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막강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기축통화로 군림해온 미 달러의 위상이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혼선과 글로벌 구조 변화로 흔들리고 있다. 달러 약세 시대의 포트폴리오 전략으로는 ‘자산 다각화를 통한 시장 참여’가 효과적이다

[마켓 인사이트]
지난 4월 브라질 부에노스아이레스 선물 가게에 내걸린 환율 표시. 사진=연합AFP
지난 4월 브라질 부에노스아이레스 선물 가게에 내걸린 환율 표시. 사진=연합AFP
북아메리카 최남단에 위치한 국가 파나마는 미 달러를 공식 통화로 사용한다. 자국 통화로 파나마 발보아가 있지만 대부분의 거래와 임금 지급, 세금 납부 등은 달러로 이뤄진다. 자국 통화의 가치를 미국 달러에 일정 비율로 고정해 놓은 ‘페그제’를 선택하고 있는 나라도 많다. 홍콩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미 달러를 법정 통화로 사용하거나, 페그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60여 개국에 달한다. 이런 선택이 가능한 이유는 달러가 ‘기축통화’이기 때문이다. 미 달러는 전 세계 외환 거래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국제 결제나 금융 거래의 기본이 되는 통화로 통용되고 있다. 미국의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 자유로운 자본 이동과 발달된 금융 시장 등은 달러의 지배력을 뒷받침해주는 근간이다.

미 국채·달러 매력 동반 약세

그러나 최근 미 달러에 대한 균열이 감지되고 있다. 주요국 통화 대비 미 달러의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 인덱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직전인 지난 1월 13일 109.96으로 올해 최고치를 기록한 뒤 10% 가까이 하락했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가 무차별적인 상호관세를 발표하며 무역전쟁을 시작한 지난 4월 2일 이후로는 하락세가 더욱 두드러졌다. 미국 국채 가격도 약세를 보이고 있다. 금리 상승은 채권 가격 하락을 의미하는데,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4월 초 3.9%에서 최근 4.5% 수준까지 올랐다. 전 세계가 선호하는 안전자산인 미 국채와 달러의 매력이 과거 대비 동반 약화된 것이다.
흔들리는 ‘킹 달러’…신흥국에서 기회를 찾아라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명목으로 펼친 무분별한 정책들이 오히려 미국 자산에 대한 불안감을 높인 것으로 보인다. 오락가락하는 무역 정책과 감세 법안, 이에 따른 미국 재정 악화 우려 등이 그것이다.

미국 의회예산처(CBO)에 따르면 2024년 미국 연방 부채 총액은 27조4000억 달러로 국내총생산(GDP)의 99% 수준이며, 10년 내에는 118%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해 최근 스티브 미란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의 "미국이 방위를 제공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10년물 국채 만기를 100년으로 교환하자"는 등의 황당한 제안도 세상에서 가장 신뢰받는 통화인 달러에 대한 의심을 키웠다.

달러는 여전히 대체 불가능한 기축통화다. 유로화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통화지만, 유로존 내 20여 개국의 재정 통합이 달성되기 어렵다는 점과 채권 시장 규모가 크지 않다는 점이 한계다. 중국 위안화의 경우 자본 유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기축통화와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그러나 글로벌 지정학적 긴장과 무역 갈등 심화는 점진적으로 달러 수요를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전 세계 무역에서 미국, 유럽 등 선진국과의 거래가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25%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신흥국 간 거래(중국 포함)는 상당 부분 현지 통화 또는 미 달러 이외의 통화로 대체되고 있다.

중앙은행의 달러 보유액 비중도 점진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이 70%에 달했으나 2024년 말에는 58% 수준까지 낮아졌다. 과거에는 아시아 국가들이 무역으로 벌어들인 경상수지 흑자가 자동적으로 외환보유액 증가로 이어졌으나, 최근에는 이 같은 흐름이 약화됐다. 대신 연기금과 보험사 등 민간 투자자들이 중앙은행의 빈자리를 채웠다. ‘기축통화’로서의 당위성이 아니라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달러가 선택되고 있다.

환헤지 거래 증가도 추가 하락 요인

지난 수년간 가장 높은 수익률을 안겨준 자산은 단연 ‘미국 주식’이었고, 미국 투자 열풍은 과도한 달러 보유로 이어졌다. 1990년 2조2000억 달러에 불과했던 외국인 투자자의 미국 금융자산 보유 금액은 현재 56조6000억 달러로 증가했다. 개인투자자와 기관투자가들은 미국 자산을 보유할 때 환율 리스크를 헤지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역사적으로 달러는 위험 선호가 후퇴할 때 강세를 보이면서 포트폴리오의 변동성을 낮춰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킹 달러’…신흥국에서 기회를 찾아라
주요국 대비 미국의 고금리가 이어지면서 환헤지 비용이 과거 대비 크게 늘어난 점도 헤지 비중 하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달러 약세를 전망하는 투자자들의 환헤지 수요가 점차 높아질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달러 매도 거래가 증가하게 된다면 추가적인 하락세를 보일 가능성도 열어둘 필요가 있다.

전술적인 관점에서 달러 약세 구간에서는 미국 이외의 자산이나 통화를 편입해 포트폴리오 다변화를 꾀해야 한다. 달러 약세는 곧 달러 이외 통화의 강세를 의미한다. 신흥국 통화가 강세로 전환하면, 환차익 수요를 노리는 외국인 투자자의 유입으로 주식과 채권이 동반 강세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최근에는 신흥국 내에서도 한국 주식의 매력이 돋보인다. 외국인 매수세가 강하게 유입되는 가운데 상법 개정에 따른 주주 친화 정책 등도 주가를 뒷받침하고 있다.

신흥국 중앙은행의 견조한 수요가 유지되고 있는 금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 인플레이션과 지정학적 리스크를 헤지하는 역할도 기대할 수 있다. 다만, 최근의 가격 부담이 상존한다는 점에서 조정 시 매수 전략이 유효하다는 판단이다.

최근의 달러 약세에는 구조적 요인과 경기 순환적인 요인이 혼재돼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불안과 미국 자산의 약세 등은 경기 순환적인 단기 약세 요인에 해당한다. 반면, 국제 무역과 거래에서 사용되는 달러의 역할, 외환보유액 비중의 변화 등의 구조적 변화는 장기적이고 점진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를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전략적 자산 배분(비중 조정)에 반영하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보경 SC제일은행 투자전략상품부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