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주식시장은 경제적 비관론에도 불구하고 상승세를 보이며 재평가되고 있다. ECB의 금리 인하와 재정정책 확대가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반면 지정학적 리스크, 무역 갈등, 기술 경쟁력 부족이 지속적인 강세의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크다.

[투자 인사이트]
독일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 사진=연합AFP
독일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 사진=연합AFP
지난 2024년 9월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유럽의 현 상황과 정책 대안을 다룬 ‘유럽 경쟁력의 미래(The future of European competitiveness)’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 발표 이후 유럽의 구조적 저성장, 미국 및 중국과의 격차 확대 등 유럽 경제와 사회가 직면한 문제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과 함께 유럽 경제에 대한 우려가 확산됐다.

그러나 유럽 주식 시장의 성과를 살펴보면 이러한 비관적 전망과는 다른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2023년과 2024년 연속해서 경제가 역성장하며 ‘유럽의 병자’ 취급을 받아 온 독일 증시는 지난해 9월부터 올해 2월 말까지 20% 넘게 상승하며 주요국 증시 가운데 가장 높은 성과를 기록했다. 영국을 제외한 유럽 주식 전체로 보더라도 연초 이후 미국 및 선진국 주식 대비 성과 우위가 이어지고 있다.

유럽 증시 강세, 과거와 닮은 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식 가능성과 유럽의 정치적 불확실성 완화, 중국 딥시크 출현 이후 인공지능(AI) 외 부문으로의 주식 시장 관심 확산 등이 유럽 주식의 재평가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대외적으로 미국 우선주의 정책과 유럽 경기에 대한 비관론이 극에 달하며 ECB 및 각국 정부의 정책 지원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 점이 유럽 주식의 투자 심리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현재 유럽 주식의 밸류에이션은 최근 10년 평균 수준을 회복한 국면이다. 유럽 주식의 과거 강세 시기와 현재 상황을 비교하면서 유럽 주식의 추세적 강세를 위한 요건을 점검해본다.
재평가의 시간이 도래한 유럽
1999년 유로존 정식 출범으로 현재의 유럽 경제 모델이 구축된 이후, 글로벌 주식 대비 유럽이 강세를 보였던 구간은 크게 2003~2006년과 2012~2015년으로 나눌 수 있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60% 넘는 상승을 보였던 유럽 주식의 강세는 대외 수요 확대에서 기인했다.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해외 수요가 급증한 점이 유럽 경제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유럽의 대중국 수출은 2002년 약 500억 달러에서 2004년 800억 달러로 급증했다. 내부적으로는 2003년 1분기 유럽 경제성장률이 -0.6%로 역성장하며 경기 비관론이 팽배함에 따라 ECB가 6개월간 정책금리를 125bp(1bp=0.01%포인트) 인하하면서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펼친 점도 유럽 주식의 강세를 뒷받침했다.

2012~2015년 강세장은 2011년 유럽 재정위기 이후 유럽 경제와 시스템에 대한 의구심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마리오 드라기 당시 ECB 총재는 유로존 단일 화폐 제도를 지키기 위해 “뭐든지 하겠다(whatever it takes)”고 밝히며 유로존 경제 시스템에 대한 금융 시장의 우려를 완화시켰다. ECB가 예금금리를 마이너스로 내리는 파격적인 통화정책을 통해 유동성 지원에 나서면서, 과매도됐던 유럽 주식의 빠른 반등이 나타났다.
지난 2024년 9월 EU 경제 혁신방안을 담은 '유럽연합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를 발표하는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사진=연합신화
지난 2024년 9월 EU 경제 혁신방안을 담은 '유럽연합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를 발표하는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사진=연합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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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
유럽연합(EU)의 현재 위치와 경쟁력을 냉철히 진단하고, 자신들이 직면한 도전과 약점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자기성찰'의 성격을 담고 있다. 특히 미국과 중국과의 격차, 혁신과 기술에서의 뒤처짐, 에너지 및 안보 문제 등에서 내부의 취약성을 지적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향을 담고 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의 의뢰로 마리오 드라기 전 ECB 총재가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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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부양 의지 확고

강세 사이클의 빈도수가 적고 각각의 사이클에서 증시 상승을 주도한 요인이 상이하다는 점에서 유럽 강세장을 공통된 요인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만, 현재 상황과의 뚜렷한 유사점은 확인할 수 있다. 과거 두 번의 사이클과 현재 모두 경기 비관론이 우세한 가운데 ECB의 금리 인하 사이클로 완화적인 금융 여건이 조성된 경우다.

독일이 향후 10년간 5000억 유로의 인프라 투자 기금 편성과 재정 지출 확대를 강조하는 등 유럽 전반의 정책 부양 의지가 강하다는 점은 2012년의 사이클과 닮아 있다. 대외적으로 중국의 대규모 경기 부양 기대감이 높아져 있다는 점도 2003년 당시와 유사하다. 과거 강세장과 유사점은 단기 관점에서 유럽 주식의 상승 모멘텀을 지지할 것으로 예상한다.
재평가의 시간이 도래한 유럽
이러한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유럽 주식의 추세적 강세 전망에 의구심을 갖게 하는 몇 가지 차이점도 상존해 있다. 무엇보다 과거 증시 강세 국면에 앞서 나타났던 유럽 위기는 경제 부문에 국한됐으나 현재는 러시아의 군사 위협으로 유럽 전반의 지정학적 위험이 높아져 있다.

이러한 갈등은 유럽의 국방비 지출 증대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와 달리 유럽 국가들의 정책 역량이 경기 부양에만 집중되기 어려울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공격적인 재정 확대가 단기적인 투자 심리 개선에는 효과적이나 중장기 관점에서는 재정 악화에 대한 우려를 높이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미국과 관세 분쟁 역시 과거 강세장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차이점이다. 보호무역주의의 확산은 역외 무역 의존도가 높은 유럽 경제에 위협으로 작용한다. 유럽에서 미국으로의 수출 규모가 큰 상위 20개 품목은 2023년 기준 전체 유럽 수출액의 58%를 차지하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해당 품목에 대해 미국이 10~20%의 관세를 부과할 경우, 유럽 600개 대표 기업으로 구성된 유로스톡스 600 지수 영업이익이 3.3~6.6% 하락할 것으로 추정된다.

더 커진 유럽 외 매출 비중

유럽 주요 기업의 매출이 유럽보다 유럽 외 지역에서 많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도 글로벌 무역 분쟁에 대한 우려를 높이는 요인이다. 유럽 상장 기업의 유럽 외 지역 매출 비중은 2012년 39%였으나 2023년 약 60%까지 증가했다. 2024년 실적 발표에 따르면 LVMH(75%), 네슬레(79.4%), 슈나이더 일렉트릭(77.3%) 등 주요 기업들도 해외 매출 비중이 더 높다.

마지막으로 장기간 누적된 혁신 부족과 생산성 악화도 중장기 관점에서 유럽 경제와 주식 시장의 우려로 잔존해 있다. 최근 모멘텀이 둔화됐다고 하나 AI 기술 발전이 이끄는 산업 혁신 사이클은 현재 진행 중이다. AI뿐만 아니라 현재 기술 혁신을 주도하는 전기차, 자율주행 등 신산업에서 유럽은 미국과 중국에 뒤처져 있다.

부족한 혁신의 결과는 주식 시장에서도 관찰된다. 유럽 주식 시장의 경우 산업재와 금융, 명품의 비중이 높은 반면 정보기술(IT) 업종의 비중은 약 7%에 불과(2월 말 MSCI 지수 기준으로 미국은 30.5%)하며, 유로스톡스 600 지수의 시가총액은 미국의 대형 기술주 7개 기업으로 구성된 ‘매그니피센트 7(M7)’보다도 작은 수준이다.
재평가의 시간이 도래한 유럽
연초 이후 유럽 주식의 강세 현상이 과거와 같은 장기 국면으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지정학적 리스크의 완화, 확장적인 재정정책과 완화적인 통화정책 조합의 지속, 유럽 기업의 기술 경쟁력 강화 등이 요구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 유럽 경제가 당면한 과제를 인식하고 속도감 있는 정책 대응에 나서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속도감 있는 정책 대응 긍정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 기대감이 높아진 가운데 ECB는 5회 연속 금리 인하를 통해 경제를 지원하고 있다. 지난 2월 EU는 AI 인프라 구축을 위한 2000억 유로 규모의 투자와 관련 규제 완화를 발표하며 기술 경쟁력 강화를 강조했다. 특히 독일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09년 도입했던 균형 재정정책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 3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영국 런던의 랭커스터 하우스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관련 유럽 정상회의 전체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연합EPA
지난 3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영국 런던의 랭커스터 하우스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관련 유럽 정상회의 전체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연합EPA
유럽 경제가 2011년 이후 장기간 저성장과 저물가에 놓였던 것은 수요 부족으로 과감한 지출이 요구되는 상황에서도 재정 건전성 우려로 긴축적인 재정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럽 경제를 대표하는 독일의 재정정책 기조 전환은 유럽의 정책 패러다임 변화를 불러오는 마중물이 될 수 있다.

대외적인 지정학적 리스크와 내부적인 경기 불안은 올 한 해 동안 유럽식 경제 모델의 유효성을 계속해서 테스트할 가능성이 높다. 2011년 재정위기 이후 유럽의 성장률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인 정치경제적 분절화가 실행력을 낮추고 효율적인 투자와 생산성 향상을 방해했던 경험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번 위기에서 유럽 국가들이 경기 부양에 응집된 모습을 보여준다면, 유럽 경제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회복되고 유럽 증시가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 다시 주목받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종국 SC제일은행 투자전략상품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