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큰 인기를 끈 디지털 기기가 어떻게 용도 변화되었는지 살펴보자.
낡은 새로움을 찾아서
한때 미러리스 카메라가 전성기를 누렸지만, 수많은 브랜드가 시장에서 사라졌다. 그런 가운데 여전히 신제품을 출시하는 브랜드는 디자인적으로 공통점이 있다. 최근 출시된 후지필름의 ‘X-E5’ 미러리스 카메라가 대표적이다. 후지필름은 클래식한 디자인과 독특한 색감으로 빈티지 감성을 선호하는 소비자에게 꾸준히 사랑받아왔다. 성능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이들의 존재감은 소비자의 감성을 건드리는 클래식한 디자인 덕분이었다. 미래적이거나 트렌디한 디자인 대신 전통적 카메라 형태를 유지한 이유는 어쩌면 카메라가 ‘혁신의 상징’이 아니라 ‘감성적 물건’이라는 사실을 후지필름이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스마트폰 카메라 앱이 인기를 얻으면서 실용성이 떨어진 점을 역이용해 카메라는 사진을 찍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Z세대가 오래된 디지털카메라를 다시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낡은 새로움의 감성이 소비자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전통적 디자인을 고수하는 라이카 또한 꾸준히 신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라이카는 고급 브랜드로서 사치품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다양한 아티스트 및 패션 브랜드와 협업하며 기성세대는 물론 새로운 세대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몇몇 감성 디자인 브랜드를 제외한 디지털카메라 시장이 완전히 사라졌을까? 아니다. 미러리스 카메라는 영상 콘텐츠 시대에 필수 촬영 장비로 자리 잡았다. 카메라영상기기공업회(CIPA)의 2024년 디지털카메라 전체 출하량에 따르면, DSLR은 21% 감소했지만 미러리스 카메라는 오히려 14% 성장했다. 2024~2029년 연평균 성장률도 7.5%로 예측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영상 제작용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일반 소비자에게는 매력이 떨어졌다. AI가 실시간으로 사진을 보정하고 다양한 앱을 통해 고품질 이미지를 생성하는 스마트폰 카메라가 일반 소비자의 사진 촬영을 완벽하게 대체하기 때문이다. 실용성이 줄어든 것은 카메라만이 아니다. 고해상도 대형 TV는 어떨까? 국제가전박람회에서 천장을 수놓던 화려한 디스플레이는 여전히 감동적이지만, 소비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제품인지는 의문이다. TV가 필수품에서 선택적 상품으로 변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초개인화 시대에 TV는 비싸고, 무겁고, 무엇보다 공간을 많이 차지한다. 콘텐츠 소비 방식이 달라졌거니와 이동성이 핵심인 시대에 TV는 어떤 형태로 존재해야 할까? LG전자가 출시한 1인용 이동형 TV ‘스탠바이미’처럼, TV 제조사들은 이전과 다른 과감한 시도가 필요하다. 물론 도전을 뒷받침하는 것은 기술이다. 투명 디스플레이 기술은 ‘블랙 몬스터’라는 TV의 별명을 상쇄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TV를 보지 않을 때는 투명한 유리창처럼 보여, 창이나 벽의 일부인 듯 사용 가능하다. 이처럼 TV를 공간 친화적 기기로 바꾸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실내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대표적 디지털 기기는 오디오다. 대형 하이파이 오디오 시스템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적 오디오도 결코 작지 않기에 공간과의 자연스러운 조화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심미성을 강조한 제품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북유럽 디자인으로 유명한 뱅앤올룹슨이나 제니 오디오로 알려진 브리온베가의 ‘RR-226 라디오포노그라포’가 대표적이다. 실제 뱅앤올룹슨은 지난 6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북유럽 최대 규모의 디자인 축제 ‘3데이즈오브디자인(3days of Design)’에서 ‘미래 세대를 위한 디자인’을 주제로 시대를 초월한 장인 정신이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 수 있는지를 논의했다. 이처럼 오디오는 이제 음질만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어렵다. 집 안에 놓는 것만으로도 공간을 ‘힙’하게 만드는 인테리어 오브제가 바로 오디오다. 소재와 색상뿐 아니라 디자인 콘셉트도 중요하다. 소리 자체보다 눈에 보이는 형태와 시각적 가치가 더욱 중요해진 것이다. 물론 디자인은 첨단 기술로 뒷받침된다. 여러 스피커 유닛이 하나의 캐비닛에 담긴 시스템이 보편화됐고, 사용자의 위치 또는 공간을 인식해 최적의 입체 사운드를 제공하거나 360도 서라운드 음향을 구현하는 등 기술은 형태의 진화와 함께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뜻밖의 감각 발견
콘솔 게임기와 고성능 게이밍 PC도 예전만큼 필수 아이템은 아니다. 모바일 게임의 발전과 클라우드 게이밍의 등장으로 판매량과 사용 시간이 감소하는 추세다. 하지만 이러한 기기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비싸고 멋진 취미 아이템이나 컬렉터 아이템으로 변신하고 있다. 게이밍 PC는 RGB 조명과 수랭 쿨링 시스템을 갖춘 뛰어난 성능뿐 아니라 외형적 아름다움을 통해 사용자 취향을 반영하는 하나의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게임을 자주 하지 않더라도 게이밍 공간의 중심을 잡아주는 오브제가 된 것이다. 콘솔 게임기는 넷플릭스나 유튜브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는 종합 엔터테인먼트 허브로 쓰이고, 옛날 게임을 다시 즐길 수 있는 추억 소환 도구이기도 하다. 스마트폰 알림에 방해받지 않고 게임에 몰입할 수 있는 ‘디지털 디톡스’ 수단이기도 하다. 이제는 놀이 도구를 넘어 개인의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을 드러내는 상징이 되고 있다. 한편, 보조적 용도로 인식되던 디지털 기기에서 뜻밖의 장점이 발견되기도 했다. 전자책 리더기는 책을 물리적으로 보관하거나 휴대할 필요 없다는 효율성 덕분에 주목받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전자책 리더기의 진정한 장점은 오히려 디지털 디톡스로 밝혀졌다. 스마트폰으로 독서할 때 수시로 오는 알림이 독서를 방해하는 문제를 해결해 오직 책에만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기기로 인기를 얻고 있다. 커스텀 기계식 키보드는 기능성보다는 감각적 만족을 주는 아이템으로 인기가 높다. 다양한 단축키와 조명 효과도 있지만, 핵심은 타건감이다. 기계식 키보드마다 손끝에 전달되는 감촉이 다르기에 마치 손끝에서 느껴지는 예술품 같다. 키캡과 스위치를 사용자가 직접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다는 점도 감성을 자극한다. 결국 기능보다는 만지는 즐거움을 강조한 기계식 키보드는 저마다 다른 타건감으로 키보드 수집가들을 양산시키고 있다. AI로 원하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시대, 기능과 역할이 한계에 다다른 디지털 기기는 이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넘어 ‘어떤 느낌을 주는가’, ‘사용자를 어떻게 표현하는가’로 방향을 틀고 있다. 기술이 상향 평준화된 이후 사람들은 가치와 경험, 그리고 자신만의 감성을 구매한다. 이제 디지털 기기는 라이프스타일과 정체성을 반영하는 감성적 기호 상품으로 진화하고 있다.
글 조진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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