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년 넘게 국내 대표 임대차계약 형태의 자리를 지켜온 전세 제도가 점점 저물고 있다. 전세 사기 사태 이후 전세 수요가 확 꺾이기 시작한 데다, 정부가 전세 관련 대출과 보증 규제를 강화하면서 ‘전세의 월세화’가 가속화하고 있다

[부동산 이슈]
서울 시내 한 부동산에 월세 안내문이 붙어 있다. 사진=연합뉴스
서울 시내 한 부동산에 월세 안내문이 붙어 있다. 사진=연합뉴스
전세는 한국에만 있는 임대차 제도로 꼽힌다. 외국은 월세가 일반적이다. 전세 제도에는 빛과 그림자가 모두 존재한다. 전세는 기본적으로 ‘사적 거래’라 보증금 미반환 리스크가 따를 수밖에 없다. 전세 제도가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를 부추겨 부동산 시장 불안을 일으킨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세입자 입장에선 주거비를 절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매달 꼬박꼬박 월세를 내야 한다면, 서민 가구가 목돈을 만들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장점을 바탕으로 전세 제도는 수십 년 넘게 국내 대표 임대차 계약 형태의 자리를 지켜 왔다. 월세 살이를 하던 사회초년생이 결혼을 하고 돈을 모아 자가를 마련할 때까지 전세가 ‘중간 사다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최근 전세의 시대가 점점 저물고 있다. 2022년 말 터진 ‘전세 사기’ 사태 이후 전세 수요가 확 꺾이기 시작했다. 정부가 가계 부채 관리 차원에서 전세 관련 대출과 보증 규제를 강화한 것도 ‘전세의 월세화’를 부채질하고 있다.

전세 사기에 악용된 보증 제도

전세의 본질은 사적 금융이다. 그러나 무주택 서민이 주로 이용한다는 특성을 띤다. 이 때문에 정부가 전세 제도를 뒷받침해준 측면이 있다. 보증 제도를 선보인 게 대표적이다. 전세 계약이 끝났는데도 집주인이 정당한 사유 없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을 경우, 주택도시보증공사(HUG) 같은 보증기관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대신 반환해주는 제도다. 물론 일정 수준의 보증료는 받는다. ‘근생빌라’ 같은 불법 개조 주택 등은 보증 대상에서 제외된다.

HUG 전세 보증 문턱은 점차 낮아졌다. 2013년 도입 초기엔 미분양 주택이 대상이었다. 건설사가 전세 세입자를 들여 준공 후 미분양 물량을 털어낼 수 있도록 보증을 제공한 것이다. 2015년부터 사실상 모든 임대주택으로 가입 대상이 확대됐다. 2017년엔 아파트와 빌라(다세대·연립), 오피스텔 등 모든 유형의 HUG 전세보증 담보인정비율(LTV)이 100%로 늘었다. 매매 가격이 1억 원인 빌라의 전세보증금을 1억 원으로 책정해도, 전액을 HUG가 보증해준 것이다. 2018년엔 임차인이 임대인 동의 없이도 전세 보증에 가입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 2023년 강서구 화곡본동 주민센터에 설치된 전세피해지원 상담 부스. 사진=연합뉴스
지난 2023년 강서구 화곡본동 주민센터에 설치된 전세피해지원 상담 부스. 사진=연합뉴스
전세보증금반환보증 가입 실적은 수직 상승했다. 경제정의실천연합의 분석에 따르면 2013년 765억 원(451건)에 불과하던 가입 금액은 2023년에 71조3000억 원(31만4456건)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이런 보증 제도의 부작용도 점점 나타나게 됐다. 전세 사기에 악용된 게 대표 사례다. 일부 악덕 임대인이 감정평가사, 공인중개사, 분양업자 등과 공모해 전세금을 부풀린 것이다. 빌라(다세대·연립)의 경우 아파트와 달리 시세가 정확히 형성돼 있지 않다는 빈틈을 노렸다.

사기범들은 감정평가사와 공모해 ‘업(up) 감정(감정평가액을 높이는 행위)’을 저질렀다. 이를 통해 시세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전세보증금을 책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HUG가 높은 수준으로 전세보증금반환보증을 해줬기에, 세입자를 무리 없이 구할 수 있었다. 결국 자기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임차인의 전세금으로 주택을 매수하는 ‘무자본 갭투자’ 고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경실련은 “무분별한 반환 보증 확대가 고의적인 전세 사기에 악용됐다”고 지적했다.

전세 사기 사태 후 월세화 가속

전세 사기 사태는 2022년 말부터 터지기 시작했다. 인천 미추홀구와 서울 강서구 등 전국 곳곳에서 ‘깡통주택’ 수백 채 이상을 보유한 ‘빌라왕’이 등장했다. 만약 전세 가격이 꾸준히 우상향했다면, 대규모 전세보증금 미반환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수 있다. 새로운 세입자에게 더 높은 전세금을 받기만 하면, 기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2년에 금리 인상 여파로 주택 매매·전세 가격이 하락하면서 전세 사기 피해가 커졌다. 국토교통부가 올해 7월까지 공식 인정한 전세 사기 피해자만 3만2185명에 달한다.
전세 사기, 대출 규제에…‘월세의 시대’ 빨라진다
전세 사기, 대출 규제에…‘월세의 시대’ 빨라진다
전세 사기 사태 이후 빌라 등 비(非)아파트 시장에서 전세는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혹시 모를 전세금 미반환 우려 때문에 수요자들이 월세 물건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국토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전국 비아파트 전월세 거래 중 월세(보증부월세와 반전세 포함) 비중은 75.2%를 나타냈다. 최근 5년 평균(57.6%) 대비 17.6%포인트 높은 수치다. 지난해 상반기(69.6%)와 비교해도 월세 선호 현상이 계속 짙어지고 있다. 월세에 수요가 몰리면서 자연스레 세입자의 주거비 부담도 높아지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의 서울 빌라 월세지수는 지난 6월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시장의 수요 변화 못지않게 보증 제도가 바뀐 것도 빌라 시장의 ‘전세의 월세화’를 이끌고 있다. 전세 사기에 악용됐다는 이유로 정부가 HUG 전세 보증 문턱을 높였기 때문이다. 정부는 전세 사기 사태 이후 공시가격의 126%까지 전세 보증에 가입할 수 있다는 ‘126% 룰’을 지난해 도입했다. 주택 가격 산정 기준을 ‘공시가의 140%’로 정하고, 담보인정비율(LTV)은 90%로 적용한 값이다. 그 전엔 공시가의 150%까지 가입이 가능했다. 주택 가격을 공시가의 150%로 정했고, LTV는 100%가 적용됐기 때문이다.
전세 사기, 대출 규제에…‘월세의 시대’ 빨라진다
HUG의 전세 보증 범위가 축소된 만큼, 곳곳에서 ‘역전세(이전 계약보다 전셋값 하락)’가 속출했다. 공시가격이 2억 원인 빌라를 가정할 경우 전세금 최대 금액이 3억 원에서 2억5200만 원으로 줄어든 셈이다. 전세금을 그 이상으로 책정하면 HUG의 전세 보증에 가입할 수 없다. 그런데 전세 사기 사태를 거치면서 HUG 보증에 가입된 주택에만 거주하려는 수요자들 심리가 강해졌다. 따라서 보증금을 수천만 원씩 내려야 하는 집주인들이 많아지자, 보증금 일부를 월세로 전환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서울 시내 부동산에 부착된 전세 매출 안내문. 사진=연합뉴스
서울 시내 부동산에 부착된 전세 매출 안내문. 사진=연합뉴스
전세 보증 시 시세 활용해야

최근 들어서 이 같은 전세 보증 가입 기준 강화의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빌라는 보통 임대인 한 명이 여러 채를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126% 룰 도입 등으로 수억 원의 역전세에 처하게 된 집주인이 늘어났다는 얘기다. 이는 단순히 기존 임대인의 경제난을 넘어, 빌라 공급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빌라 투자에 대한 기대이익이 줄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상반기 전국 비아파트 공급(인허가) 실적은 1만6152가구로, 지난해 상반기(1만8332가구)보다 11.9% 줄었다. 빌라는 서민과 신혼부부, 청년 등의 ‘보금자리’ 역할을 하는 만큼,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부동산 업계에선 HUG 전세 보증 가입 기준으로 시세를 활용하자는 의견이 나온다. 비아파트의 경우 공시가와 시세의 괴리가 특히 크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울 송파구 삼전동의 한 다세대주택 전용면적 23㎡의 올해 공시가격은 1억500만 원이다. 하지만 올해 5월 기준 KB의 인공지능(AI) 시세는 2억1800만 원으로 나온다. 성창엽 대한주택임대인협회장은 “신축을 하거나 새로 임대사업을 하고자 해도 초기엔 대출이나 일정 호실의 전세 계약 체결로 자본금을 확충해야 하는데, 보증가입 요건 강화는 이런 부분들을 어렵게 만든다”며 “(시세 활용 시) 임차인 입장에서도 보증 금액이 합당한지를 판단할 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빌라는 아파트에 비해 시세가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많다. 다만 최근엔 KB나 HUG 등 기관에서 빌라에 대한 시세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만큼, 이를 활용하면 된다는 주장이다. 정부가 HUG 전세 보증 가입 시 공시가 말고 감정가를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주긴 했다. 하지만 ‘업감정’ 폐해를 없애기 위해 ‘HUG 인정 감정가’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빌라 집주인들은 HUG 인정 감정가는 기존 ‘공시가의 126%’ 수준과 크게 차이가 없다고 항변하고 있다.

대출 규제에 아파트도 월세화

빌라에서 시작된 전세의 월세화가 아파트로도 확산하고 있다. 아파트는 전세 사기와는 무관했다. 오히려 ‘풍선효과’가 나타났다. ‘빌라 포비아’로 아파트에 대한 수요가 더 급등했기 때문이다. 전세금을 제때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서민들이 무리해서라도 빌라 대신 아파트에 거주하려 애를 썼다. 그런데도 아파트 시장에서 월세의 존재감이 점점 커지고 있는 건, 대출 규제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의 고강도 가계 부채 관리 방안(6·27 대책)엔 전세 관련 대출 규제도 다수 포함돼 있다. 수도권과 규제지역에서 갭투자에 주로 활용되는 ‘소유권 이전 조건부 전세대출’이 금지됐다. 분양 계약자가 세입자의 전세금으로 잔금을 치르는 게 불가능해졌다. 그렇다 보니 과거엔 전세로 풀렸을 물량이 속속 월세로 전환되고 있다. 또한 전세퇴거대출 한도가 1억원으로 제한됐다. 개별 금융사마다 규정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세입자도 보증금 미반환 우려가 커진 게 사실이다.
강서구 화곡동 빌라촌. 사진=한국경제
강서구 화곡동 빌라촌. 사진=한국경제
임차인의 전세대출 레버리지도 줄어들게 됐다. 전세 관련 정책금융대출인 버팀목대출의 한도가 감소했다. 생애 최초 기준 기존 대출한도가 2억 원이었는데, 1억5000만 원으로 조정됐다. 수도권 신혼부부의 대출가능 최대 금액도 3억 원에서 2억5000만 원으로 줄었다. 전세대출 보증 비율을 90%에서 80%로 강화하고, 전세대출에 대한 금융권의 심사도 한층 까다로워졌다. 정부가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에 전세대출을 포함시킬 수 있다는 얘기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이렇게 되면 전세대출 문턱이 한층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전세 사기, 대출 규제에…‘월세의 시대’ 빨라진다
국토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전국 아파트 전월세 거래 중 월세가 차지하는 비율은 46.1%였다. 최근 5년 평균(40.1%)을 크게 웃돈다. 6·27 대책의 영향이 본격 반영되는 7월 통계부턴 월세 비중이 훨씬 더 커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실제 시중에서 아파트 전세 매물은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서울 강북에서도 고가 월세가 잇따르고 있다. 동대문구 ‘휘경자이디센시아’ 전용 84㎡에선 최근 보증금 5000만 원, 월세 270만 원에 임대차 계약이 체결됐다.

윤수민 NH농협은행 부동산전문위원은 “은행권이 가계대출 취급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다 보니 3분기 대출태도지수가 급락해, 보증금 5억 원 이상 전세 시장이 타격을 받고 있다”며 “결국 임차인은 월세나 반전세 시장으로 점점 밀려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인혁 한국경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