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초강력 '제재 폭탄'에 경제 초토화
러시아 경제가 미국 등 서방 국가의 ‘제재 폭탄’으로 초토화되고 있다. 루블화 휴지조각, 달러화 고갈, 물가 폭등, 최악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등 끝모를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는 모습이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의 초강력 제재 조치로 러시아 통화인 루블화가 휴지조각이 되고 있다. 최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의 한 쇼핑몰 2층에서 한 시민이 루블화 한 묶음을 공중에다 뿌렸지만 1층에 있던 사람들이 아무도 돈을 주우려고 하지 않는 동영상이 소셜미디어에 올라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 정부를 비롯해 주요 7개국(G7)이 러시아 주요 은행들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스위프트) 결제망에서 퇴출시키면서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고 있다. 러시아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9.5%에서 20%로 올려도 소용이 없는 상황이다.

SWIFT 퇴출 소식에 러시아 국민들이 달러를 찾으러 은행에 몰려들었다. 러시아 정부는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2월 28일부터 주식시장을 폐쇄했다.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물가가 폭등하고 있다. 미국 투자은행(IB)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러시아의 물가상승률이 올해 내에 20%까지 급등할 것으로 내다봤고, 영국 유력 싱크탱크인 국립경제사회연
구소(NIESR)는 20%보다 더 오를 것으로 관측했다. 러시아의 물가가 2001년 이후 20%대까지 상승한 적은 없었다.

러시아는 전체 국제 금융거래의 80%를 SWIFT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 재무부에 따르면 러시아 금융기관들은 전 세계적으로 하루 평균 460억 달러(55조 원) 규모의 외환을 거래한다. SWIFT 결제망 퇴출은 ‘금융 핵폭탄’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장 강력한 제재 조치다. 러시아 은행들은 SWIFT 결제망 퇴출로 달러가 고갈되고 있다.

미국 정부는 또 G7과 함께 러시아 중앙은행의 자산을 동결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중앙은행은 미국 등 해외에 보관 중인 외환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 마이클 번스탬 미국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연구원은 러시아의 전체 외환보유액은 6400억 달러(770조 원)인데, 4000억 달러는 뉴욕, 런던, 베를린, 파리, 도쿄 등 외국의 중앙은행이나 상업은행에 예치돼 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 중앙은행이 자국에 보관하고 있는 외환은 120억 달러이고, 나머지는 금 1390억 달러, 중국 국채 840억 달러 등이다. 국제 금융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SWIFT 결제망 퇴출보다 러시아에 더욱 타격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 등 첨단 기술 제품의 러시아 수출을 금지하는 제재 조치도 내렸다. 수출 금지 대상은 전자(반도체), 컴퓨터, 정보통신, 센서·레이저, 항법·항공전자, 해양, 항공우주 등 7개 분야의 57개 품목·기술이다. 미국 정부는 수출 금지 대상에 해외직접제품규칙(FDPR)을 적용했다. FDPR은 미국 정부가 자국 기술이나 소프트웨어 등을 활용해 제3국에서 생산된 제품을 자국산으로 간주하고, 제3국이 러시아로 수출할 때 자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미국 등 G7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비롯해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 발레리 게라시모프 총참모장 등 러시아 정부 지도부와 올리가르히(신흥재벌)까지 제재 대상에 올렸다. G7의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의 주요 인사들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에 2754명과 침공 이후 새로 지정된 2827명 등 총 5581명이나 된다. 이는 역대 제재 대상 가운데 단일 국가로는 최대 규모다. 지금까지는 이란 3616명, 시리아 2608명, 북한 2077명, 베네수엘라 651명이었다.

러시아 국가 위상, 북한과 같아지나
루블화 가치가 역대 최저 수준으로 추락하자 러시아 중앙은행은 3월 9일부터 루블화의 외화 환전을 6개월간 중단하고, 자국 은행에 개설한 외환 계좌의 현금 인출 한도액을 최대 1만 달러로 제한하고 있다.러시아 중앙은행은 또 외환 계좌의 돈은 표기된 외환 종류와 무관하게 달러로만 인출되며, 1만 달러가 넘는 인출액은 루블화로 자동 환전되는 조치를 내렸다. 그런가 하면 러시아 정부는 자국에 비우호국들에 대해 정부와 기업이 진 해외 채무를 달러가 아닌 중앙은행이 매달 1일 고시하는 환율을 기준으로 루블화로 상환하도록 했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현재 시장에서 평가받는 루블화 가치보다 자국 통화 가치를 60%나 높게 책정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3월 7일 자국에 대한 경제제재에 동참한 미국 등 G7과 EU 회원국들 및 한국, 호주 등 48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했다.

미국 정부는 또 석유, 천연가스, 석탄 등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금지하는 초강력 제재 조치까지 내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3월 8일 “우리는 푸틴의 전쟁에 보조금을 주는 일부가 되지 않을 것”이라며 “러시아산 석유, 천연가스, 석탄 수입을 금지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이번 조치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속하고 있는 러시아에 강력한 타격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러시아는 세계 2위 석유 수출국으로서 전 세계 석유 수출량의 11%를 담당하고 있다. 미국이 수입하는 석유 및 석유 제품 가운데 8%가 러시아산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자유를 지키는 데는 비용이 든다”면서 “이번 조치로 인해 석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 가격 상승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의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 금지 조치는 국제 유가와 미국의 휘발유 값 상승 등을 우려해 남겨뒀던 ‘최후의 제재’ 카드로 러시아의 돈줄을 차단하겠다는 의도다. 러시아의 수출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기 때문에 러시아의 외화 조달 수단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석유와 천연가스는 러시아 GDP의 무려 30%를 차지하고 있다.

EU는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가 높아 미국의 금수 조치에 동참하지는 않았다. EU는 천연가스의 40%, 석유의 25%를 러시아에서 수입하고 있다. EU의 2020년 러시아 수입 규모는 953억 유로(127조5247억 원)로 이 가운데 70%는 석유와 천연가스였다. 특히 EU의 최대 경제 대국인 독일의 경우 천연가스의 55%, 석유와 석탄의 40%를 각각 러시아에서 수입하고 있다. 대신 EU 집행위원회는 올해 말까지 러시아에서 수입하는 천연가스의 3분의 2를 줄이고, 2030년 이전까지 러시아산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도를 단계적으로 줄인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 정부는 G7, EU와 함께 러시아의 최혜국 대우를 박탈하는 조치까지 내렸다. 바이든 대통령은 3월 11일 러시아와의 ‘항구적 정상무역관계(PNTR)’를 종료한다고 선언했고, 러시아산 보드카, 수산물, 다이아몬드 등 사치품 수입을 금하고 올리가르히를 추가로 제재 명단에 포함시키겠다고 밝혔다.

PNTR은 미국과 무역에서 의회의 정기적 심사 없이 최혜국 관세를 적용받는 관계를 말한다. PNTR 종료는 러시아의 최혜국 지위를 박탈하고 고율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이다. 미국은 러시아의 26번째 무역 파트너다. 양국 간 교역 규모는 280억 달러(34조5000억 원)다.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들여오는 주요 수입품은 광물 연료, 귀금속, 석재류, 철광석, 철강, 비료, 무기, 화학물질 등이다.

러시아의 최혜국 대우 박탈로 러시아 제품에 대한 관세는 1930년대 제정된 ‘스무트-홀리 관세법’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러시아 수입품에 평균 59%, 최고 400%에 이르는 고율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 러시아에 대한 최혜국 지위 박탈은 국제 무역·통상관계에서 미국이 러시아를 파트너로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미국의 조치는 특정 산업이나 특정인이 아닌 러시아 경제에 대한 광범위하고 전방위적인 제재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는 미국 등 G7과 EU의 최혜국 대우 박탈로 국가 위상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관측된다.

블룸버그통신은 “러시아가 쿠바나 북한과 같은 나라가 될 것”이라면서 “쿠바,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이런 지위를 부여받은 적이 없다는 점에서 러시아가 국제 무역·통상 지위가 그만큼 낮아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러시아, 사면초가 상황…최악의 경제 추락
러시아 경제는 미국 등 서방의 잇단 ‘제재 폭탄’으로 최악의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무엇보다 러시아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이 분명하다. 국제금융협회(IFF)는 올해 러시아 GDP 증가율인 기존 예측치 3%에서 18%포인트 낮은 -15%에 달할 것으로 예측했다.

IFF는 “서방의 제재 때문에 러시아의 금융 여건은 급격하고 전례 없이 긴축될 것”이라며 “이는 심각한 경기 침체의 신호”라고 지적했다. IFF는 “전쟁이 더 길어지면 러시아산 에너지에 대한 보이콧이 더욱 확대될 것”이라면서 “이는 러시아의 상품과 서비스 구매력을 현저히 손상시켜 경기 침체를 심화시킬 것”이라고 내다봤다.

피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무디스 등 세계 3대 신용평가사도 러시아의 신용등급을 디폴트(채무불이행) 직전으로 모두 강등시켰다. 피치는 러시아 국채의 신용등급을 B에서 6단계 낮은 C로 내렸다. 피치의 신용등급에서 C는 디폴트 직전 단계를 말한다. 피치는 러시아의 우크라
이나 침공에 따른 서방의 제재로 러시아가 채무를 상환할 의지와 능력이 떨어졌다고 밝혔다.

S&P도 러시아의 신용등급을 기존 BB+에서 CCC-로 8계단 하향 조정했다. BB+는 투자부적격, CCC-는 투자하면 원금과 이자 상환이 어렵다는 등급인데, 국가부도를 뜻하는 등급인 D보다 두 단계 위다. S&P는 “앞으로 몇 주 안에 등급을 더 낮출 수도 있다”고 밝혔다. 무디스 도 러시아의 신용 등 급 을 Baa3에서 Ca로 10계단이나 강등시켰다. Ca 등급은 투자부적격 등급 중에서도 최하 등급으로, 밑으로는 통상 파산 상태를 의미하는 C 등급만 있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국제사회의 제재가 러시아의 경기 후퇴를 불렀고 심각한 불황 가능성에 직면했다”면서 “러시아의 디폴트 선언 가능성도 더 이상 불가능 한 시나리오는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는 그동안 밀월관계를 맺어 온 중국이 자국에 대한 지원에 나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지금까지 러시아에 대한 제재 조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중국이 러시아산 석유와 천연가스 구매를 늘릴 경우 서방의 제재 효과가 반감되면서 러시아의 피해가 줄어들 수 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중국 은행과 기업들이 러시아 제재 대상과 거래하지 못하도록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을 적용해야 한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세컨더리 보이콧은 제재 국가와 거래하는 제3국도 함께 제재하는 방안을 말한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우리는 어떤 나라가 경제 제재로 인한 러시아의 손실을 벌충해주는 것에 대해 좌시하거나 지켜보지 않겠다는 점을 중국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미국이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기술 분야에서 각국의 모든 기업이 따라야 하는 해외직접제품규칙(FDPR)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이 물러서지 않는다면 미·중 간 치열한 대결이 벌어질 수 있다. 아무튼 러시아 국민들은 푸틴 대통령의 위험한 도박과 야심 탓에 자칫하면 최악의 경제 상황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 분명하다.

글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사진 한국경제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