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 작가 <저주토끼>

저주토끼, 정보라 지음, 아작, 2022년 4월
저주토끼, 정보라 지음, 아작, 2022년 4월
[한경 머니 기고 = 윤서윤 독서활동가] 정보라 작가는 SF와 호러 판타지 창작으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특히 정 작가의 대표 소설집인 <저주토끼>는 올해 부커상 1차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저주와 복수에 대한 이야기를 풍부한 상상력으로 풀어낸 <저주토끼>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본다.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 이후 6년 만이었다. 부커상 후보로 우리나라 작가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과 작가 정보라의 <저주토끼>가 지목됐다. 최종 후보까지 올라간 작품은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였다. 이 소식을 접했을 땐, 한국 문학의 애독자로서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드디어 문학 시장이 더 넓어지고, 사람들도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될까 하는 기대가 컸다. 아쉽게도 2022년 부커상은 인도 작가 기탄잘리 슈리에게 돌아갔지만, 우리나라 문학이 세계에서 읽힌다는 생각만으로도 신났다.

<저주토끼>는 정보라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1998년 연세문화상 수상작 <머리>부터 2016년에 쓴 <저주토끼>, <안녕 내 사랑>까지 단편소설 10편을 묶었다. 작품은 복수를 주제로 하는 이야기가 대다수다. 시위가 취미라는 작가는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들을 소설을 통해 해소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위 현장에서 본 현실의 부조리를 토대로 일상의 공포를 환상이라는 장르로 풀어냈다. 무엇보다 텍스트 안에서의 차가운 공기의 흐름은 무더운 여름을 잊기에 최적이다.

표제작 <저주토끼>는 대대손손 저주를 내리는 집안에서 ‘저주술사’로 살던 할아버지가 자신이 내린 저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서 시작된다. 과거 할아버지의 친구는 술도가(양조장)로 성공했지만, “힘 있는 사람들하고 연줄이 닿지도 않고, 그런 연줄을 만들어줄 돈도 없다”(16쪽)는 이유만으로 사업에 실패한다. 경쟁사에서 친구의 회사가 ‘술에 공업용 알코올을 섞는다’는 소문을 만들어 망하게 만든 것이다. 이에 할아버지는 작은 ‘토끼 전등’을 만들어 친구의 앙갚음을 하게 된다. 이 토끼 전등이 경쟁사 사장에게 들어갔을 때만 해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손자가 ‘토끼 전등’을 발견하면서 저주의 속도는 가속화된다. 권선징악의 쾌감도 있지만 저주의 과정이 생생하다.

달이 어스름하게 구름에 가린 밤, 혹은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길거리의 가로등 불빛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밤, 자연의 빛도 인공의 빛도 모두 힘을 쓰지 못하는 어둡고 적적한 밤이면 할아버지는 창가의 안락의자에 나타나 토끼 전등을 켜고, 이미 몇 십 번이나 들려주었던 같은 이야기를 또다시 시작한다. 이어서 작품에는 이런 질문이 나온다.

“그것이 할아버지의 저주일까. 혹은 축복일까.”(32쪽)

이어지는 단편 <머리>는 머리의 형상을 한 물건이 화자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시작한다. 화자와 ‘머리’가 만나는 공간이 화장실이기에 화장실 가는 게 조금은 꺼려질 정도다. 머리를 무시하기 시작한 화자. 머리가 직장 화장실까지 나타나면서 심한 변비에 시달리고, 방광염도 생겼다. 이 때문에 병원에서는 제때 화장실을 가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일을 보는 아래에서 무언가가 자신의 오물을 받아먹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녀는 어느 화장실에서도 마음 놓고 갈 수 없었다”(42쪽)고 한다.

그렇게 사라지는가 싶었던 머리는 “어머니의 배설물은 또한 저의 일부이기도 하므로 어머니께서 어디에 계시든 저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44쪽)라며 그녀의 일상을 잠식한다. 머리를 없애려고 변기에서 뽑아내 비닐에 싸고 쓰레기통에 버렸지만, 머리는 다시 그녀 곁으로 온다. 머리를 지독하게도 버리고 싶어 하는 화자에게 가족들은 태평하다. “뭐, 그냥 내버려 둬요, 별것도 아니잖아?”라는 말이 합창이 돼 벽을 울리는 나날이 지속된다.

또 다른 작품 <몸하다>는 멈추지 않는 생리로 인해 6개월 동안 먹은 피임약을 끊자 임신을 하게 된다는 설정을 가졌다. 산부인과 의사는 “지금 같은 경우에는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서 임신이 된 게 아니기 때문에 남성 배우자가 없으면 태아가 제대로 분열하고 발육하지 못해요. 달걀에도 무정란이랑 유정란이 있는 거 아시죠? 같은 이치예요. 태아가 제대로 발육을 못하면 임신이 정상적으로 진행이 안 되고, 그러면 결국에는 산모한테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요. 아시겠어요?”(89쪽)라며 결혼을 종용한다. 가족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적극적으로 아이의 아빠가 될 사람을 찾는다. 그러다가 가족은 공개 구혼까지 시도한다.

여기서 그녀가 만난 남자들의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의 민낯을 보여준다. 돈이 없어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전화하게 됐다는 남자, 자신과 자고 나서 애를 뱄다고 동네방네 퍼뜨리겠다며 1000만 원을 준비하라고 협박하는 남자, 모 기업의 대표인데 남자아이만 낳아준다면 모든 것을 해주겠다는 할아버지까지. 요즘 세상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소설집 속 10편의 작품이 모두 현실 문제를 환상에 기대어 그려낸다. 화자들이 하는 복수는 현실에서는 시도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더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잔인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화자들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기에 쓸쓸하게 보이기도 한다.

작가 또한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326쪽)고 밝힌다. 힘든 세상에서 고군분투하며 작게나마 위안을 느끼고 싶은 독자라면 여름휴가에 <저주토끼>를 들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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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서윤 독서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