기획하고 참여한 단체전 ‘위시 리스트’에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을 받은 물건들을 플라스틱 부조로 만든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이 전시는 인사아트센터에서 4월26일까지 열린다.문의 (02)736-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