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여성복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기지개만 켜도 찢어지는 블라우스, 장식으로 전락한 페이크(fake) 주머니, 세탁 한 번에 7부로 줄어드는 바지. 우리가 흔히 입는 여성복의 만듦새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사실에 크게 방점을 찍은 사람이 있다. 젠더리스 의류 브랜드 퓨즈서울의 김수정 대표다. 김수정 퓨즈서울 대표는 어릴 때부터 옷 만드는 걸 좋아해 일찌감치 패션 산업의 길을 걸어 왔다. 젊은 나이에 여성복 쇼핑몰을 차려 탄탄대로를 걷던 김 대표가 여성복에 대해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 계기는 사소했다. 남동생 바지를 우연히 입어본 어느 날, 마치 옷을 입지 않은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낀 것이다.이 일을 계기로 김 대표는 여성복과 남성복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일일이 비교해보기 시작했다. 남성복의 가장 큰 특징은 ‘착용자가 활동성이 많은 사람’이라는 전제를 두고 제작된다는 점이었다. 반대로 여성복은 활동성보다는 실루엣을 잘 살리는 옷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불편함이 동반된다.
여성복과 남성복의 차이는 젠더리스 의류 브랜드 퓨즈서울을 론칭하면서 더욱 절절히 느끼게 됐다. 남성복 재킷에 기본으로 달리는 주머니를 여성복 재킷에도 동일하게 넣으려면 더 많은 추가 공임비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비교적 흔한 차별이다. 원단부터 가공법, 봉제법, 사이즈에 이르기까지. 김 대표의 퓨즈서울 론칭 과정은 패션 시장의 여성복 차별적 관행과 싸우는 ‘분투기’에 가깝다.
성공적으로 의류 쇼핑몰을 운영하다가, 새롭게 젠더리스 브랜드를 만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요.
사실 처음에는 주변에서 다 말렸어요. 요즘은 젠더리스라는 개념이 뜨겁지만, 당시에는 이런 개념이 없었거든요. ‘그거 그냥 남녀공용 아니냐’, ‘그런 옷 잘 안 팔린다’는 회의적인 반응이 많았죠. 더군다나 기존에 운영하던 업체를 두고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 자체가 큰 모험이었어요. 처음에는 기존 쇼핑몰에서 작은 라인업으로 선보였는데, 그 옷들이 입소문을 타면서 매출이 꽤 나왔어요. 그걸 보면서 ‘소비자들의 니즈가 이만큼 있었는데 시장이 채워주지 못한 거구나. 그럼 내가 이 브랜드를 따로 내서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때 젠더리스 의류에 대한 소비자 니즈를 확 느꼈던 것 같아요.
최근 출간한 책 <여성복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에는 퓨즈서울 론칭에 얽힌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더라고요. 특히 여성복 시장 특유의 불합리한 측면을 강조하셨는데, 책은 어떤 계기로 쓰게 됐나요.
원래는 제가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서 많이 이야기하던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인터넷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다 보니 나중에는 다 휘발되더라고요. 출처 없이 불분명하게 떠도는 정보가 되기도 하고요. 이 내용을 한 번쯤 글로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고 느끼던 찰나에 출간 제의를 받아 책으로 남기게 됐습니다.
여성복은 남성복보다 저렴한 원단과 봉제로 제작하는 경우가 많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어요. 정말 그런가요.
패션계에는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어요. 남성복은 좋은 원단을 쓰고 봉제도 꼼꼼히 하다 보니 마진이 별로 안 남거든요. 그래서 이 부족한 마진을 여성복에서 채운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실제로 제조·유통 일괄(SPA) 브랜드 7개를 비교해봤어요. 겉에서 보면 똑같은 컬러의 슬랙스인데, 남자 원단은 TR이고 여자 원단은 폴리에스테르였어요. TR이 폴리에스테르보다 가격대가 높고 착용감도 좋거든요. 사실 소비자는 컬러와 디자인이 똑같으면 동일한 제품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결국 남성복과 여성복에 다른 원단이 쓰인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소비하게 되는 거죠.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듣는 분들은 왜 그런 건지 이해가 안 갈 것 같은데요. 이유가 뭔가요.
의복 역사를 살펴보면, 여성들이 드레스를 입고 다니던 시절부터 여성복은 사치품에 해당됐어요. 반면 남성복은 산업혁명을 지나면서 좀 더 합리적으로 바뀌었죠. 또 요즘은 여성복 시장에 패스트패션이 많다 보니 너무 비싸게 책정하면 사람들이 구매를 잘 안 하잖아요. 판매가를 낮게 책정하려면 더 저렴한 원단으로 제작해야 하니까 점점 더 질이 낮아질 수밖에 없는 거죠.
같은 사이즈와 디자인이라고 해도 ‘여성용’이라고 밝히고 제작하면 공장에서 2000원을 더 받았다는 에피소드도 있던데요.
저도 너무 충격적인 일화였어요. 남성복은 보통 단추가 오른쪽에, 여성복은 왼쪽에 달려 있는데요. 원단과 패턴, 모든 것이 동일한 옷인데도 단지 단추 방향이 여성용이라는 이유만으로 제작 단가를 2000원 더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 이후로 저희는 공장에 ‘키작남(키 작은 남자)’ 브랜드라고 이야기하고 옷을 제작해 왔어요. 지금은 여밈 방향도 남성용으로 제작하고 있고요. 그렇게 해야 더 잘 만들어주더라고요. 브랜드를 처음 론칭했던 때와 지금의 상황을 비교해보면, 제작 환경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진 않았어요. 패션계가 겉으로 보기에는 빠르게 유행을 선도하는 곳 같잖아요. 그런데 어떤 측면에서는 굉장히 고지식합니다. 정말 보수적이에요. 더군다나 공장 관계자 분들이 연세가 있다 보니, 기존 관행을 쉽게 안 바꾸려고 하시더라고요.
여성복 프리사이즈가 점점 작아지는 현상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갖고 계신 것 같아요. 업계 입장에서는 적은 원단으로 더 많은 옷을 만들 수 있고, 재고 관리도 용이한 시스템이라던데요.
소비자들이 저희 브랜드에 가장 많이 컴플레인을 하는 부분이 ‘기장이 길다’거나 ‘사이즈가 크다’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저희 옷이 너무 길고 큰 게 아니고, 시중 여성복이 너무 짧고 작은 거라고요. 저희 브랜드 S사이즈가 허리 28인치 기준이거든요. 시중 여성복의 S사이즈는 24인치예요. 그런데 이 사이즈가 정말 작거든요. 그동안 여성 소비자들이 지나치게 작은 옷을 입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미디어에서도 마른 여성들이 계속해서 노출되잖아요. 그런 부분을 고객들에게 말씀드리며 설득하고 있죠. 해외 여성복 시장은 사정이 좀 나은가요.
해외 브랜드도 차별적 관행이 심합니다. 앞서 직접 조사해봤다고 말씀드린 7개 SPA 브랜드 중 절반이 외국 브랜드거든요. 여성용 옷에는 주머니가 2개만 있는데, 남성용에는 4개씩 들어가 있는 식이에요. 예전에 틱톡에서 외국 여성이 남자 바지에는 소지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테스트해보는 영상을 올려 화제가 된 적이 있어요. 남성용 주머니에서 소지품을 꺼내다 보니 책상을 한가득 채우는 내용이었죠. 해외에서도 이 문제를 인지는 하고 있지만, 문제의식을 갖고 고쳐야 된다는 생각까지는 안 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여성복 시장의 불합리한 제작 관행이 사라질 수 있을까요.
여성 소비자들이 질 좋은 옷을 한 번 입어 보면, 이전처럼 질 나쁜 여성복을 다시는 안 입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사람 입맛도 그렇잖아요. 고급스러운 걸 먹다 보면 그보다 못한 음식은 잘 안 먹게 되기 마련입니다. 많은 여성들이 더 질 좋은 옷을 겪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애초에 질 좋은 옷을 입어본 경험이 적으면, 어떤 옷이 질이 좋고 나쁜지 알 수 없잖아요. 또 다른 선택권을 하나 주는 거죠. 소비자들이 그걸 알게 되는 순간 시장에도 많은 변화가 올 거라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불합리한 여성복을 소비한 것에 대해 자책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어떤 의미인가요.
여성 소비자들이 불필요한 자아성찰 때문에 자괴감을 쉽게 느낀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유행에 복종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티셔츠를 사러 갔는데 시장에 전부 크롭티밖에 팔지 않는다면 크롭티밖에 못 사는 거잖아요. 그런 식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소비자들은 이런 불합리한 관행에 대해 듣고 나면 자책을 하시더라고요. ‘그동안 질 나쁜 옷에 돈을 썼던 나 자신을 때린다’고 하면서 자책을 하세요.(웃음)
옷을 만들어내는 곳은 기업인데, 기업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한테 손가락질하는 게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살면서 다른 걱정거리도 많잖아요. 불합리한 시장을 개선하는 건 제 몫이니까 여러분들은 그냥 응원만 해달라는 의미에서 ‘자책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차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항상 달리는 댓글이 ‘여성복 시장이 이렇게 된 건 여성 소비자들이 그렇게 소비해 왔기 때문이야’라는 내용이거든요. 여성복이 이렇게 질이 안 좋아진 것은 결국 소비자 탓이라는 식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거죠. 저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다 기업이 만들어낸 결과거든요. 처음 퓨즈서울을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면 패션 산업의 분위기는 좀 바뀌었나요.
2018년만 해도 젠더리스라는 단어가 거의 없었는데, 해외 브랜드에서 젠더리스 컬렉션을 보여주기 시작하더라고요. 우리나라에도 젠더리스 브랜드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이제 하나둘씩 바뀌어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명칭만 젠더리스일 수도 있기 때문에, 여성복과 남성복을 동일한 퀄리티로 만드는지는 지켜봐야 알 것 같아요. 그래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요즘은 직원들과 그런 이야기를 해요. 우리나라에서 젠더리스가 주목받고 있으니, 우리가 이 카테고리를 아예 선점하자는 이야기요.
오프라인 공간을 만들 계획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네, 서울 상암동에 2022년 11월쯤 완공될 예정입니다. 겉보기에는 베이커리 카페지만, 다양한 여성들이 만날 수 있는 커뮤니티의 장을 만들고 싶어요. 그 안에서 퓨즈서울 제품도 경험해볼 수 있도록 하고요.
사업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사실은 오프라인 공간은 하나의 시작일 뿐이에요. 퓨즈서울의 최종 목표는 많은 여성들의 라이프스타일에 직접적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지금은 의류를 다루고 있지만, 추후에 열게 될 베이커리 카페는 ‘식(食)’에 속하는 셈이겠죠. 나중에 여성 전용 주거공간도 만들고 싶어요. 최종적으로는 정말 글로벌한 브랜드가 되면 좋겠죠. 그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해보려고 합니다.
글 정초원 기자 | 사진 서범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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