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솔직하고, 담백하다. 치열하게 일하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예의와 상식을 언행으로 실천했던 배우 윤여정이 제93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한편의 영화 같은 그의 인생에서 이번 수상은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오스카 위너, 윤여정이 남긴 품격
제93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배우 윤여정이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한국 영화 역사상 처음 있는 놀라운 일이고, 아카데미 영화제 역사에서도 한국 여배우의 연기상 수상은 처음이다. 아니, 연기 부문에서는 아시아 배우의 수상 자체가 손꼽을 정도로 희박하다.

물론 아카데미는 지난해에도 한국 영화 <기생충>에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해 4개 부문의 상을 수여했다. “한국 배우를 위한 미국식 환대(an American hospitality for Korean actor)를 받아 운이 좋았던 것 같다”고 말한 윤여정 배우의 재치 있는 수상소감처럼 ‘화이트 오스카’라는 평가를 받던 아카데미가 변화의 증거를 보여주려고 애쓴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서로 다른 영화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연기한 다섯 명의 승리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녀가 이 수상소감을 말했을 때, 그녀의 경쟁자 가운데 한 사람은 상을 받은 그녀보다 더 감격에 겨워 “난 저 사람이 좋아(I love her)”라고 말했다.

배우에게 필요한 것이 사람들을 매혹하는 재능이라면 경쟁자의 마음까지도 사로잡는 윤여정은 진정한 의미의 승리자일 것이다. 비록 그녀 자신은 “경쟁을 믿지 않는다”라고 말했지만. 사실 영화 <미나리>의 ‘순자’를 연기하면서 윤여정이 수상한 트로피의 숫자보다 우리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은 이 놀라운 상들을 받으면서 그녀가 보여준 ‘사랑스러운’ 애티튜드였다. 그녀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들은 그녀의 연기력보다 그녀의 사람됨에 더 큰 찬사를 보낸다. 윤여정은 영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고상한 체하는(snobbish)” 영국인들을 박장대소하게 만들었고, 오스카에서는 할리우드 대스타인 브래드 피트와 글랜 클로즈의 순진한 미소를 이끌어냈다.

그녀는 일흔다섯의 여배우다
2021년 5월 8일 새벽,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쥔 윤여정은 항공 점퍼에 청바지 차림으로 인천국제공항에 내렸다. 출국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한 입국이었다. 공항 안에서는 피곤한 기색으로 휠체어를 타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거의 한 달간의 강행군이었으니 체력적으로 힘에 부칠 만도 하다. 한국 나이로 일흔다섯.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다. 윤여정은 그녀를 사랑하는 누리꾼들의 해명처럼 “감각이 젊은 것이지 신체 나이가 젊은 것은 아닌” 할머니 배우다.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공자는 나이가 일흔을 넘으니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선을 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일흔다섯 윤여정은 여전히 ‘처음’이라고 말한다. 50년을 살아도, 60년을 살아도, 70년을 더 산 사람에게도, 새롭게 주어지는 하루는 여전히 ‘처음’인 것이다. 여전히 처음이어서 서툴고, 아쉽고, 아프다. 그렇다고 그녀가 ‘처음’이라는 이유를 빌려 자신에게 막연한 관대함을 베푸는 것은 아니다. 그 나이 먹도록 새로운 실수를 저지르는 자신에게 짜증이 난다고 솔직히 말한다. 솔직한 대신에 그녀는 그 자체로 아쉽고 아픈 인생을 수용한다. “그게 어떤, 여자의 인생인 것 같아요. 젊었을 때, 20대 때의 배우가 있어요. 30대 때의 배우가 있어요. 또 느낄 수 있는. 40대 때, 50대 때, 60대 때가 다 달라요. 그래서 나는 지금…, 쓸쓸하고 씁쓸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 안 하기로 했어요. 왜냐하면 그게 인생인데, 뭐.”

여배우로서 나이를 먹는 것은 아픈 일이다. 일흔다섯의 여배우는 스물다섯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이미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젊어서는 반짝이는 청춘에 재능으로 해냈던 일들을 나이가 들면 같은 방식으로 해낼 수 없게 된다. 경험과 관록으로 단련된 내면의 연기력으로 문제를 해결한다고 믿고 싶어도 거울 속에서 달라져 가는 자신의 모습이 싫은 건 어쩔 수 없다.

흉해지는 몰골이 싫고 비참해지는 것도 피할 수 없다. 아무리 마음을 다독여도 자꾸 왜 내게만 이런 일들이 생기는지 속상해진다. 윤여정은 그런 속상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없어지기로 했다고 말한다. 인생은 원래부터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것이다.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사실은 사실대로 받아들이고, 불만은 솔직히 표현하되, 표현은 무겁지 않고 가볍게, 화를 내기보다는 한 번이라도 더 웃을 수 있게 하자.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선을 넘지 않는 경지란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오스카 위너, 윤여정이 남긴 품격
인생은 공짜가 아니다, 연기도 그렇다
윤여정은 생계형 배우다. 스스로 언제나 그렇게 말했고, 주변 사람들도 그 사실을 인정하며, 팬들도 인터뷰를 통해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연기자가 가장 연기를 잘할 때는 돈이 궁할 때예요. 배가 고프면 뭐든 매달릴 수밖에 없어요. 예술가도 배고플 때 그린 그림이 최고예요. 그래서 예술은 잔인한 거예요.” 살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일을 한다. 그 결과가 절실한 연기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녀는 웃으며 이런 말을 농담처럼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 먹은 대로 금방 막 잘 하게 되지는 않더라.”

“이 상을 제 첫 번째 감독이었던 김기영 감독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아주 천재적인 감독이셨습니다. 나는 그분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제 첫 번째 영화를요. 제 생각에는 그분이 살아계셨다면 아주 기뻐하셨을 거예요.” 그 천재적인 감독은 윤여정을 ‘유일하게 내 말을 이해하는 배우’라고 칭했다. 김기영 감독과의 작업으로 윤여정은 20대에 이미 스타덤에 올랐고, 당대의 어떤 여배우들과도 다른, 당돌하고 도발적인 연기로 주목을 받았다. TV 드라마 <장희빈>에서는 극을 이끄는 여주인공 역을 맡을 정도로 파격적인 대우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을 했고 자연스럽게 은퇴의 수순을 밟았다.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이혼과 함께 돌아왔을 때는 이미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중년 여자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장희빈>에서 어떤 역을 연기했었느냐고 질문하기도 했다. 그래도 아이들을 부양하고 살아야 했던 그녀는 다시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단역이든 조연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칭찬을 듣기 위해서 한 연기가 아니었어요. 나는 살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목숨 걸고 한 거였어요. 요즘도 그런 생각엔 변함이 없어. 배우는 목숨 걸고 안 하면 안 돼. 배우가 편하면 보는 사람은 기분 나쁜 연기가 된다고,”
무시하는 사람들의 시선보다 더 뼈저린 건 자신의 연기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였다. “어릴 땐 나보고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내가 진짜 연기를 잘하는 줄 알았어요. 십 몇 년 공백 다음에서야 내가 못한다는 걸 알았어. 내 말소리가 들리고, 내 몸이 뜻대로 안 움직이고. 30대 말인데, 굉장히 처참했어요. 너무 심하게 바닥을 친 거지. 그때부터 정말 열심히 연습했어요.” 서서하는 연기면 서서 연습했고, 다림질을 하는 연기면 다림질을 하면서 연습했고, 시장에서 뼈를 토막 내는 연기라면 실제로 고기 뼈에 토막을 치면서 연습했다.

모든 대사와 행동이 몸에 배어서 그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그렇게 10여 년을 연기하고 나니 연기라는 일이 조금은 편안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배우로서의 마음가짐이 느슨해진 건 아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표현하는 데 정답이 있을 수는 없으니까. 완벽한 연기란 존재하지 않고 점점 더 많은 연기를 할수록, 나이가 들수록 어렵다. 이미 보여준 연기를 또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녀는 연기에 대해 언제나 필사적이다. 새로운 연기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 건 그 때문일지 모른다.

‘나는 윤여정이다’
윤여정은 전형적인 것을 싫어한다. 혼자서 아들 둘을 키우면서 너무 끔찍하게 엄마 노릇을 했는지는 몰라도 ‘국민 엄마’ 같은 역할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를 잘 아는 어떤 작가는 윤여정의 ‘엄마’는 대한민국이 잘 아는 다른 어떤 엄마들과도 다르다고 말한다. 그녀가 연기하는 엄마는 ‘답’을 아는 엄마가 아니라 어떤 것이 ‘답’일까 고민하는 엄마이기 때문이다. 정해진 답은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찾은 답이 아닌 ‘정답’을 따라가야 할 때는 몸살을 앓기도 한다. 첫 번째 영화에서부터 그녀가 연기해 온 모든 역할이 사실 비전형적이었다.

이미 아는 것, 익숙해진 것, 남들이 다 한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윤여정’이 아니니까. 내가 아닌 것,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것은 크든 작든 ‘고맙지만 거절(No, Thank You)’한다. 더군다나 남과의 비교는 사절이다. 마치 그녀를 치켜세우는 양 “한국의 메릴 스트립이라고 불리는 기분은 어떤지” 묻는 질문에 윤여정은 미소 띤 얼굴로 이렇게 답했다. “그분과 비교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나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 배우입니다. 내 이름은 윤여정이고, 나는 그저 나 자신이고 싶습니다.”

예순을 넘어서면서 그녀는 자신에게 자그마한 ‘사치’를 허용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 것,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마음이 가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 배우라는 직업에 충실하게 하고픈 연기를 하겠다는 결단 앞에서 그녀는 말한다. “좋아하는 작가, 감독과 마음껏 작업하는 일이 내겐 사치다.” 사실 그녀는 저예산 영화를 싫어한다. 배우에게 저예산 영화란 눈에 훤히 보이는 고생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마음만 고생하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몸까지 고생할 수는 없다. 그녀는 이미 사서 고생을 할 나이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찍었고, <미나리>도 찍었다. 영화를 계속하고 싶은데 좌절한 감독에게 힘이 되고 싶고,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놓은 극본에 반해서, 자기 돈으로 비즈니스 티켓을 끊어서 섭씨 40도의 땡볕이 내리쪼이는 오클라호마로 날아갔다. 오래 고민하면서 망설이지만 일단 결단을 내리면 거침없이 나아간다. 믿고 시작한 일인데 발을 들이고 나서 아니란 걸 알았을 때, 어떻게 하느냐는 후배의 질문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참 심플하다. “해야지, 뭐. 다 잃는 것 같은데, 또 사람을 하나 얻어.”

한국 배우 윤여정으로 사는 법
윤여정은 아름다운 얼굴로 기억되는 배우가 아니다. 이른바 ‘리즈’라고 불리는 시절의 명성에 기대어 ‘전설’로 기억되는 스타도 아니다. 영화배우로서 윤여정의 제2의 인생은 오히려 2000년 즈음부터 시작됐다고 할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다시 시작한 연기에 대해 조금쯤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는 그 무렵이다. 쉰이 넘으면 하늘이 정한 내 운명의 뜻을 안다는데, 어쩌면 배우로서 사명을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던 것인지 모른다.

운명의 길을 깨달았기 때문인지, 또래의 다른 여배우들이 국민 엄마, 국민 할머니로 입지가 굳어질 때, 윤여정은 더더욱 다양한 역할로 연기의 폭을 넓혔다. 할리우드 워쇼스키 자매의 미국 드라마에서 비중 있는 역을 맡게 된 것도 50대 후반의 일이다. 이 글로벌한 배우를 품기에 대한민국은 너무 좁기라도 한 것처럼, 배우 윤여정은 노익장을 과시하며 세계로 날았다.

2010년에는 <하녀>로, 2015년에는 <돈의 맛>과 <다른 나라에서>로 ‘칸의 여인’이 됐고, 2016년에는 <죽여주는 여자>로 몬트리올 판타지아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2020년과 2021년에는 <미나리>로 영국 아카데미와 미국 아카데미를 비롯한 국제영화제 및 비평협회로부터 40여 개의 트로피를 획득했다.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 예능에 이르기까지 윤여정의 광폭 행보는 어떠한 예측도 불허하며 상상을 초월한다. 그 결과들이 배우 자신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사람은 결심하는 게 아닌가 봐.” 좋아하는 작가, 좋아하는 감독과 마음이 가는 작품만 순서대로 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인 모양이다. 일흔이 넘은 지금, 그녀는 배우 인생에서 가장 바쁜 순간을 숨 가쁘게 지나고 있다. <미나리>의 아카데미 캠페인을 위해 하루에 7~8시간씩 미디어와 끊임없이 인터뷰를 진행해야만 했고, 그 결과 심지어 외국 인터뷰만 접수하고 한국 언론의 인터뷰는 거절한다는 애먼 소리까지 들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던 날 밤, 로스앤젤레스(LA) 한국 총영사관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한 손에 와인글라스를 든 채 다소 상기된 얼굴로 인터뷰에 답하던 윤여정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해명했다.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제가 한국말로 인터뷰하는 거 좋아하지, 영어로 인터뷰하는 거 좋아하겠어요? 한국말 저 너무 잘 하잖아요. 제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오해를 좀 풀어달라고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지금 이 나이에 어디 가서 살겠습니까? 한국에서 살아야지.”

배우로서 그녀는 남다르게 뛰어난 외모도, 목소리도, 콧날 하나도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부족한 것투성이라고. 그 부족함이 오히려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덧붙인다. 부족했기 때문에, 그 열등감을 극복하려고 더 열심히 했고, 이제 더 이상은 반짝반짝한 젊음을 갖고 있지 않기에 또 더더욱 열심히 나아가고 있다. 시상식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온 그녀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 하던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화려한 꾸밈이 없는 네이비 컬러의 드레스와 대조적으로 돋보이는 오스카 트로피를 보면서 영화 <여배우들>의 대사가 떠올랐다. “기억이 있는 한, 대사를 외울 수 있는 한,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문현선 세종대 공연·영상·애니메이션 대학원 초빙교수 | 사진 한국경제DB

문현선 교수는
세종대 공연·영상·애니메이션 대학원 초빙교수. 인문연구모임 문이원 연구원이자 이야기 공작소 파수(破守) 스토리텔러 & 캐릭터 프로파일러다. <무협>, <삶에서 앎으로 앎에서 삶으로>를 썼고, 다수의 동양고전과 중국 문학을 우리 글로 옮기고 풀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통해 ‘사람’을 이해하는 작업에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문턱이 낮은 인문학’, ‘알고 싶어지는 인간학’을 향한 모험을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