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에는 루이 비통이 커피를 내리고, 구찌가 파스타를 만들며, 자라가 쿠키를 구웠다. 브랜드를 마시고 맛보는 시대, 패션 하우스는 왜 미식을 탐하는 걸까.
2025 트렌드
이른바 청담동 명품 거리의 풍경이 바뀌고 있다. 쇼윈도 앞을 서성이는 사람들의 목적이 비단 새 상품을 구매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그들은 매장 깊숙한 곳, 혹은 가장 전망 좋은 층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디저트를 즐기기 위해 기꺼이 줄을 선다.
이러한 변화의 최전선에는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루이 비통이 있다. 루이 비통은 지난 9월 청담동 루이 비통 플래그십 스토어 4층에 ‘르 카페 루이 비통(Le Café Louis Vuitton)’을 공식 오픈했다. 2023년 ‘우리 루이 비통’을 시작으로 네 차례 팝업 레스토랑을 선보인 바 있지만, 상설 매장은 이곳이 처음이다. 매장 안으로 들어서면 루이 비통의 아이덴티티라 할 수 있는 여행용 트렁크를 모티프로 한 인테리어가 손님을 맞는다. 천장 오브제는 브랜드의 여행 철학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며, 마치 파리의 살롱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미식의 지휘봉을 잡은 이는 한국인 최초로 루이 비통과 협업한 윤태균 총괄 셰프다. 그는 아르노 동켈레와 파티시에 막심 프레데릭 등 세계적 스타 셰프의 멘토링을 바탕으로 프렌치 요리의 정교함에 한국적 풍미를 입혔다. 대표 메뉴는 시저 샐러드에 유자 드레싱을 곁들인 ‘유자 시저 샐러드 이클립스’와 전통 만두를 재해석한 ‘비프 만두’ 등이다. 루이 비통 모노그램이 정교하게 그려진 라테와 제철 식재료를 활용한 메뉴는 접시 위에 차려진 컬렉션 쇼처럼 다가온다. 루이 비통은 지난 11월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루이 비통 비저너리 서울’을 선보이며 ‘르 카페 루이 비통’을 비롯해 초콜릿 숍 ‘르 쇼콜라 막심 프레데릭 앳 루이 비통’과 레스토랑 ‘제이피 앳 루이 비통’을 오픈하기도 했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럭셔리 브랜드 구찌 역시 미식 전쟁에 참전했다. 지난 9월, 2022년 이태원에 오픈한 ‘구찌 오스테리아’를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로 이전하며 ‘구찌 오스테리아 다 마시모 보투라 서울(Gucci Osteria da Massimo Bottura Seoul)’로 새롭게 리뉴얼 오픈한 것이다. 이탈리아 피렌체와 미국 베벌리힐스, 일본 도쿄에 이어 전 세계 네 번째로 선보인 이곳에서는 고급스러움과 친근함이 공존하는 미식 경험을 제안한다. ‘수직 공원’ 콘셉트를 반영한 공간은 전면 유리창을 통해 180도 파노라마 뷰를 선사하며, 도심 속 공중 정원을 연상시키는 여유를 더한다. 전형규 총괄 셰프가 리뉴얼 오픈을 기념해 선보인 ‘서울 가든’이나 ‘전복 타코’ 같은 메뉴에서는 이탈리아 전통 레시피와 한국의 식재료를 과감하게 결합한 실험 정신이 돋보인다. 구찌 특유의 화려하고 맥시멀한 패턴의 식기 위에 놓인 요리는 미각뿐 아니라 시각적 즐거움을 극대화하며, 브랜드가 추구하는 미학을 오감으로 전한다.
국내 패션 기업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 한섬은 지난 11월 타임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청담동에 오픈하며, 자체 브런치 카페 브랜드 ‘카페 타임(Café TIME)’을 숍인숍 형태로 선보였고, 같은 달 오픈한 디자이너 우영미의 첫 번째 서울 플래그십 스토어 ‘우영미 이태원’에는 브랜드 감성을 담은 ‘카페 드 우영미(Café de Wooyoungmi)’가 문을 열었다. 우영미 이태원은 세계적 미쉐린 셰프 알랭 뒤카스와 협업한 레스토랑 오픈도 앞두고 있다.
왜 패션 하우스들은 본업인 옷과 가방을 넘어 유통기한이 짧고 관리도 까다로운 F&B 사업에 공들이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브랜드 세계관의 공감각적 확장이다. 과거 패션은 디자인과 소재, 즉 시각과 촉각에 의존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 이미지만으로는 차별화된 경험을 주기 어렵다. 미식은 미각과 후각, 청각, 공간이 주는 분위기까지 아우르는 복합적 경험이다. 1~2시간 동안 브랜드가 큐레이션한 공간에 온전히 머무르며 즐기는 식사는 브랜드가 제안하는 우아한 삶의 태도를 몸소 체험하는 과정이다. 이 외에도 브랜드 진입 장벽을 낮추는 일종의 락인(잠금) 효과가 기대된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가방은 2030세대나 일반 대중에게 심리적·경제적 장벽이 높다. 하지만 2만 원짜리 디저트나 10만 원대 코스 요리는 다르다. 일종의 스몰 럭셔리로, 소비자는 비교적 적은 금액으로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소유했다는 만족감을 느낀다. 이 긍정적 경험이 쌓이면, 훗날 구매력이 갖춰졌을 때 해당 브랜드의 제품을 선택할 확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F&B는 미래의 잠재 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우아하고 세련된 초대장인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글로벌 패션 하우스의 F&B 실험이 한국 시장에서 유독 공격적이고 활발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현재 서울은 전 세계에서 가장 트렌디하고 역동적인 시장이다. 한국 소비자들은 새로운 경험에 돈을 아끼지 않으며, 미식을 하나의 문화생활이자 과시할 수 있는 콘텐츠로 소비한다. 한국 특유의 인증샷 문화도 큰 요인이다. 브랜드 로고가 정교하게 그려진 라테 아트나 명품 식기에 담긴 디저트 사진이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확산되는 파급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고객들이 자발적으로 올리는 고퀄리티 사진은 브랜드 입장에서 비싼 마케팅보다 더 큰 홍보 효과가 있다. 또 한국은 글로벌 명품 시장에서 매출 규모가 최상위권에 속한다. 한국에서 명품은 사치품인 동시에 취향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이다. 이를 잘 파악한 브랜드들은 한국 소비자에게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함으로써 브랜드 충성도를 공고히 하려 한다. 글로벌 본사 입장에서도 서울은 완벽한 테스트베드다. 까다로운 소비자의 취향을 시험하며, 소비 비중이 큰 아시아 시장의 트렌드를 파악하는 것이다. 패션 하우스가 미식에 집중하는 현상은 비즈니스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물건을 팔아 수익을 남기는 행위를 넘어 고객의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고 정서적 교감을 나누겠다는 고도의 브랜딩 전략이다. 루이 비통이 디저트를 통해 여행의 미학을 이야기하고 구찌가 런치 코스를 통해 이탈리아 장인 정신을 이야기하듯, 이제 음식은 브랜드의 철학을 전달하는 가장 부드럽고 강력한 미디어로 자리 잡고 있다.
글 조진혁 프리랜서
이승률 기자 ujh8817@hankyung.com
© 한경매거진&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