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한생곤의 미학세계 탐험

생곤은 화가이며, 노란 버스를 타고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도는 여행자다. 서울대 미대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가 유목민이 된 것은 7년 만에 완성한 그의 석사학위 논문 ‘깨달음의 회화적 수렴에 관한 연구’에서 말미암는다. 1999년 발표한 이 논문에서 작가는 자신을 ‘지구 위의 여행자’라 정의하고 삶과 예술에 관한 내면의 고백을 매우 솔직하게 드러내며 이후 자신의 행보에 대한 암시를 담았다. 이후 작가는 달팽이처럼 화실을 등에 업고 돌아다니는 이동 화실을 꿈꾸다가 2002년 노란 중고 버스를 구입해 ‘노란 버스 화실’을 마련했고, 지금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그림 여행을 하고 있다.이는 현재 그의 모습과 왜 지금과 같은 선택을 했는지에 관한 의문점을 어느 정도 풀어주지만, 완전한 답변이 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여행으로서 인생을 파악한다는 그가 생각하는 예술은 무엇이고, 추구하는 예술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구현하고 있을까. 예술과 기술. 흔히 전자는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후자는 이성적이고 테크놀로지적인 것이라고 구분하기 때문에 언뜻 이 두 가지는 상반되는 요소로 여겨진다. 그러나 화가 한생곤은 ‘예술’이든 ‘기술’이든, ‘검술’을 익히듯 공력을 쌓아야 기량을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어느 순간 영감이 떠올라 일필휘지로 그려내는 천재 화가는 한 세기에 한 명이 나올까 말까 한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오랜 고뇌와 번민을 거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작업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저는 버스 여행이 분재로 치면 분갈이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상에서 잘못된 것과 비효율적인 것을 잘라내고 생활을 간소한 형태로 줄여가는 것을 가지치기라고 한다면 지친 일상에 독서, 음악, 좋은 대화, 산책, 여행을 통해 거칠어진 감성을 다시 부드럽게 하는 것은 거름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란 버스 여행은 정착에서 유목으로 ‘모드’ 전환을 시도한 것이니 분갈이를 한 게 아닐까요. 그러나 버스 여행이라는 형태로 제 생활의 분갈이를 한 후로도 가지치기와 거름 주는 일을 빠뜨리지 않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도(道)와 나무를 기르는 도(道)와 그림을 그리는 도(道), 결국은 알아가는 길이죠. 서로 아무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3월 한생곤은 ‘가겟집’이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다 그의 눈에 들어온 풍경 하나가 바로 가게였다. 낡은 간판, 슬레이트 지붕, 옆으로 ‘드르륵’ 밀어서 여는 나무 유리문 등 도시에 있는 편의점이나 마트와는 다른 색깔을 지닌 상점들. 80년대에 흔히 볼 수 있던 모습이라 마치 시간을 역행한 듯한 느낌을 주는 가게에 끌린 이유는 영악하지 않은 소박한 느낌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은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도시의 상점과 후락하지만 정겨운 지방 소도시의 구멍가게들이 공존하고 있으나 머지않아 후자의 모습은 사라지리라는 그. 이처럼 소박하고 원초적인 감성들을 그림으로나마 잡아두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가겟집 안에는 비슷한 느낌의 사람이 살고 있어요. 가게를 지키고 있는 아저씨, 아줌마 혹은 나이 든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님은 왕’이라는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퉁명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입만 웃으며 ‘어서오세요’를 남발하는 현대적인 매장과는 다른 정겨움과 소박함이 은은하게 배어 있지요.”작가 한생곤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우리의 삶, 그 허름함 속에 중량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 손님이 올지 하루에 몇 명이나 올지 가늠할 수 없지만 하루 종일 길거리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행상들도 도를 닦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그들의 삶에서 숙연함을 느껴 종교화에서 성인들에게 그리는 후광을 이들에게 그려 넣기도 했다. 한생곤은 달팽이 화실에서 작업을 하면서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재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그저 화구 상점에서 구입한 아크릴이나 유화로 그림을 그리자니 어딘가 아쉬움이 느껴졌던 것. “어느 날 여행하면서 자주 보게 되는 길바닥 위에 떨어져 있는 것들이 제 마음을 끌더군요. 나무껍질이나 광물을 원재료로 해서 형상화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조개껍데기도 빻아 보고, 돌멩이도 빻아 보고, 녹슨 철근의 녹도 모아 보고, 빻아지지 않으면 찢어도 보고, 재료들을 같이 섞어도 보았죠. 선재도의 갯벌, 남도의 붉은 황토, 제주도의 검은 현무암도 독특한 질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 재료는 화방에서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행 중에 자연스럽게 또는 우연히 만날 수 있는 재료들이죠.”지난해 가을 남이섬에서 ‘나뭇잎 이야기’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열 때는 나뭇잎과 나무껍질을 빻아서 만든 가루를 바인더에 섞어 안료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뭇잎의 모양을 떠서 형태를 그리고 그 안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상들을 그려 넣었다. 죽어야 다시 사는 계절이자 텅 빔을 자각하며 공으로 돌아가야 하는 계절인 가을. 그는 이러한 계절의 무상을 가볍고 덧없는 나뭇잎 한 장의 마음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이번 ‘가겟집’ 전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슬레이트 지붕, 오래된 담벼락, 붉은 기와 등 가게와 연관이 있는 재료들을 빻은 가루를 가지고 그 모습을 형상화했다. 조금 더 고독했던 예술가가 조금 덜 고독한 사람에게 위안을 줄 수 있고, 가장 좋은 그림은 가장 외로울 때 그릴 수 있다는 한생곤. 여러 사람들과 뒤섞여 있을 때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굉장히 외로운 상황에 처하면 보일 때가 있고, 따뜻할 때 안 보이던 것이 추울 때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익숙함에 놓아두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런 이유로 불편하고 외롭지만 버스 여행을 지속하고, 남들이 쓰지 않는 것을 재료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