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브랜드마다 저마다의 역사와 전통을 내세우지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위스키 생산 면허를 가진 증류소는 아일랜드의 부쉬밀로 기록된다. 무려 417년 전부터 위스키를 만들었다.

위스키 이야기
올드 부쉬밀 증류소는 1784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올드 부쉬밀 증류소는 1784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원조’ 아이리시 위스키

특정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먹자골목에 들어서면, 가게마다 이름 앞에 ‘원조’라는 말이 붙어 있다. 누가 먼저 이 골목에서 음식 장사를 시작했는지 가게 이름으로 겨뤄보자는 듯하다. 위스키 업계에도 이런 원조 논쟁이 존재한다. 보통 위스키 종주국이라고 하면 스코틀랜드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 얘기를 들으면 몹시 언짢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아일랜드인들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기원전 5세기쯤 아일랜드 수호성인 성 패트릭(Saint Patrick)이 타국에서 증류 기술을 배워 와 ‘우스게 바하(Uisce Beatha·게일어로 생명의 물)’를 처음 생산했다고 한다. 물론 설화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도 아일랜드에서는 매년 3월 17일 녹색 옷을 입고 위스키를 마시며 ‘성 패트릭 데이’를 기념한다.

수세기째 이어지는 두 나라 간의 원조 논쟁에는 여전히 갑론을박이 존재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존재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위스키 증류소가 아일랜드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증류소의 이름은 부쉬밀(Bushmills). 놀랍게도 이곳에서는 여전히 위스키를 생산 중이다.

부쉬밀의 역사는 1608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우리 역사로 치자면 광해군이 즉위한 해다. 당시 아일랜드를 통치하던 영국 왕 제임스 1세는 북아일랜드 앤트림 카운티 부쉬밀 지역에 주류 생산 면허를 부여했다. 다시 말해 부쉬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위스키 생산 면허를 가진 증류소다. 스코틀랜드 최초의 공식 합법 증류소로 기록된 몰트락과 글렌리벳이 1800년대 초반에야 면허를 취득했으니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하다.
부쉬밀은 10개의 대형 포트 스틸에서 삼중 증류를 통해 생산된다.
부쉬밀은 10개의 대형 포트 스틸에서 삼중 증류를 통해 생산된다.
이후 1784년 ‘올드 부쉬밀 증류소(Old Bushmills Distillery)’가 설립되면서 부쉬밀 지역의 위스키 생산은 더욱 체계화되고 상업화됐다. 당시 대부분의 위스키가 농부들에 의해 가내수공업 형태로 이루어진 점을 감안하면, 부쉬밀의 면허 취득과 공식적인 증류소 설립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785년, 아일랜드에 맥아세가 도입됐다. 맥아(malt·싹이 튼 보리)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모든 것에 세금을 부과하는 이 법을 회피하기 위해 대부분의 위스키 생산자들은 밀주를 만들거나 맥아가 아닌 다른 곡물을 섞는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부쉬밀은 전통적인 위스키 생산 방식을 고수했다. 높은 품질의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아일랜드에서 재배한 고품질의 맥아만을 사용했을 정도다.

부쉬밀은 그후로 지금까지 전통을 고집하며 위스키를 만들고 있다. 현재도 맥아 건조와 증류 작업부터 숙성, 병에 담는 보틀링까지 모든 제조 과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한다. 타협 없는 제조 철학도 여전하다. 가령 블렌디드위스키인 ‘부쉬밀 오리지널’은 55%, ‘부쉬밀 블랙 부쉬’는 80%의 몰트 함량을 자랑하는데, 이는 전 세계 블렌디드위스키 중 손에 꼽을 만큼 높은 함유량이다.
1899년 파리만국박람회 골드메달
1899년 파리만국박람회 골드메달
부드러운 목 넘김의 비밀

부쉬밀은 아이리시 위스키 중 가장 많은 수상 경력을 자랑한다. 50회 이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화려한 수상 경력의 시작은 무려 1899년 ‘파리만국박람회’로 거슬러 오른다. 지금도 프랑스 파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에펠탑이 처음 공개된 행사였다. 당시 부쉬밀은 위스키로는 이례적으로 만국박람회 금메달을 수상했는데, 이는 전 세계 시장에 부쉬밀이라는 이름을 떨친 결정적인 계기였다. 쏟아지는 수출 문의에 증기선까지 구매했을 정도. 지금도 부쉬밀 하면 떠오르는 사각형의 병 디자인은 당시 배에 보다 많은 양의 위스키를 실을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부쉬밀 오리지널은 1888년의 레시피로 현재까지 생산된다. 사진은 1950~1070년 대의 올드 보틀.
부쉬밀 오리지널은 1888년의 레시피로 현재까지 생산된다. 사진은 1950~1070년 대의 올드 보틀.
‘부드럽다’, ‘섬세하고 깔끔하다’ 위스키 애호가들은 부쉬밀의 풍미를 이렇게 평가한다. 특히 실크처럼 부드럽게 넘어가는 목 넘김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다. 군더더기 없는 맛의 비밀은 증류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보통의 스카치위스키가 두 번 증류하는 데 반해 부쉬밀은 세 번의 증류 과정을 거친다. 첫 증류에서 잡미를 없애고, 두 번째 증류에서는 알코올의 순도를 높이며, 마지막 과정에서는 향을 정제하면서 깨끗하고 부드러운 맛을 살린다는 설명이다. 증류 과정이 더해질수록 스피릿의 풍미는 더 가볍고 부드러워진다. 이와 함께 불순물 제거도 계속되기 때문에 위스키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숙취가 덜하다는 우스갯소리도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40%의 알코올 도수를 느낄 새도 없이 목 넘김이 부드럽고 편안하다. 부드럽지만 밋밋하지 않고, 달콤하지만 과하지 않은 맛이 부쉬밀의 가치를 끌어올린다. 이는 하이볼 제조 시 강점으로 작용한다. 하이볼은 어떤 위스키를 사용했느냐에 따라 맛과 향이 완전히 달라진다. 많은 위스키 애호가들은 부쉬밀, 그중에서도 1888년의 레시피로 생산하는 ‘부쉬밀 오리지널’을 최고의 위스키로 뽑는다. 라이트한 보디감 때문에 얼음과 섞이면 그 부드러움이 배가 된다는 것이다.

반면 ‘부쉬밀 21년’에서는 아이리시 위스키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부쉬밀은 아이리시 위스키 중 유일하게 싱글 몰트위스키 라인업을 갖추고 있다. 그중 21년은 올롤로소 셰리 캐스크와 버번 캐스크에서 19년 이상 숙성한 후, 마데이라 캐스크에서 2년 동안 추가 숙성하는데, 한 겹씩 더해지는 맛의 레이어가 일품으로 다른 아이리시 위스키가 흉내 낼 수 없는 깊고 중후한 독창적 풍미를 제공한다.


이승률 기자 ujh881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