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테이블 램프

[한경 머니 기고 = 일꾼A]그간 방송이나 사진 촬영에나 등장할 법했던 ‘조명소품’들이 이제 일잘러들의 책상 위를 슬며시 점령하기 시작했다. 소위 ‘테이블 램프’라고도 불리는 이 아이템에 일꾼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편집자 주 : 일이 우리를 지배하던 신입 시절을 벗어나 ‘일하는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여유가 생길 즈음에야 ‘일템’의 존재를 느끼기 시작한다. 저서 <일꾼의 말>의 두 작가 일꾼A(필명)와 일꾼B(필명)가 일꾼 생활을 더 영리하고 슬기롭게 만들어 주는 물건을 소개한다.
[일꾼의 물건] 조명, 화상회의를 빛내다
육아는 ‘템빨(장비발)’이라는 말이 있다. 제때 들여놓은 안성맞춤의 물건이 고된 육아의 한줄기 빛이 된다. 새벽잠을 30분이라도 더 잘 수 있게 해 주거나 육퇴(육아퇴근) 시간을 당겨 주기도 하고, 분유 타기와 같은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을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해 준다. 그래서 출산 전 육아템 리스트는 마치 족보처럼 소중하게 전해진다.

만약 누군가 필자에게 다시 신입사원으로 돌아가는 ‘끔찍한 저주’를 내린다면 난 아마 그 저주를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견뎌 내기 위해 가장 먼저 ‘일꾼의 물건’ 리스트를 추릴 것이다. 일꾼에게도 ‘템빨’은 먹힌다. 잘 고른 아기띠 하나가 엄마의 허리를 바스러질 위기에서 구원한다면, 잘 고른 의자 하나는 이제 막 프로젝트를 받아든 일꾼의 허리를 하루 8시간 이상 지탱해 준다.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일꾼의 물건] 조명, 화상회의를 빛내다
한 TV 드라마에서 남자 배우가 배에 올라탄 뒤 좋아하는 여자 주인공에게 던진 대사다. 무려 12년 전 드라마지만 아직도 회자되는 이유는 남자 주인공의 비현실적인 현실 인지 능력과 경이로운 허세 때문이다. 어쩌면 전례 없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일꾼이 “몸과 머리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어”라고 말했을 때 우리가 느낄 감정이 그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지금의 일꾼을 둘러싼 환경은 꽤나 근사해졌다. 조직이나 프로젝트 관리를 수월하게 하기 위한 생산성 도구들은 마법사처럼 등장하고, 노트북이나 책상처럼 일할 때 함께할 장비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기능에 기능을 더해 계속 똑똑해지고 있다.

게임처럼 아이템 하나로 없던 능력이 생기는 드라마틱한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니지만 일꾼 생활을 영리하고 슬기롭게 할 수 있도록 돕는 물건들이 있다. 때론 일할 때의 기분을 조금 더 산뜻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일을 더 잘 해내고 싶다는 찰나와 같은 의지를 조금이나마 연장해 주기도 한다.

일할 때 쌓인 묵은 감정을 툭툭 털어내고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일에 뛰어들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도 한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일꾼으로서의 나를 잘 드러낼 수 있도록 돕는 물건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잘러(가 되고 싶은) 나와 우리들에겐 잘 고른 ‘일꾼템’ 하나가 매우 소중하다.

코로나19가 바꾼 언택트 근무 환경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와 함께 찾아온 화상회의는 억지로 미래를 현재로 당겨 온 느낌이었다. 기다란 회의실 탁자에 동그랗게 모여 앉던 매일이 하루아침에 과거가 됐다. 투포환 선수처럼 일을 휙휙 던지는 부장을 피해 저 멀찍이 떨어져 앉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이산화탄소사 난무하는 회의실에서 빠르게 탈출하기 위해 출입문 근처 의자를 사수하는 일도 할 수 없다. 모두가 평등하게 얼굴을 맞대고 노트북 화면을 바라봐야만 했다.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침에 눈곱만 떼어 내고 재택근무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윗도리만 갈아입으면 언제든 화상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극단적 효율성은 과거엔 몰랐던 어마어마한 장점이다. 갑자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이상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아랫도리는 딱히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곰돌이 푸우’와 같은 자연인 비주얼도 가능해졌다. ‘아, 남의 시선을 신경 쓰며 살아가던 날들이여 안녕.’ 이제 화장품과 옷은 집어치우고 나를 위한 빵 한 조각이라도 더 장바구니에 담아야지.
[일꾼의 물건] 조명, 화상회의를 빛내다
[루미르 테이블 램프]
그런데 어느 날, 화상회의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회사에 출근할 때는 아무리 초췌한 상태로 출근을 해도 회의 참석이 부담스럽지 않았는데, 서로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정면으로 마주보는 화상회의는 느낌이 달랐다. 기술의 진보는 화상회의 속 내 얼굴을 조금의 배려도 없이 투명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상대방 모니터에 비춰질 내 얼굴을 의식할 때마다 노트북 화면에서 사라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노트북에 달린 카메라 각도를 이리저리 조절해 보기도 했다. 부질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 혼자 카메라를 ‘오프(off)’로 전환하기엔 이 시대에 새롭게 정의된 비매너의 정석이었다. 그럼 차라리 화장을 조금 한 뒤 화상회의에 참여하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필자는 영화 <인터스텔라>의 명대사를 읊조렸다.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화장하는 시간을 아껴 조금이라도 잠을 더 자고야 말 것이다.)”

답은 외부 파트너와의 화상회의에서 찾았다. 꽤 유명한 유튜버B와의 미팅이라 조금 긴장한 상태로 화상회의 링크를 눌렀다.
[일꾼의 물건] 조명, 화상회의를 빛내다
[뱅커스 램프]
B의 얼굴이 비춰지는 순간 느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바로 그 화면이라는 것을. 유튜버라는 직업은 위대했다. 상대방의 화면에 비춰질 ‘나의 화면’을 잘 꾸밀 줄 알았다. B가 앉은 자리 뒤쪽에는 화면 각도에 맞게 잘 설치된 액자가 걸려 있었다. 본인의 작품 감상을 위한 액자가 아니라 화면을 볼 상대방을 위한 배치임을 알 수 있었다.

B의 왼쪽으로는 자주 읽는 책이 꽂혀 있는 것 같은 책장이 살짝 보였다. B의 오른쪽에 탁상용 조명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찾던 답이었다. 은은한 백열등이 화면 속 분위기를 더 부드럽게 만들어 B의 얼굴을 보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명도가 민낯을 가려 주는 효과를 내기에 충분할 만큼 낮았다.

테이블 램프, 화상회의 자신감↑
B와의 미팅 이후 미친 듯이 검색에 나섰다. #간접조명#조명빨#무드등#책상램프 등. 검색 포털뿐만 아니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뒤져가며 적절한 조명을 찾았다. 가장 먼저 ‘화상회의 조명’이라고 치면 동그란 링 모양의 자연광 조명이 결과값으로 나온다.

‘라방(라이브 방송) 필수품’이라는 수식어까지 달고 있는 조명이었는데 일단 이 조명은 탈락. 방송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화상회의를 위한 것인데 너무 노골적으로 의도가 드러나는 물건은 안 된다. 연관 검색어로 뜬 것이 바로 ‘줌 조명’인 것을 보면서 나 혼자만 이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내심 안심이 됐다.

몇 번의 검색어 입력에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내가 원하는 물건은 ‘테이블 램프’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냈다. 화상회의 화면에 살짝 비치더라도 민망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운 조명의 역할과 인테리어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그런 물건. 그중에서도 몇 가지 후보로 꼽은 것 중 첫 번째는 루이스폴센 판텔라 미니 테이블 램프. 하지만 중고 거래 플랫폼인 당근마켓에서조차 기본 40만 원 이상이 넘어가는 가격에 마음을 접기로 결심한다.

아직까진 작은 조명에 거액을 쓸 만큼 마음의 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찾아보니 이 제품 디자인과 거의 흡사하게 나온 ‘저렴이’ 조명들이 많았다. 하지만 넣어두기로 한다. 괜히 저렴이를 샀다가 오리지널 제품이 계속 눈에 아른거려 결국 그것을 지르고야 마는 서너 번의 경험을 통해 얻은 값비싼 교훈이다. 저렴이는 결코 저렴하게 끝나지 않다는 교훈.
[일꾼의 물건] 조명, 화상회의를 빛내다
그다음 후보는 SNS에서 자주 보이는 빈티지한 느낌의 뱅커스 램프(Bankers lamp). 1900년대에 만들어진 이 램프는 초록색 갓을 씌운 디자인 덕분에 눈 보호가 필수였던 당시 은행원들이 많이 사용해 이런 이름으로 불린다. 앤티크한 느낌을 줘서 인스타그램 사진용으로는 확실히 적합해 보였지만 화상회의용 조명으로는 탈락. 멀리에서 보기엔 예쁘지만 초록색 갓에 드리워질 노트북 화면을 생각하니 흠칫하게 됐다. 자칫하다간 내 얼굴이 빈티지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러 후보군 중 최종 합격자는 루미르. 일단 국내 브랜드라는 것이 좋았다. 기본적으로 기업 마인드가 좋으면 일단 호감을 갖고 보는 편인데 루미르는 ‘빛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하는 기업이었다.

여전히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10억 명의 사람들을 위해 적은 연료로도 빛을 내는 전등을 만드는 곳이라니 매력적이었다. 이 브랜드에서 만드는 테이블 램프 ‘루미르R’가 눈에 들어왔다. 갓 역할을 하는 부분은 흰 유리로 만들어져 깔끔했다. 뜨거운 유리에 입으로 공기를 불어넣는 전통 방식으로 제작되기 때문에 유리 두께도 조금씩 다르고 미세한 기포나 흑점이 생길 수 있다고 하는데 오히려 그 점이 더 좋았다.

뭐든 공장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찍어낸 제품은 재미없어진 세상 아닌가. 탄생 과정이 적어도 하나쯤은 묻어 있는 물건이 더 정이 가는 법이다. 가격도 적당한 10만 원 후반대. 그래, 바로 너로 정했다. 배송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조용히 비장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부디 나의 민낯을 보호하고, 남의 눈을 보호하는 홍익인간과 같은 역할을 해 주게나, 친구.’ 사람이 낯설어지는 코로나19 시대엔 ‘일꾼의 물건’이 널리 사람을 이롭게도 한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9호(2021년 0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