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사실주의 화가 강형구

'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나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화가 강형구는 자신의 애창곡 ‘킬리만자로의 표범’ 가사처럼 21세기가 시작되는 2001년 우리 앞에 모습을 보였다. 예술의전당, 조선일보미술관, 삼성플라자갤러리로 이어지는 연이은 전시. 200호짜리 대형 캔버스에 그린 초상 이미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강형구’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의 나이 마흔 일곱, 중앙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지 20년이 지나서야 이뤄진 일이었다. 지난 10년간 분당에 있는 지하 작업실에서 두문불출하다시피하며 수백 점의 그림을 그렸고 그 이전에는 혜화동에서 4년여간 갤러리를 운영하다 집 한 채 값이 족히 넘을 만큼 손해를 보았고, 또 그전에는 회사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우회로로 돌고 돌아 오랜 인고의 시간을 거치고서야 마침내, 결국은 화가로서 살게 된 셈이다.“24세에 장가를 들었으니 지난해가 결혼 30주년이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결혼해 가정을 꾸리자니 일을 할 수밖에 없었죠. 적성이나 전공과는 무관한 농약회사를 다니다가 자그마한 화랑을 만들었는데 완전히 망했습니다. 작가들과 어울려 술 마시며 그림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었으니 성공할 리가 있겠습니까. 돈도 없고 일도 없고 그야말로 바닥을 치고 나니 그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난방도 안 되는 지하 작업실에서 에어브러시와 동고동락하며 2m가 넘는 대형 작품만 150점 완성했습니다. 10점만 가지고도 작은 규모로 전시회를 열 수 있었지만, 스스로 검증이 될 때까지 계속 그렸지요. 잠자는 시간이 아까워 하루에 4~5시간, 그것도 2시간 정도씩 토막잠을 자면서 말입니다. 직장 생활이 나를 눌린 용수철로 만들어 주었던 것 같습니다.”눌렸던 용수철은 현재 쉼 없이 튀어 오르고 있다. 10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그림은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워낙 강렬한 탓에 초기에는 사람들이 선뜻 구입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아라리오 갤러리 전속 작가인 그의 작품 ‘푸른색의 빈센트 반 고흐’는 지난해 11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고가에 판매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국내는 물론 시카고 아트 페어, 아르코 아트 페어 등 국제적인 전시장 곳곳에서 강형구의 작품과 자주 마주친다.인물의 초상을 화면 가득 채운 그의 작품은 극사실주의로 분류된다. 고흐, 다빈치, 링컨, 먼로, 소피아 로렌 등과 같은 유명인, 그리고 불특정 다수를 마치 사진처럼 생생하게 표현한 작법은 ‘일상적인 현실을 생생하고 완벽하게 그려내며 주관을 극도로 배제하고 중립적 입장에서 사진처럼 극명한 화면을 구성한다’라는 극사실주의의 범주에 해당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강형구는 자신의 작업에 있어서 극사실주의가 차지하는 비중은 20%에 불과하고 오히려 자신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거짓말쟁이(Liar)라고 말한다.“극사실주의 기법을 차용하는 이유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 사진으로 찍힐 수 없는 비현실을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다는 매력 때문입니다. 사진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의 다빈치와 공자, 실존 인물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포즈, 나의 미래 모습 등을 극사실로 표현해냄으로써 사진으로는 찍을 수 없는 허구를 형상화할 수 있는 그림의 특권을 즐기는 것이죠. 어쩌면 저는 리얼리즘보다는 허구를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그는 특정인의 고유명사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다. 흔히 알고 있는 인물을 소재로 삼지만 담배 피우는 고흐, 나이든 마릴린 먼로, 캐리커처로 그린 앤디 워홀 등은 작가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같은 영하 1도라도 체감 온도가 다르듯 익히 알려진 인물을 소재로 할지라도 그의 손끝에서 완성된 체감 소재는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특히 그림 속 인물의 강한 눈빛은 한 번 보고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몇 번이고 바라보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눈의 표정을 살리기 위해서는 사전에 철저한 탐구 과정을 거쳐야 한다. 화가이지만 화집보다 역사, 문화, 영화, 체육 관련 서적을 사는데 들인 돈이 더 많고, DVD를 수백 장 소장하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객관적 사실, 대중에게 보여진 모습, 잘 알려지지 않은 사적인 생활 등을 파악해 그는 그 인물을 재창조하고 거기에 감성과 메시지를 담는다.“연극의 3대 요소에는 관객이 포함돼 있습니다. 미술도 마찬가지입니다. 화가가 작업을 마쳤을 때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의 감상이 있은 후에 진정한 완성이 이뤄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얼굴의 표피를 그렸지만 동일한 인물의 사진이나 여타의 이미지와는 분명히 다른 체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느끼는 감성을 감상자와 공유하고 싶고 나와 비슷한 것을 느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술품은 개인이 소장할 수 있는 품(品)으로서의 기능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근원적인 기능은 판매와 무관한 감상자와의 교감이고, 그것이 예술이 존재해야 하는 목적 아니겠습니까. 경매에서 높은 가격에 팔리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전시장에서 더 많은 대중과 내 그림이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작품은 좋은 곳에 시집보내야 할 딸과 같아 여러 사람들에게 선을 보이고 싶은 것이죠. 대중이 아닌 일부 고객만 상대하는 것은 돈 많은 남자들에게 몸을 파는 창부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요.”그가 학교를 다닐 때에는 오락거리가 많지 않았다. 부친의 직업상 초등학교 4번, 중학교 2번 등 전학을 많이 다녔는데, 그때마다 친구들 사이에 알려지게 되는 것은 그림 그리는 재주 덕분이었다. 만화가 대세였던 당시에 이야기를 지어내 창작 만화를 써서 실로 엮어 책으로도 만들었는데, 그러면 원본의 복사본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학창 시절 그가 그린 작품 중 최고로 꼽는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 3개월에 걸쳐 성문종합영어 상단 모퉁이 페이지마다 그렸던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다. 그때에도 지금처럼 극사실주의를 즐겨 그렸던 만큼 책장을 빠르게 넘기면 움직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고. 그런데 친구가 수업 시간에 보다가 들켜 압수당하는 바람에 교무실로 찾아가 “저 영어 공부해야 합니다. 책 돌려주십시오”라고 했더니 선생님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새 책 사서 봐라”고 하시더란다.요즘 그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영은 미술관에서 입주 작가로 작업을 하고 있다. 해질녘에 미술관 주변을 산책하면 그림자가 길게 떨어지는데 주름살이 보이지 않는 형체를 대할 때면 젊은 시절과 조우하는 듯하다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리울 때는 종종 있다는 말 속에 언뜻 외로움이 묻어나기도 한다. 전학을 자주 다니던 학창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직장 생활을 할 때도 샐러리맨도 예술가도 아닌 그는 회사에서나 미술을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이도저도 속하지 못하면서 외로움을 많이 느꼈다. “집단으로부터 소외감을 느꼈던 것이 작가 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 채 분당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릴 때에도 외로움에 대한 익숙함이 도움이 됐고, 작가로 살아가는 현재와 미래에도 어느 정도의 외로움은 안고 가야 작업을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혼자서 10년의 시간을 대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흔히 미래를 비현실적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오히려 과거가 비현실이라고 말한다.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과거와 달리 미래라는 것은 꼭 오고야 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작업한 덕에 그는 그토록 원하던 “평생에 걸쳐서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는 예술가”가 된 것이다.글 정지현 미술전문 칼럼니스트·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