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는 어떻게 자산을 일구고, 지켜왔을까?'. PB 1세대를 대표하는 이재옥 KB증권 WM사업그룹장(전무)을 만나 30년간 국내외 자산가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얻은 통찰을 들어봤다.
[커버스토리] 인터뷰 - ‘1세대 PB’ 이재옥 KB증권 전무
KB증권에서 WM총괄을 맡고 있는 이재옥 전무는 30년 넘는 커리어 동안 국내외 초고액자산가들의 자산관리(WM)를 맡으며, ‘부자’에 대한 깊은 통찰을 쌓아 왔다. 프라이빗뱅커(PB) 1세대로서의 시작, 미국식 자산관리 시스템을 익힌 씨티은행 시절, 그리고 UBS·CS홍콩에서의 13년간 해외 경험까지 그의 커리어는 곧 웰스매니지먼트의 진화 과정을 따라가는 여정이기도 했다.
지난 5월 15일, 서울 여의도 KB증권 본사에서 국내외 부자들의 자산 전략과 부의 본질에 대한 이 전무의 경험과 철학을 들어봤다.
- 커리어 초기부터 PB 업무를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운이 좋게도 대한민국에서 ‘PB’라는 개념이 도입되기 시작한 파일럿 점포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씨티은행으로 이직하면서 미국식 선진 PB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배우게 됐고, 제 커리어도 급성장했죠. 많은 자산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부의 변천 과정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근무했던 서초동 지점에서는 땅 개발 붐 속에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한 고객들이 많았고, 또 한 축으로는 판·검사, 의사, 교수 등 전문직 고객들이 있었죠. 씨티은행 광화문 본사에서는 특히 기업을 운영하는 최고경영자(CEO) 고객들을 주로 담당했는데, 그분들의 경영 철학과 인사이트, 투자 철학을 가까이서 체득할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 해외 근무 경험도 굉장히 독특합니다.
“PB로서 어느 정도 경력을 쌓은 뒤, 새로운 돌파구를 고민하다가 해외에서 PB 경험을 통해 국내외를 아우르는 차별화된 PB가 될 수 있겠다는 판단에 도전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UBS홍콩, CS홍콩에서 13년 동안 근무하며 아시아 각국의 거부들을 만났고, 그들이 자산관리 방식을 가까이서 지켜봤어요. 금융 선진국의 웰스매니지먼트 시스템을 몸소 익힌 셈이죠. 이후 한국에서도 이러한 경험을 접목할 기회를 찾던 중 KB증권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 부자들의 자산 운영 전략에도 변화가 있었다고 보시나요.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자산가들의 투자 전략이 과거에 비해 상당히 변화하고 있다는 걸 체감했습니다. 과거에는 부동산 비중이 압도적이었고 예·적금 중심의 보수적 자산 운용이 주를 이뤘어요. 안정적 운영과 리스크 회피가 최우선이었죠.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특히 초고액자산가를 중심으로 '자산의 구조 자체를 설계하는 방식'이 크게 바뀌고 있습니다. 부동산에서 금융자산 쪽으로 옮겨 가고 있고, 그중에서도 국내외 주식, 상장지수펀드(ETF), 리츠, 글로벌 채권, 대체투자 등 포트폴리오가 다양화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변화는 의사결정 방식이에요. 과거에는 PB나 세무사, 회계사, 변호사 등 전문가의 의견에 따라 수동적으로 결정했다면, 이제는 고객 스스로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정보와 데이터를 습득합니다. 전문가 의견을 결정이 아닌 ‘검토의 기준’으로 활용하는 것이죠.”
- 해외 투자에 대한 관심은 과거에 비해 어떻게 달라졌나요.
“요즘 현장에서 고객을 직접 마주하는 PB들이 체감하는 가장 큰 변화 중 하나가 바로 해외 자산에 대한 관심입니다. 불과 5~10년 전만 해도 해외 투자는 일부 자산가들에게만 제한적인 영역이었고, 그마저도 미국 주식의 매매나 해외 부동산 매입 정도가 전부였죠. 하지만 지금은 그 범위와 수준이 전혀 다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최근에는 글로벌 ETF, 리츠, 글로벌 인컴형 채권, 원자재 ETF, 심지어는 글로벌 사모펀드(PEF)나 벤처캐피털(VC)까지 적극적으로 탐색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특히 금리·환율 환경이 복잡하게 얽힌 요즘 같은 시기에는 지역, 통화, 섹터를 분산하는 전략적 판단까지 고려합니다.”
- 해외 자산가들과 비교했을 때 국내 부자들만의 특징은 어떤가요.
“우선 투자의 목적인데. 국내 자산가들은 ‘자산의 양적 성장 중심’, 특히 단기 성과와 수익률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해외 자산가들은 자산을 단순히 증식의 수단으로 보기보다는 세금, 승계 기부, 법률 등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를 위해 패밀리오피스, 신탁, 다양한 형태의 법인을 활용하는 것이 일반화돼 있습니다. 두 번째는 포트폴리오 측면입니다. 국내 자산가들은 아직 해외 자산가들에 비해 부동산 자산 비중이 높은 반면 홍콩과 싱가포르 부자들은 부동산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고 금융자산과 대체투자 비중이 높은 편입니다. 세 번째로 필란트로피 측면에서도 큰 차이가 있어요. 홍콩과 싱가포르의 자산가들은 자선재단 설립, 임팩트 투자, 사회적 기업 지원 등 전략적이고 장기적인 사회공헌 활동을 자산 포트폴리오의 핵심 요소로 통합하는 반면, 한국 부자들은 아직 이런 체계적인 접근보다는 직접적 기부나 일회성 사회 공헌에 더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 부자들의 투자 원칙에서 공통점이 있다면요.
“자산가들은 공통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매우 엄격합니다.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철저한 자기관리를 실천하죠. 또 기회를 알아보고 과감하게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시장의 변화를 주의 깊게 살피고, 적절한 시점에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무엇보다 원칙과 철학이 분명합니다. 개인적인 투자 철학을 바탕으로 일관된 전략을 유지하며, 유행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부자들도 국내외 정치·경제 이슈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위기가 올 때 웬만한 이벤트에 흔들리지 않는 비결이 있다면, 바로 원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 어렵고 중요한 건 원칙을 ‘고수’하는 힘이죠.”
- 오랜 시간 자산가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어떻게 부자가 되는가'에 대한 나름의 답이 생겼을 것 같습니다.
“부자가 되는 패턴이 시대에 따라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예전엔 갑자기 땅이 개발되면서 ‘벼락부자’가 된 분도 있었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자산 덕에 가업을 이어가게 된 경우도 있었죠. 부자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그 부를 유지하고 불려 가는 일입니다. 물려받은 재산이라 하더라도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거든요. 또 요즘에는 가업을 이어받기보다는 자기만의 사업을 하겠다는 자녀 세대가 부모 세대와 충돌하는 일이 많습니다. 부의 원천은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재능’에 기반해 부자가 되는 사례가 점차 늘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노력과 감각으로 자산을 일군 분들이죠. 스타트업 최고경영자(CEO)들도 많잖아요. 게임 분야에서 한 우물만 파거나, K-콘텐츠나 화장품으로 글로벌 사업에 성공한 분들도 만났습니다. 과거의 예술가들은 사후에 성공했다면, 지금은 살아생전 성공한 문화예술가들도 너무 많아요. 이러한 영리치들은 단순한 성공을 이루기보다 인플루언서로 팬덤을 형성하고, 사회적 영향력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가치소비, 기부, 필란트로피에도 적극적이죠. 이런 분들이 부의 지형을 바꿔 가고 있어요."
- 영리치 세대의 부에 대한 관점은 어떤가요.
“예를 들어, 주식 투자로 부를 쌓은 전통 부자라면 너무 투자에 몰입하면서 오히려 손해를 보기도 해요. 주식은 때에 따라 성과가 크지 않거나 원금을 잃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요즘 영리치들은 ‘플렉스’도 중요하죠. 코인 투자로 돈을 벌든, 유튜브나 플랫폼 비즈니스로 성공하든 그 수익을 빠르게 현금화해서 실물자산으로 옮깁니다. 한남동이나 한강변에 아파트를 구매하고, 수입차를 사고, 또 집에는 미술 작품 하나쯤은 걸어 놓죠. 그래서 또 이들이 미술 시장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어요.”
- 부자들의 자녀 교육에 대해 관찰한 점이 있다면.
“2세까지는 부모의 교육관에 따라 해외 유학을 가거나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경우가 많았지만, 3세부터는 확연히 다릅니다. 재능 중심, 자율성과 다양성 중시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어요. 캠프도 공부 중심이 아니라 예술, 운동, 컴퓨터처럼 본인이 좋아하는 분야에 초점을 맞추고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식으로요.”
- 자산가들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면서 기억에 남는 사례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제가 관찰한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부자들의 자산 증식 과정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KB금융그룹의 ‘2024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부자들은 평균 42세에 ‘사업수익’과 ‘부동산 투자수익’으로 약 7억4000만 원의 '종잣돈'을 마련하고, 이후 ‘소득잉여자금’, ‘자산 배분 전략’, ‘부채 활용’의 세 가지 주요 동력으로 자산을 성장시킵니다. 홍콩에서 제가 담당했던 자산가 가족 중 특히 기억에 남는 사례는 3세대에 걸친 자산 전략의 진화였습니다. 1세대는 부동산과 전통 산업으로 부를 축적했고, 2세대는 이를 금융자산과 대체투자로 다각화했으며, 3세대는 가족재단을 설립해 자산의 30%를 교육과 환경 분야에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자산 증식이 세대별로 전략적으로 진화하며, 단순한 부의 축적을 넘어 '의미 있는 영향력'으로 확장되는 모습을 보며 부의 목적에 대한 더 깊은 성찰을 하게 됐습니다.”
- 자산 승계 과정에서의 자산가들의 주된 고민은 무엇인가요.
“한국에서는 높은 세율과 유동성 확보가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홍콩과 싱가포르는 상속세가 없어 이 부분의 부담은 적지만, 글로벌 자산을 보유한 가문들은 여러 국가의 세법을 고려한 복잡한 승계 계획이 필요합니다. 제가 홍콩에서 근무할 때는 초고자산가들은 단순한 자산 이전을 넘어 '가족 거버넌스'와 '필란트로피’를 통한 승계가 이루어지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가족헌장 수립, 다음 세대의 자산관리 교육, 가족재단 설립을 통해 가문의 가치를 명문화하고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죠. 가문의 레거시를 구축하는 효과적인 전략입니다. 한국에서도 계획적인 세대 간 자산 이전과 함께 ‘가치의 이전’의 중요성이 점차 강조되는 것을 봅니다.”
-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볼 때, 전무님이 정의하는 ‘진짜 부자’란 무엇인가요.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부자란 단순히 계좌 잔고나 보유 자산의 크기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진짜 부자란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사람, 그리고 그 자유를 통해 사회에 의미 있는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만난 진정한 부자들은 경제적 풍요를 넘어 시간의 자유, 관계의 풍요로움, 그리고 자신의 가치관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중요시했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많은 자산가들이 스스로의 부를 판단할 때 '내가 얼마나 가졌는가'보다 '내가 얼마나 나눌 수 있는가'를 더 중요한 척도로 삼았다는 점이에요. 한 홍콩 자산가는 '진정한 부자란 자신의 성공이 다른 이들의 성장을 돕는 씨앗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지금까지도 인상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부의 흐름을 사회로 환원하고 다음 세대를 위한 기회를 창출하는 능력이야말로 진정한 부의 본질이라고 봐요. 결국 부자란 단순히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풍요로운 선택을 할 수 있고 그 선택을 통해 자신을 넘어선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 최근 국내외 리스크에 맞서 자산가들은 어떤 투자 전략을 세우는지 궁금합니다.
“대표적인 전략으로 UBS의 ‘Three Ls Strategy’가 좋은 예입니다. 자산을 유동성(Liquidity), 장기성(Longevity), 유산(Legacy) 세 개의 바구니로 나눠 재정 목표에 따라 배분하는 방식입니다. 유동성은 갑작스러운 자금이 필요할 때 안정적인 현금자산 풀을 사전에 확보하는 전략으로, 원금 손실 위험이 적고, 유동성이 높은 예금, 머니마켓펀드(MMF), 우량 단기채 등에 투자합니다. 장기성은 장기적인 재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으로 성장 지향적 투자가 핵심이며 주로 주식, 채권, 글로벌 자산등 리스크를 감수하고 수익률을 추구하는 전략입니다. 마지막으로 유산은 세대 간 부의 이전 및 사회적 기여입니다. 세대 간 자산의 이전, 상속 및 증여 설계, 필란트로피 전략 등이 여기에 포함되죠. 최적의 세금 전략과 체계적인 부의 이전이 핵심이며, 비상장주식, 사모펀드, 부동산, 신탁 등에 장기 투자를 합니다.”
- 최근 자산가 고객들이 가장 주목하는 자산 유형은 무엇인가요.
"정책 불확실성이 여전한 상황에서 자산 배분 다각화가 필수입니다. 미국과 중국의 인공지능(AI) 테마주, 국내 리쇼어링 수혜주 등으로 분산투자가 여전히 유효합니다. 금리 하락에 따른 장기 국채, 롱숏 전략 상품, 그리고 시장 등락과 무관한 꾸준한 수익을 추구하는 사모대출형 펀드 등이 자산가들의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 올해 하반기 유효한 투자 테마나 전략이 있다면요.
”후보들의 공약과 정책 방향성에 투자 포인트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투자와 지원이 확대되는 첨단 산업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후보와 정당을 떠나 공통적으로 반도체와 AI 분야는 국가 전략 산업의 핵심 영역으로 세제 혜택이나 규제 완화, 인프라 지원 등에서 수혜가 예상됩니다. 또한 주4.5제 도입 공약에 따라 휴일 증가로 외식과 여행, 문화, 교육 등의 서비스 분야도 지출 확대가 예상됩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밸류업 프로그램, 상법 개정 등 구조 개혁은 자기자본이익률(ROE) 개선이 가능한 저주가순자산비율(PBR) 업종과 종목들이 재차 주목받는 모멘텀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 마지막으로, 이 일을 하며 얻은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인가요.
"원칙을 지키는 힘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준을 흔들지 않는 태도, 일관성을 지키는 자세는 단순히 자산 운용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사람과의 관계, 조직을 이끄는 방식, 삶의 전반에 걸쳐 영향을 줍니다. 부자들을 통해 배운 가장 큰 자산은 결국 그런 철학과 태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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