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년 넘게 국내 대표 임대차계약 형태의 자리를 지켜온 전세 제도가 점점 저물고 있다. 전세 사기 사태 이후 전세 수요가 확 꺾이기 시작한 데다, 정부가 전세 관련 대출과 보증 규제를 강화하면서 ‘전세의 월세화’가 가속화하고 있다
[부동산 이슈]
이 장점을 바탕으로 전세 제도는 수십 년 넘게 국내 대표 임대차 계약 형태의 자리를 지켜 왔다. 월세 살이를 하던 사회초년생이 결혼을 하고 돈을 모아 자가를 마련할 때까지 전세가 ‘중간 사다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최근 전세의 시대가 점점 저물고 있다. 2022년 말 터진 ‘전세 사기’ 사태 이후 전세 수요가 확 꺾이기 시작했다. 정부가 가계 부채 관리 차원에서 전세 관련 대출과 보증 규제를 강화한 것도 ‘전세의 월세화’를 부채질하고 있다.
전세 사기에 악용된 보증 제도
전세의 본질은 사적 금융이다. 그러나 무주택 서민이 주로 이용한다는 특성을 띤다. 이 때문에 정부가 전세 제도를 뒷받침해준 측면이 있다. 보증 제도를 선보인 게 대표적이다. 전세 계약이 끝났는데도 집주인이 정당한 사유 없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을 경우, 주택도시보증공사(HUG) 같은 보증기관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대신 반환해주는 제도다. 물론 일정 수준의 보증료는 받는다. ‘근생빌라’ 같은 불법 개조 주택 등은 보증 대상에서 제외된다.
HUG 전세 보증 문턱은 점차 낮아졌다. 2013년 도입 초기엔 미분양 주택이 대상이었다. 건설사가 전세 세입자를 들여 준공 후 미분양 물량을 털어낼 수 있도록 보증을 제공한 것이다. 2015년부터 사실상 모든 임대주택으로 가입 대상이 확대됐다. 2017년엔 아파트와 빌라(다세대·연립), 오피스텔 등 모든 유형의 HUG 전세보증 담보인정비율(LTV)이 100%로 늘었다. 매매 가격이 1억 원인 빌라의 전세보증금을 1억 원으로 책정해도, 전액을 HUG가 보증해준 것이다. 2018년엔 임차인이 임대인 동의 없이도 전세 보증에 가입할 수 있도록 했다.
사기범들은 감정평가사와 공모해 ‘업(up) 감정(감정평가액을 높이는 행위)’을 저질렀다. 이를 통해 시세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전세보증금을 책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HUG가 높은 수준으로 전세보증금반환보증을 해줬기에, 세입자를 무리 없이 구할 수 있었다. 결국 자기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임차인의 전세금으로 주택을 매수하는 ‘무자본 갭투자’ 고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경실련은 “무분별한 반환 보증 확대가 고의적인 전세 사기에 악용됐다”고 지적했다.
전세 사기 사태 후 월세화 가속
전세 사기 사태는 2022년 말부터 터지기 시작했다. 인천 미추홀구와 서울 강서구 등 전국 곳곳에서 ‘깡통주택’ 수백 채 이상을 보유한 ‘빌라왕’이 등장했다. 만약 전세 가격이 꾸준히 우상향했다면, 대규모 전세보증금 미반환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수 있다. 새로운 세입자에게 더 높은 전세금을 받기만 하면, 기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2년에 금리 인상 여파로 주택 매매·전세 가격이 하락하면서 전세 사기 피해가 커졌다. 국토교통부가 올해 7월까지 공식 인정한 전세 사기 피해자만 3만2185명에 달한다.
시장의 수요 변화 못지않게 보증 제도가 바뀐 것도 빌라 시장의 ‘전세의 월세화’를 이끌고 있다. 전세 사기에 악용됐다는 이유로 정부가 HUG 전세 보증 문턱을 높였기 때문이다. 정부는 전세 사기 사태 이후 공시가격의 126%까지 전세 보증에 가입할 수 있다는 ‘126% 룰’을 지난해 도입했다. 주택 가격 산정 기준을 ‘공시가의 140%’로 정하고, 담보인정비율(LTV)은 90%로 적용한 값이다. 그 전엔 공시가의 150%까지 가입이 가능했다. 주택 가격을 공시가의 150%로 정했고, LTV는 100%가 적용됐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 이 같은 전세 보증 가입 기준 강화의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빌라는 보통 임대인 한 명이 여러 채를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126% 룰 도입 등으로 수억 원의 역전세에 처하게 된 집주인이 늘어났다는 얘기다. 이는 단순히 기존 임대인의 경제난을 넘어, 빌라 공급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빌라 투자에 대한 기대이익이 줄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상반기 전국 비아파트 공급(인허가) 실적은 1만6152가구로, 지난해 상반기(1만8332가구)보다 11.9% 줄었다. 빌라는 서민과 신혼부부, 청년 등의 ‘보금자리’ 역할을 하는 만큼,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부동산 업계에선 HUG 전세 보증 가입 기준으로 시세를 활용하자는 의견이 나온다. 비아파트의 경우 공시가와 시세의 괴리가 특히 크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울 송파구 삼전동의 한 다세대주택 전용면적 23㎡의 올해 공시가격은 1억500만 원이다. 하지만 올해 5월 기준 KB의 인공지능(AI) 시세는 2억1800만 원으로 나온다. 성창엽 대한주택임대인협회장은 “신축을 하거나 새로 임대사업을 하고자 해도 초기엔 대출이나 일정 호실의 전세 계약 체결로 자본금을 확충해야 하는데, 보증가입 요건 강화는 이런 부분들을 어렵게 만든다”며 “(시세 활용 시) 임차인 입장에서도 보증 금액이 합당한지를 판단할 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빌라는 아파트에 비해 시세가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많다. 다만 최근엔 KB나 HUG 등 기관에서 빌라에 대한 시세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만큼, 이를 활용하면 된다는 주장이다. 정부가 HUG 전세 보증 가입 시 공시가 말고 감정가를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주긴 했다. 하지만 ‘업감정’ 폐해를 없애기 위해 ‘HUG 인정 감정가’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빌라 집주인들은 HUG 인정 감정가는 기존 ‘공시가의 126%’ 수준과 크게 차이가 없다고 항변하고 있다.
대출 규제에 아파트도 월세화
빌라에서 시작된 전세의 월세화가 아파트로도 확산하고 있다. 아파트는 전세 사기와는 무관했다. 오히려 ‘풍선효과’가 나타났다. ‘빌라 포비아’로 아파트에 대한 수요가 더 급등했기 때문이다. 전세금을 제때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서민들이 무리해서라도 빌라 대신 아파트에 거주하려 애를 썼다. 그런데도 아파트 시장에서 월세의 존재감이 점점 커지고 있는 건, 대출 규제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의 고강도 가계 부채 관리 방안(6·27 대책)엔 전세 관련 대출 규제도 다수 포함돼 있다. 수도권과 규제지역에서 갭투자에 주로 활용되는 ‘소유권 이전 조건부 전세대출’이 금지됐다. 분양 계약자가 세입자의 전세금으로 잔금을 치르는 게 불가능해졌다. 그렇다 보니 과거엔 전세로 풀렸을 물량이 속속 월세로 전환되고 있다. 또한 전세퇴거대출 한도가 1억원으로 제한됐다. 개별 금융사마다 규정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세입자도 보증금 미반환 우려가 커진 게 사실이다.
윤수민 NH농협은행 부동산전문위원은 “은행권이 가계대출 취급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다 보니 3분기 대출태도지수가 급락해, 보증금 5억 원 이상 전세 시장이 타격을 받고 있다”며 “결국 임차인은 월세나 반전세 시장으로 점점 밀려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인혁 한국경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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