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세라티는 그레칼레에 거의 모든 걸 쏟아부은 것 같았다. 마세라티의 110여 년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내면서도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다시피 했다.

[자동차]

‘그레칼레(Grecale)’는 바람 이름이다. 동쪽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 돌풍에 가까운 매섭고 차가운 바람을 그레칼레라고 한다. 이 이국적인 바람 이름은 그레칼레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레칼레라는 새로운 바람
이탈리아 럭셔리 디자인의 정수

마세라티의 유전자에는 뼛속까지 아름다움이 새겨져 있다. 이탈리아의 예술과 건축, 패션에서 받은 영감을 토대로 완성한 마세라티만의 디자인은 늘 다른 자동차 브랜드에 귀감이 되곤 한다. 그레칼레 역시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연상된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새로운 디자인 언어를 적용했다는 것이다. 세로로 길게 뽑아내면서도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한 헤드램프와 강인한 라디에이터 그릴, 매끄러운 곡선의 보닛 라인을 보고 있으면 언뜻 마세라티의 슈퍼 스포츠카 ‘MC20’가 겹쳐 보인다. 여기서 마세라티의 장기가 빛을 발한다. 보통 스포츠카를 닮은 디자인이라 하면 뾰족하거나 때때로 우악스러워 보이기 마련인데, 어쩐지 그레칼레는 우아하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이는 마세라티 특유의 관능적 굴곡을 예리하게 매만진 결과다. 조각처럼 면과 면이 이어지는 부분에도 각진 곳이 없을 정도다. 특히 뒤로 갈수록 유려한 곡선을 타고 물 흐르듯 떨어지는 루프 라인이 압권. 여기에 ‘자동차 디자인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르제토 주자로의 ‘3200GT’를 모티프로 한 부메랑 테일라이트와 마세라티 특유의 사다리꼴 후면 디자인 등이 우아함 속에서도 스포티함을 잃지 않는다. 한 번 쳐다보면 외면하기 힘들고, 애써 고개를 돌리더라도 오래도록 잔상이 남을 만한 디자인이다.
요즘 출시되는 자동차를 보면 하나같이 개성 넘치는 모양새다. 좋은 말로 과감하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 과한 디자인은 눈을 쉬 피로하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최신 유행은 금세 옛것이 된다. 반면, 마세라티의 접근 방식은 유행을 타지 않는 것이 최우선이다. 이는 이탤리언 럭셔리 브랜드의 공통된 철학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럭셔리 패션 브랜드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올드머니 룩이 주목받듯, 아무리 좋은 새것을 붙여봐도 오랜 세월 차곡차곡 쌓인 기품과 권위를 넘어설 순 없기 때문이다. 과도한 장식이 아닌, 붉은색 디테일을 더한 트로페오 레터링이나 큼직한 브레이크 캘리퍼 정도로 자동차의 성격을 드러낸 ‘절제미’야말로 그레칼레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레칼레라는 새로운 바람
혁신으로 완성한 럭셔리 공간

머릿속에 알고 있는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를 하나씩 나열해보자. 아마도 그 브랜드들이 가장 내세우는 것 중 하나는 오랜 역사에서 비롯한 장인 정신일 것이다. 보통의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는 구차하게 어떤 장비나 기능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보다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스티치 마감 등 작고 사소한 디테일이야말로 그들이 말하는 장인 정신이자 ‘명품’을 결정짓는 요소다. 첨단 전자 장비나 최신 기술은 까다로운 검증 절차를 거친 뒤 도입해 경쟁사보다 늦을 때가 많다.
그러나 그레칼레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날로그’ 또는 ‘클래식’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던 형제 모델과 달리 그레칼레는 ‘디지털화’의 최선봉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세라티의 상징으로 여기던 센터페시아의 아날로그 시계가 디지털로 바뀐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마세라티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는 일종의 ‘신호탄’이라고나 할까. 실내 곳곳에서는 ‘새로 나온 차’라는 점을 강조하는 요소가 눈에 띈다. 차에 오르면 가장 먼저 전자식 디스플레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12.3인치 TFT 클러스터와 디지털 기어 시프터로 분할된 12.3인치 및 8.8인치 형태의 중앙 디스플레이가 대표적이다. 우수한 그래픽은 물론, 직관적 인터페이스를 통해 여러 기능을 손쉽게 다룰 수 있다. 편의 사양은 모두 터치로 제어된다. T맵 오토 기본 내비게이션과 헤드업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무선 충전, 앞좌석 열선·통풍 시트, 스티어링 휠 열선 등 국내 소비자가 선호하는 옵션도 빼놓지 않고 꼼꼼히 챙겼다. 기어 변경과 도어 개폐 장치도 버튼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레칼레의 본질은 역시 럭셔리, 그것도 이탤리언 럭셔리다. 그레칼레는 이탈리아 중부에 자리한 카시노 공장에서 생산된다. 이른바 ‘감성 품질’이 ‘메이드 인 이탈리아’답다. 운전석에 앉으면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곳에 천연 가죽을 둘렀다. 부드러운 가죽의 질감과 완벽한 마감에 감탄하기 바쁘다. 손바느질로 한 땀씩 꿰맨 정성이 느껴진다. 손에 착 감기는 D컷 가죽 스티어링 휠도 만족스럽기는 마찬가지. 천장과 A필러에는 블랙 스웨이드가 넘실거리고, 도어와 센터콘솔엔 날것 그대로 카본으로 야성미를 더했다. 한마디로 마세라티의 장인 정신이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된 ‘작품’이라 할 만하다.
그레칼레라는 새로운 바람
레이싱 DNA

마세라티의 ‘뿌리’는 모터스포츠다. 1914년 창립 이후 50여 년간 레이싱 한 우물만 팠다. 23개의 챔피언십과 32회의 F1 그랑프리 챔피언 등 우승 트로피를 500여 회나 들어 올렸을 정도다. 그들의 역사는 승리의 기술을 증명한다. 그래서 마세라티는 라인업 중 가장 강력한 성능을 발휘하는 모델명 뒤에 항상 트로피를 뜻하는 ‘트로페오(Trofeo)’를 붙인다.그레칼레에도 트로페오가 존재한다. ‘MC20’에 적용된 새로운 슈퍼 스포츠 엔진, ‘네튜노 엔진’을 탑재하고 최고출력 530마력과 최대토크 620Nm의 무시무시한 괴력을 발휘하는 모델이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무려 3.8초, 최고속도는 시속 285km에 이른다.
하지만 막상 운전석에 앉으니 언뜻 조용했다. 정숙성이라는 말이 마세라티를 상징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SUV로서 정체성을 확고히 하려는 것 같았다. 대담한 하체 셋업에도 불구하고 기대 이상의 승차감과 정숙성을 제공해 ‘주행의 완성도’를 높인 모습이다.
그러나 괄괄한 성격을 다시금 확인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행 모드를 컴포트에서 스포츠로 바꾸자마자 맹수가 포효하는 듯한 흡기·배기음이 귓가를 자극한다. 마세라티를 아는 사람한테는 익숙하고 반가운 소리지만,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심금을 울리는 소리일 터. 그레칼레 트로페오는 오프로드와 컴포트, GT, 스포츠, 코르사 등 다섯 가지 주행 모드를 제공하는데, 모드를 바꿀 때마다 계기반 왼쪽 하단에 차체 높낮이를 수시로 오르내리는 표시가 뜨면서 스스로 안정감을 찾는다. 스포츠 모드를 선택하고 시속 100km 이상으로 주행해보니 엔진음은 더 웅장하면서 날카로워지고, 속도는 거침없이 올라간다. 엔진은 어떠한 엔진 회전 구간대에서도 굴곡 없이 뛰어난 성능과 부드러운 구동을 이끌어내며 레이싱 DNA의 진정한 면모를 드러낸다. 하지만 발군은 단연 트로페오만을 위한 코르사 모드. 코르사는 ‘레이스’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극한의 경험이 가능하다. 심지어 가속 성능을 극대화하는 런치 컨트롤을 사용할 수 있다. 웬만한 슈퍼카 수준의 성능이 그대로 전해진다. 반응력이 어찌나 민첩한지, SUV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다.
그레칼레라는 새로운 바람
그란투리스모의 계보를 잇다

요즘은 수많은 브랜드의 여러 모델 혹은 트림에서 ‘GT’, 그러니까 ‘그란 투리스모(GranTurismo)’라는 이름을 볼 수 있지만, 원조는 마세라티다. 1947년에 발표한 ‘A6 1500’이 전 세계 자동차업계에 그랜드 투어러라는 개념을 처음 정립시켰기 때문이다. 그란투리스모는 말 그대로 장거리 여행을 의미한다. 강력한 퍼포먼스가 보장되어야 하고, 편안한 승차감으로 오래도록 주행해도 피로가 쌓이지 않아야 한다. 드넓게 펼쳐진 고속도로를 달리기도 하지만, 시골 마을의 굽이진 길을 달릴 때도 운전은 즐거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그레칼레는 완벽한 그란투리스모라 할 수 있다. 길이 4859mm, 너비 1979mm, 높이 1659mm의 체격으로 여유로운 공간을 제시한다(트로페오 기준). 특히 경쟁 차종을 압도하는 2901mm의 휠베이스는 성인 네 명이 장거리 여행을 떠나기에도 전혀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편안하다. 날렵한 실루엣임에도 2열 좌석의 레그룸과 헤드룸 또한 준수하다. 여기에 535∼570L에 이르는 적재 공간은 2주일 동안 여행해도 끄떡없을 만큼 넉넉하다.
빵빵한 오디오 시스템도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한다. 그레칼레에는 이탈리아 스피커 브랜드 ‘소너스 파베르(Sonus faber)’ 스피커가 무려 21개나 탑재됐다. 소너스 파베르는 이탈리아어로 ‘수작업으로 완성한 소리’라는 뜻이다. 오디오를 켜면 그 진가를 드러내는데, 1285W의 출력에서 비롯한 사운드가 실내 전체를 빈틈없이 채운다. 특히 저음 또는 고음에 집중된 일반적 구성과 달리 트위터와 중음역대 스피커의 거리를 정밀하게 맞춰 극장 돌비 애트모스 같은 단단하고 입체적인 소리를 들려준다.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된 밀폐성은 소리의 완성도를 높인다. 이 외에도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과 능동형 드라이빙 어시스트, 능동형 사각지대 어시스트 등이 포함된 자율주행 기능 레벨 2 수준의 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을 적용해 장거리 여행 시 운전의 피로감을 덜어준다.
그레칼레라는 새로운 바람
현재 국내 출시된 그레칼레는 총 세 종류다. 300마력 마일드 하이브리드(MHEV) 엔진의 ‘GT’와 330마력 마일드 하이브리드 엔진의 ‘모데나’, 그리고 최상급 모델이자 고성능 모델인 530마력 V6 엔진의 ‘트로페오’가 그 주인공. 가격은 1억850만 원부터 1억6809만 원까지다. 기존 마세라티 라인업을 생각하면 문턱이 낮아진 셈이다. 이탈리아 특유의 럭셔리 감성은 늘 만족스럽고, 마세라티에서 기대할 수 있는 레이싱 DNA도 여전하다. 그러면서 그동안 아쉬움으로 남아 있던 최신 장비와 편의 장비는 대폭 개선했다. SUV이니 온 가족이 타기에도 적합하다.
가격표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후보군 최상단에 올려두고 고려해볼 만하다. 한편 마세라티는 올해 중 전동화 버전의 ‘그레칼레 폴고레’를 국내에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이승률 기자 ujh8817@hankyung.com | 사진 백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