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에 본사를 둔 파운드리 업체 SMIC는 중국 ‘기술력 자립’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 정부 차원에서 수조 원대 자금을 투입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핵심 기업이기도 하다.
[커버스토리] 중국판 M7-SMIC
이를 증명하듯 최근 SMIC는 눈에 띄는 성장세로 글로벌 시장 점유율 3위까지 올라섰다. SMIC의 지난해 매출은 80억30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27% 성장했는데, 이는 대만 TSMC(900억8000만 달러), 한국 삼성전자(약 130억 달러)의 뒤를 잇는 규모다. ‘반도체 불모지’에서 이제는 한국의 뒤를 바짝 추격하는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2000년 창업 이후 TSMC와 잇딴 악연
SMIC의 설립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업자는 ‘중국 반도체의 아버지’로 불리는 장루징(리처드 장)이다. 대만계 미국인인 장루징은 대만 국립대 기계공학과를 나와 미국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반도체 기업인 텍사스인스투루먼트에서 20년 동안 근무하게 된다. 미국, 일본, 대만, 이탈리아, 대만 등 20여 개의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며 반도체 관련 기술을 쌓았다. 특히 TSMC 창업자인 장중머우와 함께 일했던 인연은 유명하다. 동료로 호흡을 맞췄던 두 사람은 회사를 떠나 각각 창업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SMIC 설립 이후 기업의 역사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중국과 대만의 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며, 대만 정부가 대만인의 중국 반도체 산업 투자를 제한한 것이 장애물로 작용했다. 급기야 2005년에는 중국 본토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하기에 이르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장루징은 대만 국적을 포기했다.
SMIC가 겪었던 큰 위기의 순간마다 공교롭게도 TSMC와의 악연이 자리했다. TSMC는 2003년 SMIC를 상대로 특허 오남용 소송을 제기했는데, 재판 결과 SMIC가 1억7500달러를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어 2006년 합의 불이행으로 TSMC가 법원에 다시 소송을 제기했고, 긴 법정 다툼 끝에 SMIC는 지분 10%와 2억 달러를 TSMC에 배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 소송을 기점으로 SMIC는 극심한 재무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공격적인 인재 영입…기술 자립까지 박차
결국 2008년 국부펀드의 투자로 위기는 넘길 수 있었지만, 사실상 이 시점부터 SMIC는 중국 국유 기업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더불어 창업자인 장루징은 2009년 회장직에서 물러난다.
소송과 재무 리스크는 어느 정도 안정됐지만 문제는 회사의 미래를 책임질 기술력이었다.
SMIC의 기술력이 경쟁사를 바짝 추격하기 시작한 시점을 2017년경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SMIC는 글로벌 경쟁 기업의 반도체 인재를 흡수하며 기술적 역량을 키웠는데, 특히 2017년 TSMC 출신 양몽송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선임하며 기술 격차를 줄였다는 평이다. 양 COO는 TSMC를 거쳐 삼성전자 부사장으로도 근무했던 이력을 갖고 있다. 삼성전자가 TSMC보다 빠르게 핀펫(FinFET) 공정을 양산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그의 역할이 컸다는 분석이다. 양 COO의 합류 이후 2년 만에 SMIC도 핀펫 공정을 활용한 14나노미터(nm) 제품 양산에 성공했다.
문제는 미국 상무부가 중국의 반도체 자립을 막기 위해 관련 기술과 장비의 대중 수출을 수년 전부터 규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7나노미터 이하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려면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가 필수적인데, 2020년 이후로는 이 장비가 중국 내 기업에 들어가지 못했다.
기술적 고립이 오히려 중국 반도체의 저력을 끌어올린 것일까. SMIC는 구할 수 없는 EUV 장비를 대신해 구세대 버전의 심자외선(DUV) 노광 장비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DUV로 7나노미터 칩에 이어 5나노미터 칩까지 양산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업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물론 대량 양산은 또 다른 문제다. 이 방식으로 반도체를 생산할 경우 수율이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기적으론 수익성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반도체 수율은 생산 과정에서 작동 가능한 칩의 비중이 어느 정도 되는지를 따진 수치로, 버려지는 칩이 많을수록 수익성이 떨어진다.
다만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는 “화웨이가 SMIC에서 제조하는 인공지능(AI) 반도체의 수율을 1년 전 20%에서 40%가량으로 끌어올렸다”고 보도했다. FT는 “미국 제재에도 수율을 끌어올린 것은 AI 산업 자립을 위한 중국의 목표가 한 걸음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분석을 내놨다. 현재 SMIC는 화웨이 AI 칩을 위탁 생산하고 있는데, 수율을 올해 안으로 업계 표준인 60% 수준까지 높인다는 목표다.
미국의 제재로 인해 SMIC가 얻게 된 반사이익은 기술 자립 외에도 또 있다. TSMC 등 해외 기업이 중국 팹리스(반도체 설계)의 주문을 꺼리는 분위기가 커지자, 그 주문을 SMIC가 소화하게 된 것이다. SMIC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중국 고객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4% 증가했다.
-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