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모렌지는 1843년 위스키 생산을 시작한 유서 깊은 싱글 몰트위스키 브랜드, 특히 흥미로운 시도 앞에서 주저함이 없는 ‘실험정신’으로 150여 년의 역사를 쌓아왔다. 위스키 업계에 추가 숙성의 개념을 안착시켰는가 하면, 위스키 원액을 물에 희석하지 않는 캐스크 스트렝스 제품을 공식적으로 출시한 첫 증류소이기도 하다.
[위스키 이야기]
글렌모렌지(Glenmorangie)는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목이 긴 증류기로 유명하다. 1843년 위스키 증류를 시작하면서, 자금이 부족했던 탓에 진(gin)을 생산하던 중고 증류기를 가져와 위스키 제조에 착수한 까닭이다. 이후 150여 년에 걸쳐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목 부분의 높이만 5.14m에 달하는 증류기의 형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글렌모렌지가 목이 긴 증류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시그니처 특징을 완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 증류기의 크기와 모양은 스피릿의 풍미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데 일반적으로 증류기 폭이 넓고 낮을수록 스피릿의 풍미가 묵직해지고, 반대로 폭이 좁고 높을수록 가볍고 깔끔한 스피릿이 만들어진다. 증류기 목이 길면 끓어오른 알코올 증기 가운데 무거운 기체가 쉽게 증류기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환류해 다시 증류되는 원리다. 이외에도 같은 오크통을 3~4회 사용하는 다른 증류소에 비해 미국산 화이트 오크로 만든 오크통을 단 2회만 사용해 대체적으로 깔끔하고 섬세한 맛을 자랑한다.

글렌모렌지는 위스키 숙성에 대해 독보적인 철학을 세운 증류소다. 특히 추가 숙성은 글렌모렌지가 묵묵히 개척해 온 길이다. 추가 숙성이란 셰리 혹은 버번 오크통에서 완전히 숙성된 위스키 원액을 다른 지역에서 생산한 오크통으로 옮겨 일정 기간 다시 숙성시키는 과정을 뜻한다. 다시 말해 기존 위스키 맛에 새로운 맛을 한 겹 더 더하는 것. 그만큼 풍미가 다양하고 복합적이라는 이점이 있다.
지금에야 여러 가지 오크통을 섞어서 사용하는 게 흔한 일이지만 글렌모렌지는 이보다 훨씬 앞선 30여 년 전부터 추가 숙성을 시도했다. 1987년 선보인 ‘글렌모렌지 1963’이 대표적이다. 23년 동안 버번 오크통에서 숙성한 위스키를 올로로소 셰리 오크통에서 18개월간 추가 숙성해 완성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시도였다. 특히 라벨에 추가 숙성을 뜻하는 ‘피니싱(finishing)’이라는 표기를 사용했는데, 위스키 역사상 이 용어가 쓰인 최초의 사례로 기록된다.
추가 숙성, 다시 말해 피니싱에 대한 글렌모렌지의 열정은 코어 라인업만 살펴봐도 쉽게 가늠할 수 있다. 글렌모렌지의 경우 버번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원액을 다양한 와인 캐스크에 옮겨 담아 추가 숙성해서 독특한 풍미를 얻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프랑스 보르도에서 생산하는 화이트 와인인 소테른을 담았던 오크통을 비롯해 무려 네 가지의 화이트 와인 오크통에서 마무리 숙성을 거친 ‘글렌모렌지 더 넥타’가 좋은 예다. 스페인 헤레스 지방에서 확보한 올로로소 셰리 캐스크와 ‘셰리의 왕’ 페드로 히메네스 캐스크에서 2년간 추가 숙성을 거친 ‘라산타’와 포르투갈산 루비 포트 캐스크에서 피니싱을 거친 ‘퀸타 루반’ 또한 글렌모렌지의 무한한 도전 정신을 보여준다.

위스키 애호가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위스키를 꼽아보라고 하면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이 ‘글렌모렌지 시그넷’이다. 시그넷의 탄생은 위스키 업계에 ‘혁명’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아니 도대체 누가 위스키 제조에 쓰이는 맥아(발아한 보리)를 커피콩 볶듯 로스팅할 상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엉뚱한(?) 상상을 현실로 만든 이는 글렌모렌지의 마스터 블렌더인 빌 럼스덴(Vill Lumsden) 박사. 국제위스키대회(IWC)에서 ‘올해의 마스터 디스틸러’를 수차례 수상한 것은 물론, 올해 초에는 영국 왕실이 최고의 장인들에게 수여하는 MBE(Members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 훈장을 받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화학을 전공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위스키 증류에 뛰어들었다. 독특한 이력만큼 위스키에 접근하는 시각 자체가 혁신적이다. 무중력 상태에서 숙성한 위스키와 지상에서 숙성한 제품의 맛 차이를 알기 위해 위스키 원액을 우주로 보냈을 정도. 오크통을 만드는 나무의 벌목부터 모든 과정을 직접 계획하고 관리하는 일명 ‘디자이너 캐스크’ 개념을 업계에 처음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위스키 계의 윌리 웡카 혹은 미친 과학자라 불리는 럼스덴 박사의 상상력은 매년 출시되는 글렌모렌지의 ‘어 테일 오브(A Tail of)’ 시리즈에서 잘 드러난다. 아이스크림을 모티프로 한 위스키를 발표하는가 하면, 피트 대신 진을 만들 때 쓰는 주니퍼 베리와 헤더 꽃을 태워 위스키에 풍미를 입히는 식이다.
글렌모렌지 증류소는 지난 2018년 럼스덴 박사를 위한 작은 실험실을 만들어줬다. ‘빌 럼스덴의 놀이터’라 불리는 이른바 라이트하우스(Lighthouse)다. 이곳에서는 보리 재배부터 증류까지 상식과 관념을 뛰어넘는 다양한 실험을 진행 중인데, 관계자에 따르면 올해 말 혹은 내년 초에 첫 번째 ‘작품’이 공개될 가능성이 높다.

얼마 전 글렌모렌지는 브랜드 포트폴리오의 중추를 이루는 ‘디 오리지널’의 연수를 10년에서 12년으로 끌어올렸다. 이례적이고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글렌모렌지 10년은 라인업 중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제품. 한 마디로 굳이 이런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다. 개발을 진두지휘한 럼스덴 박사는 말한다. “꽤 오래전부터 디 오리지널의 숙성 연수를 놓고 수도 없이 실험을 했고, 시음 테스트를 거듭한 끝에 12년 숙성일 때 훨씬 더 풍미가 풍부해진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기자가 미리 경험해본 느낌을 전하자면 한 모금 머금는 순간, 럼스덴 박사의 의중을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 글렌모렌지 디 오리지널 특유의 오렌지, 꿀, 바닐라, 복숭아의 감미로운 풍미는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더욱 부드럽고 크리미해졌다. 상큼하게 휘몰아치는 시트러스와 바닐라의 조화가 압권. 특히 기존 제품의 아쉬움으로 지적되던 피니시가 훨씬 더 길고 복잡해졌는데, 12년 숙성의 싱글 몰트위스키가 다다를 수 있는 최대치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이승률 기자 ujh881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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