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도입된 지 1년이 지났지만 한국 증시는 여전히 ‘코리아 디스카운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흡한 주주환원과 열악한 지배구조가 핵심 원인으로 지적된다. 투명한 지배구조와 적극적인 스튜어드십이 한국 자본시장의 신뢰를 되찾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투자 인사이트]
그러나 투자자들의 기대감은 실망으로 바뀌었다. 오히려 밸류업에 대한 신뢰를 갖지 못한 개인투자자들은 ‘국장 탈출’에 나서는 모습이다. 지난해 미국 주식 거래대금은 전년 대비 87% 증가한 5100억 달러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반면 한국 증시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은 1년 전 수준으로 회귀했으며 일본과 대만 등 이웃 국가와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가치투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저민 그레이엄은 “단기적으로 주식 시장은 인기투표 기계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정밀한 저울과 같다”고 했다. 이는 주식 시장의 본질적인 역할 중 하나가 바로 가격 발견 기능을 수행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시장은 참여자 간 수요·공급의 상호작용을 통해 정보를 반영하고, 자산의 공정한 가치(fair value)를 결정한다.
이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기업들은 적절한 시점에 자본조달(IPO·유상증자 등)을 할 수 있으며, 투자자들은 공정한 가격에 주식을 사고팔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시장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이러한 기능은 왜곡된다. 대표적으로 기업 거버넌스(지배구조) 문제로 인해 신뢰가 흔들릴 경우, 주가는 기업의 본질적인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지속적인 저평가 상태에 머물 가능성이 커진다.
실증적 분석도 이를 뒷받침한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21년까지 10년간 45개국 상장 기업의 PBR에 가장 높은 설명력을 보인 요인은 주주 환원(37%)이다. 이어 재무적 특성(36%), 거시경제(13%), 기업지배구조(7%), 회계 투명성(4%), 기관투자가(4%) 순으로 나타난다.


물적분할·쪼개기 상장 논란
미흡한 주주 환원의 근본적인 원인은 열악한 거버넌스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지배주주의 과도한 영향력으로 인해 일반 주주의 이익이 침해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지배주주들이 소액주주들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주식 교환을 강요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지난해 한 대기업집단이 계열사를 인적분할해 새 회사를 설립한 뒤 이를 다른 자회사와 합병하는 지배구조 개편을 추진했다.
그러나 합병의 타당성과 시너지 여부를 떠나, 분할합병 비율 산정 방식 자체가 주주들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했다. 적자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지배주주의 지분율이 높은 합병 회사의 가치가 그룹 내 핵심 수익원인 분할된 회사의 가치보다 높게 평가됐기 때문이다. 비록 분할합병은 무산됐지만 지배주주의 결정만으로 소액주주의 지분이 강제로 희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사례는 한국 자본시장의 근본적인 신뢰를 훼손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물적분할을 통한 중복 상장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기업 공개 과정에서 여러 차례 논란이 제기된 ‘쪼개기 상장’은 모회사의 핵심 사업 부문을 물적분할 한 뒤 별도로 상장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해당 사업의 성장성을 보고 투자한 기존 주주 입장에서는 모회사 주식을 유지할 유인이 줄어들고, 신규 상장된 자회사의 주식을 취득하는 것이 더 유리한 선택지가 된다.
그 결과 모회사의 가치는 희석되고 주가는 본래 가치보다 저평가될 가능성이 커진다. 더욱이 분할 상장 이후 배당이 이루어질 경우, 모회사 지배주주의 수익이 줄어들기 때문에 기업은 이익금을 유보할 유인이 커진다. 이는 주주 환원 정책을 더욱 위축시키고, 장기적으로 주주 가치를 훼손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5년 제한이 오히려 면제부 역할
이러한 중복 상장 관행은 글로벌 주요 국가에서는 상대적으로 드물게 나타난다. IBK투자증권에 따르면 한국 증시에서 중복 상장된 기업의 비율은 약 18.4%로 일본(4.38%), 대만(3.18%), 미국(0.35%) 등과 비교해 현저히 높은 수준이다. 해외 주요국들이 주주 가치 보호 및 기업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더욱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은 유튜브를 자회사로 두고 있지만 별도 상장을 추진하지 않았다. 메타 또한 인스타그램을 분리 상장하지 않았다. 이는 미국 시장에서 주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강력하게 작동한 결과다.

반면 한국의 제도는 여전히 미흡하다. 여러 차례의 물적분할 논란 이후 "물적분할한 기업이 5년 이내에 상장하려면 기존 주주 보호 노력을 충실히 이행했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관련 규정이 개정됐지만, 5년 이후에는 별다른 제약 없이 상장이 가능해 사실상 면죄부를 제공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실제로 물적분할 후 5년을 경과한 기업이 특별한 주주 보호 조치 없이 상장을 강행한 사례도 발생했다.
이상 충실 의무 대상 '주주'로 확대되나
그리고 물적분할 사례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지주회사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자회사의 상장 계획이 최근 발표되며 모회사 디스카운트에 대한 우려가 다시 커진 경우도 있다. 이를 달래려는 그룹 차원의 해명과 주주 친화적 정책 발표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불신 분위기는 여전하다.
신뢰는 단기간에 형성되지 않으며,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자발적으로 회복되기 어렵다. 따라서 이를 보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수적이다. 우리가 롤모델로 삼고 있는 일본은 증시 밸류업을 위해 기업지배구조를 바꾸는 정책부터 시행했다. 하지만 우리는 핵심 문제를 개선하지 못한 채 기업 자율에 맡긴 기업공시나 밸류업 펀드 조성과 같은 곁가지 정책에 그치고 있다. 금융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보다 포괄적인 법적 장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상법 개정안을 둘러싼 다양한 의견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개정안의 핵심은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는 것이다. 이를 둘러싸고 찬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나,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신뢰 기반의 시장 환경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모두 이견이 없는 듯하다. 개정안의 통과 여부를 떠나 이번 논의에서 촉발된 다양한 의견들은 보다 투명하고 건전한 시장 환경을 마련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신뢰 회복을 위한 또 다른 중요 요소는 주주들의 적극적인 참여다. 주식은 단순한 금융 상품이 아니라, 기업의 주인이 이윤과 자산에 대해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주주(주인)와 경영자(대리인)의 이해관계는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이러한 주인·대리인 문제는 경영자가 주주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초래할 수 있다.
중요해진 기관투자가의 역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주주들이 기업 감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하지만 개별 주주의 감시 활동에는 상당한 기회비용이 따르므로 지속적인 참여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전문적인 리소스를 보유한 국내 자산운용사들의 적극적인 스튜어드십(stewardship)이 필요하다.
웹스터 사전은 스튜어드십을 ‘자신의 보살핌에 맡겨진 어떤 것에 대한 신중하고 책임감 있는 관리(the careful and responsible management of something entrusted to one's care)’라고 정의한다. 개인투자자들은 직접투자뿐만 아니라 뮤추얼 펀드나 상장지수펀드(ETF)를 통한 간접투자의 방식으로도 주식을 소유한다. 그리고 자금 운용을 위탁받은 운용사에는 소극적으로 주어진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최선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수탁 의무(fiduciary duty)도 존재한다.


벅셔해서웨이는 배당 대신 유보된 이익을 더 높은 자기자본이익률(ROE)을 나타내는 산업에 지속적으로 재투자했다. 그 결과 지난 45년간 벅셔해서웨이 주가는 연평균 19.2% 상승하며,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의 연평균 상승률(8.9%)을 100% 넘게 웃도는 성과를 기록했다.

무엇보다도 버핏과 그의 오랜 파트너인 찰리 멍거는 주주총회와 주주서한을 통해 투자 철학을 투명하게 공유하며, 자신들의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실수와 향후 계획을 솔직하게 설명해 왔다. 또한 버핏은 자신의 보수를 극도로 낮게 유지하고 사익을 추구하지 않는 태도를 고수해 왔다.
이러한 모습은 주주들에게 경영진과 주주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는 확신을 심어주었고, 주주들은 벅셔해서웨이의 주식을 장기적으로 보유하게 됐다. 이러한 신뢰의 축적이 결국 벅셔해서웨이의 기업 가치를 눈덩이(snowball)처럼 키우는 원동력이 됐던 것이다.
기업이 투명한 거버넌스를 위한 노력을 자발적으로 수행하며 주주와 신뢰의 토대를 구축한다면, 정밀한 저울은 이를 공정하게 평가할 것이다. 이는 해외 시장으로 떠난 개인 및 외국인 투자자들이 다시 한국 시장을 주목할 수 있는 강력한 트리거가 될 수 있다. 이를 통해 지속적인 기업 가치 상승을 믿는 장기 투자자가 증가할 수 있다면, 피터 린치가 말한 ‘텐배거 주식(‘10루타 주식’이라는 의미로 최소 매수가보다 10배 이상 오른 종목)’이 한국 주식 시장에서도 지속적으로 배출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석민 SC제일은행 투자전략상품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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