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를 선도한 유럽의 두 도시 런던과 파리에는 19세기에 지은 큰 기차역들이 있다. 위대한 발명품인 기차가 머물고 다양한 사람들이 군중을 이루는 곳, 기차역 플랫폼은 당시 예술가들에겐 창작의 영감을 얻는 생생한 체험의 장소였다.
윌리엄 파웰 프리스, 기차역, 1862년, 런던 로열 컬렉션 트러스트
윌리엄 파웰 프리스, 기차역, 1862년, 런던 로열 컬렉션 트러스트
1830년 리버풀 역 개통을 시작으로 영국과 유럽 대륙의 대도시에는 대규모 기차역이 속속 세워졌다. 도시들을 연결하는 철도의 기점이자 종착역인 그 역들은 이동의 신속함과 편리함이라는 기능뿐 아니라 여행의 낭만에 대한 꿈과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역 건물은 성당 건축처럼 웅장하게 설계해 전통적 미감을 주고, 장거리 여행객을 위한 호텔의 기능까지 겸하도록 했다. 반면에 열차를 타고 내리는 플랫폼 공간은 첨단 건축재인 철골과 유리를 사용해 넓고 밝게 실용적으로 지었다. 그곳은 교차하는 철도, 기관차가 뿜어내는 증기와 소음, 몰려드는 군중으로 활기가 넘쳐났다.

런던 패딩턴 역의 플랫폼
빅토리아 시대인 19세기 중엽, 발전하는 영국 런던의 기차역을 가장 잘 묘사한 그림으로 윌리엄 파웰 프리스(William Powell Frith, 1819~1909년)의 <기차역>이 있다. 런던 북서부에 위치한 패딩턴 역을 그린 그림이다. 프리스는 기차가 출발하기 전 사람들로 붐비는 플랫폼을 묘사했다.
열차의 형태처럼 가로로 긴 화면에서 위쪽 절반은 건축물이 차지한다. 철골 구조가 아치형으로 반복되며 지붕을 이루고 가느다란 기둥들이 경쾌하게 받치고 있다. 넓은 지붕에는 유리가 덮여 비바람을 막고 햇빛은 투과한다. 그림에서 건축 구조가 압도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마치 최신 건축술을 자랑하고 기차의 발명을 찬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그림 아래쪽 절반은 군중으로 가득 차 있다. 기차를 타려는 사람, 배웅하는 사람, 역무원, 경찰, 상인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다. 화가는 그 한가운데 본인과 가족을 그려 넣었다. 화면 중앙의 둥근 조명등 바로 밑에 갈색 외투와 모자를 착용하고 정면을 향해 서 있는 남자가 바로 프리스 자신이다. 그의 아내는 학교로 떠나는 작은아들에게 입맞춤을 하고 있다. 큰아들은 나비넥타이 정장에 회중시계를 차고 아버지처럼 의젓하게 서 있다. 그는 이제 시간을 잘 지키며 규율을 따르는 어른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가족이 이루는 삼각형에서 꼭대기를 차지하는 화가의 자화상은 가장의 권위와 의무를 가리킨다. 가문을 번창시키고 가족을 부양하며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이 가정에서 남자의 역할이다.
화가 바로 옆에서는 한 남자가 다른 커플과 거래를 하고 있다. 팔을 뻗어 돈을 보여주는 그 남자는 택시운전사로, 어수룩한 외국인 부부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있다. 이 불량하고 아둔하며 정체 모를 그룹은 안정된 질서를 가진 영국인 부르주아, 즉 화가의 가족과 나란히 놓여 대비를 이룬다.
선과 악의 대조는 오른쪽에 더욱 극명하게 묘사돼 있다. 막 결혼식을 올린 신부가 신랑과 행복한 삶을 시작하러 떠나면서 들러리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 그룹이 그림에서 가장 밝은 부분이다. 그 옆 오른쪽 끝에서는 정반대로 어두운 장면이 펼쳐진다. 범죄자가 기차에 오르려는 순간 사복 탐정들이 다가와 즉시 체포한다. 사회의 위험 요소를 탐지하고 제거하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이 잘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화면 왼쪽에는 기차를 놓칠까 봐 서두르는 가족이 보인다. 여기 모인 각양각색의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같은 열차를 탄다는 공통점이 있다. 항상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는 기차는 사람들에게 정확한 시간관념을 심어주고 통합된 규율에 따라 규칙적으로 활동하도록 생활을 변화시킨다. 프리스는 사진을 이용한 사실주의 기법으로 인물과 건축물과 일상적인 모습들을 상세히 묘사했다. 기차역을 무대로 산업혁명의 성과를 기념하며 개인의 도덕심, 가정의 미덕, 사회적 규범을 중시한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관을 전달한다.
클로드 모네, 생 라자르 역, 1877년, 파리 오르세미술관
클로드 모네, 생 라자르 역, 1877년, 파리 오르세미술관
파리 생 라자르 역의 플랫폼
프리스가 기차역을 사실적으로 우아하게 묘사한 반면, 파리의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는 전혀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모네는 안개나 연기에 작용하는 빛의 효과를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퍼뜩 떠올린 것이 기차역이었다. 파리 북부에 생 라자르 역이 새로 생겼는데 거기 가면 기관차가 내뿜는 짙은 연기와 증기를 그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모네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허가를 받으려고 역장을 만난 일은 재미있는 일화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역에 찾아가 예술계의 명사처럼 당당하게 협조를 부탁했다. 햇빛이 더 나은 시간에 그릴 수 있도록 열차를 30분 지연시키고 기차에서 증기가 많이 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역장은 모든 열차를 정지시킨 후 플랫폼을 청소하고 기관차에 석탄을 가득 채워 연기와 증기가 최대한 많이 발생하게 했다. 예외적인 대우를 받으며 모네는 <생 라자르 역>을 12점이나 연작으로 그렸다. 하나의 그림에 많은 정보를 상세히 담기보다는 시점과 시간을 조금씩 변화시켜 신속하게 여러 점을 제작했다.
연작 중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된 <생 라자르 역>은 철골과 유리로 된 현대식 플랫폼을 보여준다. 높고 넓은 삼각형 지붕이 선명한 대칭 구도를 이루며 화면 윗부분을 감싸고, 그 밑의 철도와 기차가 있는 밝은 야외 공간으로 시선을 이끈다. 교차하는 여러 갈래 철도 한가운데서 검은 기관차가 출발을 준비한다. 기관차에서 치솟은 연기가 햇빛을 받아 푸른색을 띠며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기관차 양옆으로 하얀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다른 곳에서도 여기저기 증기구름이 하얗게 퍼져 나간다. 눈부신 빛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연기와 증기의 운무 속에서 건물도 기차도 사람도 모두 형상이 흐려져 겨우 윤곽을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모네는 기차역에서 근대사회의 시스템이나 일상의 규범 같은 것보다는 빛, 색채, 시점, 분위기 등 회화의 조형성을 결정하는 요소들을 찾아냈다.
1877년 인상파 전시회에서 <생 라자르 역> 연작을 본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년)는 큰 감동을 받고 미스터리 소설 <인간짐승>을 쓰게 된다. 기차를 배경으로 남녀의 애증관계에 얽힌 살인사건을 다룬 것이다. 졸라는 포효하며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시커먼 철마에서 인간의 폭주하는 동물적 본능을 발견했다. 모네가 빛, 연기, 증기가 이루는 순간적인 효과를 객관적 시선으로 포착해 정확히 묘사하려 했듯이, 졸라는 인간의 심리를 날카롭게 관찰하고 냉정하게 파헤쳐 추악한 본성까지도 들춰내려 했다. 예술가의 눈에 기차역은 해부대처럼 인간과 자연과 사회의 객관적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는 곳으로, 그 자체가 도시의 플랫폼이었다.

글·사진 박은영 서울하우스 편집장·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