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조에 육박한 퇴직연금 시장이 격변기를 맞았다. 특히, 지난해 10월 말부터 퇴직연금 실물이전이 시행되면서 금융사들은 관련 고객 유치를 위해 전력을 쏟고 있다.

[커버스토리] 퇴직연금
한 직장인이 금융사 상담 창구에서 퇴직연금 유형별 차이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한국경제
한 직장인이 금융사 상담 창구에서 퇴직연금 유형별 차이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한국경제
퇴직연금이 금융 시장의 격전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고령화로 인한 노후 대비 수요 증가, 정부의 퇴직연금 활성화 정책(디폴트옵션 도입 등), 그리고 올해 기준금리 인하로 은행권의 성장 정체가 예상되면서 금융사들은 새로운 수익성 확대 전략으로 퇴직연금에 사활을 건 모습이다.

무엇보다 지난해 10월 31일부터 ‘퇴직연금 실물이전’까지 가능해지면서 금융권의 ‘머니 무브’가 가속화됐다. 퇴직연금 실물이전은 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의 퇴직연금 가입자가 상품을 매도하지 않고 그대로 다른 금융 회사 계좌로 옮길 수 있는 제도다. 예금 상품 보유자라면 중도해지 없이 약정이율을 받을 수 있고, 손실을 보고 있는 투자 상품도 이전을 위해 과거처럼 매도할 필요가 없어졌다. 동시에 약 400조 원 규모의 퇴직연금 시장을 놓고 은행·보험·증권 업계 간 경쟁에 불이 붙었다.

‘수익률’ 입증한 증권사들의 질주

최근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은 400조 원을 넘겼다. 지난 5년간 보인 가파른 증가 추세를 바탕으로 10년 안에 1000조 원을 돌파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퇴직연금 적립금은 2018년 190조 원, 2019년 221조 원, 2020년 255조 원, 2021년 295조 원, 2022년 335조 원, 2023년 382조 원으로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왔다. 이런 흐름에 맞춰 금융사들은 시장 선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앞다퉈 자사만의 특화된 상품과 서비스를 내놓고 있다.
은행에서 증권·보험사까지… 퇴직연금 ‘무한경쟁’
은행에서 증권·보험사까지… 퇴직연금 ‘무한경쟁’
퇴직연금 실물이전과 함께 가장 두드러진 성과를 보인 업계는 증권사다.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퇴직연금사업자 42곳(은행 12곳·증권사 14곳·생명보험사 10곳·손해보험사 6곳)의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과 개인형퇴직연금(IRP) 원리금 비보장형 퇴직연금 수익률을 분석한 결과, 증권사들이 상위권에 대거 포진됐다.

특히 주목할 점은 IRP 부문 수익률 상위 15개 사 중 절반 이상인 8개 사(미래에셋증권·삼성증권·NH투자증권·한국투자증권·신한투자증권·대신증권·KB증권)가 증권사로 나타났다. 퇴직연금 내 상장지수펀드(ETF) 매매가 활발해지고, 증권사들은 높은 수익률로 투심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은행에서 증권·보험사까지… 퇴직연금 ‘무한경쟁’
아울러 퇴직연금 실물이전 이후 DC와 IRP 부분에서 가장 적립금이 많이 늘어난 곳도 미래에셋증권으로 나타났다.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미래에셋증권의 퇴직연금(DC+IRP) 적립금은 20조9148억 원에서 4분기 22조8887억 원으로 1조9719억 원 늘었고, 그 뒤를 신한은행(1조8804억 원), 하나은행(1조7506억 원), KB국민은행(1조7104억 원), IBK기업은행(1조2308억 원) 순으로 나타났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최근 퇴직연금 트렌드는 길어진 노후와 치솟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적극적인 관리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면서 가입자들이 본인이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DC 및 IRP 계좌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며 “로보어드바이저와 같은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한 투자 전략이 주목받는 추세”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ETF를 활용해 퇴직연금 상품을 운용하려는 가입자가 많아지면서, 실시간 ETF 거래가 가능한 증권사로 퇴직연금을 이전하려는 수요도 증가하고 있다”며 “과거에는 퇴직연금이 상대적으로 저관여 자산으로 여겨져 접근성이 용이한 은행 중심으로 수요가 몰렸지만, 현재는 상품이 다양하고, 관리하기 편한 전문적인 기관인 증권사로 머니 무브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퇴직연금, 로보어드바이저 각축전으로

또한 증권사들은 로봇·인공지능(AI)을 활용한 상품 추천 시스템인 ‘로보어드바이저(RA)’ 등을 선보이며 경쟁력 강화에 나섰다. RA는 ‘로봇(Robot)’과 ‘투자전문가(Advisor)’의 합성어로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알고리즘을 구성해 투자 전략을 제시하는 서비스다. 고객이 입력한 정보를 바탕으로 투자자 성향별 포트폴리오를 생성하고 적립금을 일임해 운용하는 역할을 한다.
혁신금융서비스 지정으로 그동안 허용되지 않던 퇴직연금 RA 일임 서비스를 IRP에 한해 운영할 수 있게 됐다. 혁신금융서비스 사업자로 선정된 증권사들은 올해 중 퇴직연금 RA 일임형 상품 출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증권 업계 퇴직연금 적립금 1위인 미래에셋증권이 대표적이다. 미래에셋증권은 모델 포트폴리오(MP) 구독, 로보어드바이저, 개인연금랩 등과 같은 포트폴리오 서비스를 연금 계좌에서 스스로 투자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던 고객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고객들이 성공적으로 자산을 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또 기존 퇴직연금 계좌에서만 가입이 가능했던 로보어드바이저 서비스를 개인연금에서도 선보이며 디지털 플랫폼을 강화하고 있다.
은행에서 증권·보험사까지… 퇴직연금 ‘무한경쟁’
미래에셋증권 관계자는 “RA는 복잡한 투자 결정을 대신해 고객의 투자 성향, 가입 시점, 그리고 현재 자산 상태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최적화된 포트폴리오를 자동으로 추천하는 서비스”라며 “많은 고객이 이 서비스에 높은 신뢰와 호응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출시된 당사의 개인연금 로보어드바이저 서비스는 출시 이후 4000명이 넘는 고객이 서비스에 가입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증권은 퇴직연금 로보어드바이저 서비스 ‘연금S톡’을 통해 고객의 위험 성향, 연령, 소득 현황에 맞춘 맞춤형 포트폴리오를 제공한다. 이 서비스는 상품별 투자 성과를 기반으로 다양한 자산군에 분산투자를 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어 안정성과 수익성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으며, 로보어드바이저의 알고리즘이 지속적인 성과 분석과 리밸런싱을 지원하며, 고객의 퇴직 자산을 효과적으로 관리한다.

KB증권은 오는 상반기 중 RA 퇴직연금 서비스를 공개할 계획으로 철저한 테스트와 업무 처리 절차 개선을 통해 고객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구축할 것이라 밝혔다. NH투자증권은 퇴직연금 RA 일임 서비스를 출시할 예정으로 외부 RA 전문 업체와 제휴를 맺어 투자 옵션을 제공할 예정이다.

은행권, 상품 늘리고 ‘특화 서비스’ 총력

은행권의 퇴직연금 전쟁도 치열하다. 은행들은 차별화된 전략으로 시장 우위를 점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의 퇴직연금 적립금은 178조7913억 원으로 전년 동기(155조3394억 원)보다 23조4519억 원 늘었다.

적립금 규모가 가장 큰 곳은 신한은행(45조9154억 원)이었고, 그 뒤를 국민은행 42조481억 원, 하나은행 40조2736억 원, 우리은행 27조989억 원, NH농협은행 23조4553억 원 순으로 집계됐다.
은행에서 증권·보험사까지… 퇴직연금 ‘무한경쟁’
특히 신한은행은 IRP 적립금이 약 3조300억 원 증가해 은행권 순증 1위를 기록했다. 지난해 말 기준 신한은행의 IRP 적립금은 15조6000억 원으로 나타났다. 신한은행은 은행권 최다인 190개 ETF 상품 라인업 구축, 신한 쏠(SOL)뱅크 ‘나의 퇴직연금’ 전면 개편, 영업점 무서류 IRP 신규 서비스 도입 등을 통해 고객 편의성을 높이고 새로운 고객 경험을 제공했다. 또한 2022년 은행권 최초 ‘퇴직연금 고객관리센터’를 오픈하고 은퇴 설계 전문 컨설턴트들이 33만여 고객에게 포트폴리오 중심의 자산 운용 및 수익률 관리를 위한 상담 서비스를 진행했다.

증가율 부분에선 하나은행이 가장 높은 수치로 조사됐다. 하나은행은 40조2736억 원으로 전년보다 19.5% 적립금이 늘었다. 증가액도 6조5748억 원에 달해 금융권 최대 증가율·증가액을 기록했다.

하나은행 측은 2021년 은행권 최초 퇴직연금 ETF 상품 판매, 2022년 은행권 최초 채권 직접투자 도입, 퇴직연금 전문 상담센터 ‘연금 더드림 라운지’ 전국 7개 거점 설치 등으로 고객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했다고 설명했다.

KB국민은행은 WM고객그룹 연금사업본부 내 ‘퇴직연금 수익률 개선 협의체’를 구성했고, 우리은행은 총 435개의 실적배당형 상품 라인업을 통해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고 있다. 전국 거점 168개 영업점에 연금전문가(PA)를 배치해 연금 자산관리 및 전문 상담을 지원한다.

NH농협은행은 상품 경쟁력 확보를 위해 9일 기준 ETF 총 105종, 펀드 총 528종까지 확대해 상품 라인업을 강화하는 등 퇴직연금을 둔 은행권의 진검승부는 지속될 전망이다.

한 시중은행의 프라이빗뱅커(PB)는 “은행 내부에서 퇴직연금 세일즈에 대한 중요도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면서 “PB들 역시 고객의 투자 성향과 재무 상황을 고려한 1대1 맞춤형 관리 등 세심한 자산관리에 집중해 퇴직연금 고객의 기반을 확대해 나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은행에서도 다양한 ETF 상품 등 투자 상품을 꾸준히 다변화한 만큼, 향후 금융기관 간 상품의 차이는 크지 않을 것”이라며 “앞으로도 금융권 내 퇴직연금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Interview
정효영 미래에셋증권 연금컨설팅본부장. 사진 = 서범세 기자
정효영 미래에셋증권 연금컨설팅본부장. 사진 = 서범세 기자
“DC·IRP 고성장 이어질 것…퇴직연금 의무화 필요”
정효영 미래에셋증권 연금컨설팅본부장


퇴직연금 실물이전이 3개월이 돼 간다. 성과가 어떤가.
“확실히 제도가 변화되니 퇴직연금에 대한 홍보가 많이 된 것 같다. 실제로 약 1만 명에 달하는 고객이 실물이전 이후로 당사를 찾아줬다. 이전 금액도 약 4700억에 달한다(1월 10일 기준).”

성과를 얻게 된 경쟁력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됐다. 우선, 그간 ETF 등 수익률을 앞세운 자사 브랜드 마케팅이 효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제 막 연금을 투자하겠다는 고객의 경우, 수익률에 관심이 클 수밖에 없는데 미래에셋증권이 쌓아 온 브랜드 전략 등을 바탕으로 선택해주신 것 같다. 동시에 고객의 성공적인 자산 운용을 위해 고객 성향에 맞춘 상품과 포트폴리오도 주효했다고 생각한다.”

올해 퇴직연금 시장 트렌드는.
“퇴직연금은 확정급여(DB)형, DC형, IRP 세 가지로 나뉜다. 2023년 말 기준 DB형이 6.7% 성장할 때 DC형과 IRP는 18%, 30%로 늘었다. DB형 대비 DC형+IRP의 고성장 추세는 올해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 배경에는 우리나라 저성장 문제가 작용한 측면도 있다. 경제 성장이 둔화하면 기업의 생산성이 떨어지고, 임금이나 퇴직금에 대한 부담도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DB에서 DC로 전환하는 회사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동시에 고용노동부가 최근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퇴직연금 의무 도입이다. 실제로 아직도 퇴직연금 의무가 중소기업이나 영세사업자까지는 돼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정작 기업이 갑자기 도산할 경우, 근로자가 퇴직금을 못 받는 위험이 크다. 따라서 정부의 방침대로 점차 중소기업들의 퇴직연금 의무 도입이 확산되면, DC형 연금 성장성은 더 커질 것 같다.”

투자 상품은 어떤 게 유망할까. 주목할 만한 ETF가 있다면.
“미국 지수 ETF는 올해도 주목할 만하다. 지금 글로벌 성장의 주역을 보면 미국을 따라갈 만한 곳이 없다. 따라서 미국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나스닥, 다우존스를 포함해 AI 산업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도 둬야 한다고 본다. 지금은 과거 인터넷이 태동했던 때와 같다. 아직 AI가 우리 일상생활에 크게 접목돼 있진 않아 보이지만, 머지않아 우리 삶에서 인터넷만큼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비중이 커질 수 있다. 비단, 그것이 현실로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만 계속해서 AI 관련 ETF 등 이 분야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지금도 충분히 투자에 접근할 만한 섹터라고 생각한다.”

퇴직연금이 보다 더 활성화되기 위해서 어떤 것들이 손질돼야 할까.
“제도 개선 측면에서 볼 때 가장 먼저 진행돼야 할 것은 앞서 말했듯 퇴직연금의 단계적 의무 도입이다. 2023년 말 기준으로 퇴직연금을 도입한 사업장의 비중은 26%에 불과하다. 여전히 많은 사업장의 근로자가 퇴직금 제도에 머물러 있어, 사업장 도산 시 퇴직금을 지급받지 못할 불확실성에 노출돼 있다. 두 번째는 퇴직연금의 연금화율을 높이는 것이다. 퇴직연금이 실제 근로자의 노후 소득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중간에 일시금으로 소진되는 비중이 90%에 육박한다.

매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DB·DC가 IRP로 의무 이전된 후 55세 이후 연금으로 수령하는 것이 의무화되는 것이 근로자의 노후 자산 확보 및 장기 투자를 통한 수익률 확보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또한 퇴직연금에서 일임을 통한 운용이 전면 허용돼야 한다. 퇴직연금의 수익률이 저조한 이유는 원리금보장형 상품으로의 과도한 쏠림현상 때문이다. 가입자가 직접 운용을 지시해야 하는 현행 제도에서는 연금 자산의 글로벌 자산 배분이 달성되기 어려운 구조다. 따라서 일임 서비스를 통해 전문가를 통한 자산 배분 운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