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면 대부분 미술관이 1년간의 전시 계획을 발표한다. 클래식과 실험적 전시가 섞이기 마련이지만, 올해는 대체로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거장들의 전시가 다수 예정되어 있다. 그중 특히 눈에 띄는 이름이 있으니, 진경산수화의 대가이자 조선 회화사의 큰 기둥인 겸재 정선의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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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간송미술관은 정기전의 시작을 알리며 대규모 <겸재전>을 열었다. 이후에도 <진경시대전>(1985년), <진경풍속전>(1988년), <겸재진경산수화전>(1993년) 등 기획전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를 깊이 조명해왔다. 특히 2004년 열린 <대겸재전>에서는 국보 217호 <금강전도>를 비롯해 120여 점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으기도 했다.
간송미술관이 정선의 작품을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말 그대로 민족적 오리지낼리티를 지닌 화가였기 때문이다. 정선 이전의 한국 화가는 대부분 중국의 유행을 따랐다. 특히 문인화의 전통을 따르던 조선 초기와 중기 때 화가들은 중국의 명과 청 시대 회화 스타일을 모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정선은 중국 화풍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관념적 표현에 의존하지 않고 실제로 조선의 강산을 누비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이렇게 현장감 넘치는 방식으로 탄생한 작품이 이른바 ‘진경산수화’다. 정선의 그림에는 조선 땅에 실재하는 산과 계곡의 생생한 형태가 있었다. 이상향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땅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풍경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정선은 실험적 시도에 능한 작가였다. 실경을 그대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화면 구성을 과감하게 변형시키며 독창적 조형미를 만들어냈다. 예컨대 <금강전도>를 보면 금강산의 광활한 전경을 한눈에 담기 위해 독특한 방식으로 화면을 구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전체 풍경을 둥글게 압축하면서도, 험준한 봉우리와 골짜기의 입체감은 살려 한 장의 지도처럼 펼쳐 보이게 한 것이다. 단순히 실경 재현을 넘어 금강산의 웅장함을 강렬하게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다. 이는 <풍악내산총람도>나 <금강내산> 같은 작품에서도 동일한 기법이 드러난다.
보물 1952호로 지정된 <청풍계도>는 어떤가.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요소는 계곡을 중심으로 한 수직적 구도다. 마치 요즘 쓰는 세로 모니터처럼 화면을 위아래로 길게 활용해 계곡의 공간감을 강조하는 것이다. 기존 산수화가 가로로 넓은 시야에서 산세를 흘려보내는 방식이었다면, <청풍계도>는 계곡의 깊이를 강하게 부각하는 방식으로 자연의 웅장함을 표현했다. 오른쪽으로 치우친 비대칭적 구도를 보여주는 국보 216호 <인왕제색도>도 마찬가지다. 여러 작품에서 드러나는 독특한 구도와 질감은 정선이 단순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아니라 조선의 자연을 가장 진솔하게 담아낸 예술가였다는 증거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오늘날 정선을 더욱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올봄, 다시 한번 정선의 대규모 전시가 열린다. 간송미술문화재단과 삼성문화재단이 손잡고, 호암미술관에서 정선의 대표작 120여 점을 한자리에 모으는 것. 오는 4월 2일부터 6월 29일까지 ‘겸재 정선’이라는 정직한 제목으로 열리는 이 전시는 그의 진경산수화 외에도 인물화나 화조영모화(꽃과 새를 그린 그림)까지, 정선이 구축한 예술 세계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될 전망이다.
호암미술관 측은 “지금까지 정선을 주제로 한 전시는 종종 있었으나, 정선 회화 세계의 전모를 주요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전시는 처음이다. 정선이 남긴 작품에 나타난 내면 세계와 예술혼까지 살펴보는 이 전시는 정선의 회화 세계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올해 전시가 끝나고 2026년 하반기에는 대구간송미술관에서 본 전시의 주요 작품 및 출품되지 않았던 새로운 작품을 더해 순회전이 개최될 예정이다. 참고로, 대구간송미술관에서도 5월까지 정선의 <금강전도>를 상설전에서 공개한다니 정선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많겠다.
아마도 우연이겠지만, 정선의 대규모 전시는 국내외적으로 격동의 시대마다 찾아왔다. 1971년 <겸재전> 당시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개헌으로 3선 출마를 가능하게 하면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됐다. 미국에서는 닉슨 독트린으로 안보 불안이 크게 늘던 시점이기도 했다. 2004년 <대겸재전> 당시에는 신용카드 연체율이 급증하며 신용불량자가 양산되고 금융권 부실 우려가 커지던 시점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언론의 대립으로 정계가 어수선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올해도 국내외 정세가 평온치 않다. 세계적 불확실성 역시 줄어들 기미가 없다. 누군가는 이런 상황에서 예술을 찾아가는 일을 사치라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우리에게는 예술이 건네는 다른 차원의 경험이 필요하다. 예술이 우리의 불안을 잠시나마 진정시켜줄 수 있는 순간을 제공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가올 봄에는 정선의 작품 앞에 서보기를 권한다. 정선이 자연을 바라보던 차분하고 깊은 눈길이, 우리의 불안을 잠시나마 진정시킬지도 모른다.
글 이기원 칼럼니스트 moneystaff@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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