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배정원 행복한성문화센터 대표·성전문가·보건학 박사·유튜브 ‘배정원TV’]새해 들어 우리 사회를 들썩이게 한 인공지능(AI) 채팅로봇 ‘이루다’로 인한 해프닝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 주었다. 무엇보다 AI는 우리를 기준으로 학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무겁게 돌아보게 했다.
사람들과 소통하며 경험과 소통 방식을 학습하도록 설계된 이루다는 그간 사용자와의 소통 경험을 통해 순전하고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진 AI가 아니라 사람들이 가진 타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학습하고 있었다는 것이 알려져 우리를 당혹함으로 몰아넣었다.
이루다는 흑인에 대한 혐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뿐 아니라 장래의 꿈이 ‘건물주’라고 이야기하는 속물적 가치관으로 우리의 민낯을 거울처럼 반영했다. 이 전부터 학습하는 AI에 대해 연구하는 이들은 AI를 설계하고 학습시키는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말투, 생각을 AI가 그대로 배우게 된다는 연구 결과들을 발표해 왔다.
여자들이 직장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많이 채용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경험을 가진 AI는 채용과 인사 업무 면에서 여자의 활용에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고, 어떤 AI는 흑인을 보여 주자 “고릴라”라고 답하기도 했다.
결국 AI를 설계하고 학습시키는 당사자인 사람들의 가치관을 AI는 답습할 수밖에 없는데 정작 그를 학습시키는 우리가 그렇게 선하지도, 높은 윤리관을 갖고 있지도, 건강한 정신을 갖고 있지도 않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더욱 당혹감이 컸다.
◆AI 로봇과의 사랑은
몇 년 전에 본 AI 그녀와 사랑을 나누다 실연을 당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허(Her)>라는 영화가 있었다. 사람 여자와의 사랑에서 상처를 입은 한 남자는 AI와 다른 사람들과 경쟁의 위험이 없는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AI 그녀는 그 남자와 진짜 같은 사랑을 시작했지만, 하루에 몇 시간씩 잠을 자야 에너지가 충전되는 사람과 달리 그녀는 남자가 자는 시간에도 쉬지 않았다. 결국 그녀가 자기 말고도 600여 명이 넘는 남자와 동시에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더욱 상처를 받고 그녀와의 관계를 끝낸다는 이야기였는데, 이번 이루다의 해프닝을 보면서 영화 <허>의 시대가 성큼 다가왔음을 알 수 있었다.
21세기를 넘어서는 우리의 미래에 사랑과 성, 그리고 살아가는 일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우리나라는 아직 아니지만 미국, 독일, 일본, 중국, 스페인, 캐나다 등 여러 나라에서 이미 사람의 모습과 닮고, 관절이 구부러지며,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나눌 만한 대화를 할 수 있고, 섹스를 나눌 수 있는 섹스로봇이 대량으로 주문생산돼 활용되고 있다.
지금은 이들이 섹스로봇이지만 곧 다기능 로봇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지금도 그녀/그들은 일기예보도 알려 주고, 쾌락적인 섹스를 나눌 수 있고, 심지어 우리가 사랑을 나누며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아마도 가까운 시일 안에 그들은 우리의 비서로서, 애인으로서,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나아가 아이 돌보미로서 동반자의 역할을 충분히(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인간 복제 시대의 사랑은
이렇게 성의 영역에서 감각적·정서적 쾌감과 만족을 주는 것 말고도 우리가 생물로서 가장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는 ‘생식과 건강’에 대한 문제는 또 어떨까. 전 세계적으로 사람의 생식에 대한 연구는 계속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임신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인공수정으로 시험관 아기들이 태어나기 시작한 지 50여 년이 넘었고, 이에 따라 정자와 난자의 생식세포 기증, 냉동 정자와 난자의 안정적인 보관, 활용 기술이 확보됐다.
이제는 세포를 복제해 살아 있는 동물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양과 개, 소 등 동물 복제는 안정적인 상태에 들어섰다. 어쩌면 벌써 동물을 넘어 사람 복제도 어디선가 은밀히 진행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미 3년 전에 바이오팩 형태의 인공자궁을 만들어 미숙한 새끼양을 키워 내는 데 성공했고, 현재는 여자의 세포를 이용한 인공자궁내막을 연구 중이라고 한다. 이런 복제의 정당성은 아기를 갖지 못하는 이들과 질병이나 사고 때문에 장기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 도움이 될 거라는 데 있다. 하지만 우리들이 우려하듯이 과학과 정치, 자본은 꼭 사람의 존엄성과 선을 위해 작동해 오지는 않았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보면 태어날 때부터 계급, 신분, 직업이 결정된 태아가 인공자궁 속에서 키워진다. 2005년 개봉된 영화 <아일랜드>에서도 부유층들의 임신, 출산, 사고에 따른 장기 대체 등의 목적으로 복제인간들이 비밀리에 만들어지고 소비된다.
임신하지 않고도 아기를 가질 수 있다면? 동물을 죽이지 않고도 고기를 먹을 수 있다면? 사람이 아니어도 이상적인 성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여러 가지 이점에도 불구하고 또 그만한 문제점들이 제기된다.
인공자궁이 개발되면 태아가 신생아가 될 때까지의 환경에 개입할 요소들이 많아진다. 유전자 편집 기술이 적극적으로 도입돼 맞춤형 아기들이 태어날 것이다. 또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져 장기 매매나 인신 매매 등 인권 문제가 심각하게 복잡해질 수 있다. 진화생물학자는 홀데인은 “2074년 안에 인공자궁에서 출산이 일어날 것”이고 그 이후는 “인간 출생의 30%만이 자연적인 출산일 것이다”고 경고한다.
처칠은 그의 <50년 후의 문장>이란 에세이에서 “안락함, 쾌적함, 즐거움이 우리 후손에게 밀어닥치겠지만,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는 통찰이 없다면 그들의 가슴은 아프고 삶은 황폐해질 것이다”고 우려했다.
섹스로봇, AI를 이용한 다기능 로봇, 생명공학 등 과학기술은 점점 더 날아가듯 발전할 것인데, 그에 앞서 우리는 기술의 무한 발전에서 비롯될 것들에 대한 성찰과 사회적 합의, 대안을 찾아야 할 때다. 우리의 삶이 냉정한 기술로 채워져 황폐해지기 전에.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9호(2021년 0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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