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출범 이후 원화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논의가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가치가 법정화폐나 자산과 1대1로 연동되는 디지털 자산이다. 즉, 원화 스테이블 코인이란 원화 법정화폐의 가치를 정확하고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가상자산을 뜻한다.

[가상자산 따라잡기]
가상자산 거래소에서 비트코인(BTC), 이더리움(ETH)과 함께 거래되는 스테이블코인 테더(USDT). 사진=연합DPA
가상자산 거래소에서 비트코인(BTC), 이더리움(ETH)과 함께 거래되는 스테이블코인 테더(USDT). 사진=연합DPA
지역화폐를 스테이블코인으로?…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성공 조건

현재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발행량은 전체 스테이블코인의 99%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그중에서 테더의 USDT와 서클의 USDC가 각각 전체 발행량 중 62%, 25%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글로벌 가상자산 거래의 핵심 인프라로 기능하며, 그 용도는 단순한 거래 중개를 넘어 가치 저장, 송금, 결제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지역화폐를 스테이블코인으로?…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성공 조건
국내의 경우 업비트 등 거래소 시스템이 일정 수준의 제도틀 내에서 원화 법정화폐로도 잘 운영되며 스테이블코인의 쓰임새가 부각되지는 않지만, 세계 최대 거래소인 바이낸스를 비롯, 주요 거래소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달러화 일색인 스테이블코인 시장

전 세계적으로 스테이블코인이 주목받는 이유는 명확하다. 인터넷만 있으면 은행 계좌 없이도 금융 활동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이다. 터키, 아르헨티나 등 자국 통화가 불안정한 나라에서는 이미 주요 결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실제로 최근 몇 년간 이들 국가의 P2P(Peer-to-Peer) 시장에서 USDT의 거래량이 현지 통화를 대체하기도 했다. 또한 수수료가 저렴하고 속도가 빠르다는 점 때문에 국제 무역 결제에서도 점차 활용 범위를 넓혀 가고 있다.

미국 정부가 스테이블코인을 달러 패권 유지 수단으로 바라보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특히 USDT와 USDC는 보유한 법정화폐의 상당 부분을 미국 국채에 투자하며, 미국 국채의 주요 수요처 역할까지 수행 중이다.

지역화폐를 스테이블코인으로?…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성공 조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의 구분도 필요하다. CBDC는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고 운영하는 화폐로, 통제성이 높고 프라이빗 블록체인 기반이기 때문에 공공 정책 목적에는 부합할 수 있지만, 글로벌 디지털 자산 생태계와는 잘 연결되지 않는다. 더욱이 CBDC가 은행의 수신 기능을 대체할 경우 산업금융에도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반면 스테이블코인은 ‘사적 화폐’로서, 글로벌 자산과 연결된 개방형 금융 생태계에서 활용된다. 다양한 목적의 사용성과 높은 자유도를 바탕으로 퍼블릭 블록체인 위에서 유연하게 작동하며, 금융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에서도 빠르게 채택되고 있다. 사실상 글로벌 결제 수단이자 블록체인 기반 서비스의 ‘디지털 현금’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달러화 일색이라는 점이다. 유로화, 엔화 등 주요 기축통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시도는 있었지만, 시장 내 존재감은 미미하다. 이는 여전히 건재한 달러의 위상을 대변해주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한국은 원화 결제 인프라가 이미 훌륭히 작동하고 있고, 카카오페이 등 플랫폼이 사실상 디지털화폐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가상자산 시장 측면에서도 업비트 등 국내 거래소 시스템은 원화 기반으로도 원활히 운영되고 있어 스테이블코인의 필요성이 덜한 것이 사실이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성공은 달러라는 기축통화 위에 가상자산이라는 편의적 형태가 부가되며 나타난 것이지 같은 효과를 원화 스테이블코인에서 기대하기는 어렵다.
지난 5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비트코인 2025 콘퍼런스 기조연설에서 JD 밴스 미국 부통령은 스테이블코인은 미국의 경제력을 배가 시키는 힘이라고 말했다. 사진=연합AFP
지난 5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비트코인 2025 콘퍼런스 기조연설에서 JD 밴스 미국 부통령은 스테이블코인은 미국의 경제력을 배가 시키는 힘이라고 말했다. 사진=연합AFP
디지털 경제 생태계 외화 기반으로 수렴되나

그럼에도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논의돼야 하는 이유는 현재보다 미래에 있다. 만약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전 세계 디지털 거래의 기본 단위가 된다면, 한국의 통화주권 및 디지털 경제 생태계가 점차 외화 기반으로 수렴될 위험이 있다. 특히 중국 보따리상, 글로벌 디지털 소비자, 외국인 근로자, 인공지능(AI) 에이전트 같은 새로운 경제 주체들이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국내에서 활동하게 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그 생태계의 기본 화폐 단위가 원화가 아닌 달러가 된다면, 그 영향은 실물경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또한 국내 거주자가 아닌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원화 결제가 번거롭다. 환전 수수료, 신용카드 제한, 온라인 결제의 비호환성 등 다양한 불편이 존재한다. 만약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있다면, 외국인이 보유한 가상자산을 쉽게 원화 스테이블코인으로 교환해 한국 내 다양한 디지털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관광, 쇼핑, 의료 서비스 등에서도 편의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질 수 있다.

한편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의 공공 활용 가능성을 넓힐 수 있는 촉매제이기도 하다. 정책금융, 세금 환급, 정부지원금 지급, 지역화폐 등 공공 자금의 디지털화는 반복되는 인프라 구축 부담을 수반하지만, 스마트 컨트랙트를 기반으로 한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면 훨씬 효율적인 시스템 구축이 가능하다. 특히 지역화폐는 스테이블코인과 결합할 경우 유통 추적성, 부정 사용 방지, 프로그램 가능한 조건부 지급 등 다양한 고도화가 가능하다.

다만 중요한 전제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사업이 민간 주도여야 한다는 점이다. 정부나 은행 주도의 경직된 구조는 스테이블코인의 확장성과 기술 진화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예를 들어, 디파이(DeFi) 생태계나 글로벌 블록체인 서비스는 대부분 오픈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API)와 스마트 컨트랙트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기존 은행 시스템은 이와 같은 환경에 쉽게 연동되지 않는다.

스테이블코인의 핵심은 '코드에 의한 신뢰', 즉 프로그램 가능한 금융에 있다. 스마트 컨트랙트를 통해 조건부 자동 상환, 실시간 담보 증명, 온체인 회계 공시가 가능해야 하며, 이로 인해 제3자의 개입 없이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는 구조가 요구된다. 하지만 전통적인 은행 중심 시스템은 이 같은 기술적 신뢰 구조의 구현에 한계가 있다.

민간 주도 스테이블코인이 필요한 이유

또한 국제 연동성 측면에서도 은행 주도 모델은 경쟁력이 떨어진다. 달러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은 이미 블록체인 생태계 내 다양한 글로벌 플랫폼과 연동돼 있으며, 민간 기업이 자본시장 구조와 기술 인프라를 결합해 빠르게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반면, 은행 기반 모델은 글로벌 디지털 자산 생태계와 연결성도 낮고, 민간 기업의 참여 유인도 떨어진다. 뒤집어 얘기하면, 민간 주도로 스테이블코인 사업을 추진하더라도 과도한 규제는 마찬가지의 결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민간 주도 스테이블코인이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사업성이 담보돼야 한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는 사용자로부터 받은 원화를 안전한 자산, 가령 국채, 머니마켓펀드(MMF)와 같은 자산으로 운용해 수익을 창출한다. 하지만 이를 통해 충분한 수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규모의 경제가 핵심이며,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수요가 제한적이라면 지속가능성이 위협받을 수 있다. 높은 수익을 위해 무리하게 운용할 경우 자산 손실과 함께 소비자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사업자 선정에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하고, 선정 이후에도 철저한 감독과 함께 유연한 제도 설계가 병행돼야 할 것이다.

기존 스테이블코인들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지금은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을 구가하는 테더의 USDT와 서클의 USDC도 수년간 다양한 스트레스 테스트를 거쳤다. USDT는 오랜 기간 준비금 투명성 논란에 시달렸고, 뱅크런에 준하는 대규모 인출을 수차례 겪었다. USDC 역시 2023년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사태 당시 예치금의 일부(약 33억 달러)가 손실 위기에 처했고, 한때 1USDC의 가격이 0.87달러까지 하락한 바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만드는 것’보다 ‘지속시키는 것’이 더 어렵다.
지난 2023년 파산 사태를 겪은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본사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사진=연합AP
지난 2023년 파산 사태를 겪은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본사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사진=연합AP
AI 에이전트 시대의 필수 인프라

마지막으로 스테이블코인을 대하는 규제당국의 태도도 성패를 가르는 핵심 요소다. 스테이블코인은 무기명 자산으로서 자본 유출, 자금세탁, 조세포탈 등에 악용될 소지가 있으며, 이는 규제당국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경직된 규제는 스테이블코인의 활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게 된다. 현재도 골드만삭스 및 블랙록이 참여한 USDC가 투명성과 규제 준수 측면에서 더 신뢰할 수 있음에도, USDT가 더 널리 쓰이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필요하다. 지금 당장의 실용성보다, 디지털 경제 주권과 향후 경제 구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 필요하다. 특히 필자가 과거 지적한 것처럼 향후 AI 에이전트가 주요 경제활동 주체가 된다면, 이들의 화폐는 디지털 네이티브 자산, 즉 가상자산이 될 가능성이 높다. AI 에이전트가 활동할 수 없는 나라가 돼선 안 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미래 경제의 자율성과 주권을 지키기 위한, 지금 우리가 준비해야 할 제도적 인프라이자 기술적 기반이다.

박태우 스페이스바 벤처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