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적립금이 500조원에 육박했지만 정작 은퇴 이후 자산을 어떻게 ‘꺼내 쓸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논의는 부족하다. 은퇴 자산 관리의 성패는 적립이 아니라 인출 단계에서 결정된다. 특히 은퇴 초기의 ‘수익률 순서 리스크’를 관리하지 못하면 자산 수명이 크게 단축될 수 있다.

[마켓 리더의 시각]
적립은 기술, 인출은 생존…연금 체질 바꿔라
대한민국 퇴직연금 적립금 500조 원 시대를 앞두고 있다. 매년 수십조 원의 자금이 파도처럼 유입되며 퇴직연금은 이제 직장인들의 가장 강력한 은퇴 보루가 됐다. 하지만 외형적 성장의 화려함 뒤에는 차가운 진실이 숨어 있다. 시장의 규모는 커졌지만, 정작 그 돈을 어떻게 '꺼내 써야 할지'에 대한 전략적 준비는 처참할 정도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상품을 고를지, 수익률을 어떻게 높일지,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해서는 밤을 새워 토론한다. 그러나 은퇴 이후 자산관리의 진짜 승부처는 '적립'이 아니라 '인출' 단계에서 결정된다. 퇴직연금 500조 시대, 당신의 포트폴리오가 은퇴 후에도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냉정하게 자문해봐야 할 때다.

시장의 온기에 취한 ‘레드존’의 함정

'관리하며 쓴다'는 것은 단순히 통장에서 돈을 인출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자산의 수명을 결정짓는 고도의 공학적 설계다. 적립기에는 '시간'이 투자자의 가장 든든한 아군이다. 설령 시장이 폭락하더라도 매달 들어오는 급여로 추가 납입을 하며 단가를 낮출 수 있고(코스트 에버리징), 장기적인 회복을 기다릴 여유가 있다.

하지만 인출기가 시작되는 순간, 시간은 가장 무서운 적이 된다. 자산의 감소와 생활비 인출이 동시에 발생하는 구조 때문이다. 하락장에서도 생활비를 위해 자산을 매도해야 하는 상황은 은퇴자에게 치명적이다. 적립기에는 시장 하락이 '저가 매수'의 기회였지만, 인출기에는 '자산 고갈의 가속페달'이 된다. 동일한 자산이라도 어떤 인출 구조를 가졌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30년을 버티고, 누군가는 15년 만에 빈털터리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 필자가 상담 현장에서 만난 50대 후반 직장인 A씨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은퇴를 단 2년 앞두고 있었지만, 최근 몇 년간 이어진 강세장에 고무돼 포트폴리오의 90% 이상을 공격적인 위험자산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자산 규모가 커질수록 수익에 대한 기대감도 함께 커진 탓이다. 그는 “시장이 이렇게 좋은데, 조금이라도 더 불려서 은퇴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이는 대단히 위험한 도박이다. 은퇴 인출을 코앞에 둔 시점은 이른바 ‘레드존(red zone)’에 진입한 시기다. 이때 발생하는 단 한 번의 폭락은 지난 30년간 쌓아 온 공든 탑을 무너뜨릴 수 있다. 자산 규모가 클수록 하락장에서 입는 절대적인 손실 금액은 커지며, 인출 직전의 손실은 회복할 시간적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전문가로서 권고하는 골든타임은 ‘은퇴 인출 최소 3년 전’이다. 이때부터는 시장의 온기에 취해 있을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위험자산 비중을 축소하고 안전자산의 방어막을 구축해야 한다. 보수적인 접근이 필요한 이유는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생존’을 담보하기 위해서다.
적립은 기술, 인출은 생존…연금 체질 바꿔라
은퇴 이후 자산관리에서 던져야 할 질문은 "이 자산으로 얼마나 벌 수 있는가"가 아니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이 자산으로 내 생애 마지막 날까지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는가"여야 한다.
대부분의 퇴직연금 포트폴리오는 여전히 '성장' 중심이다. 하지만 은퇴 이후에는 '생존' 중심으로 체질을 완전히 개선해야 한다. 투자 목표 자체가 최대 수익이 아니라 '자산 지속성'으로 전환돼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은퇴 초기 5년의 성적표가 전체 은퇴 생활의 성패를 좌우한다. 이때 투자자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함정이 바로 '수익률 순서 리스크'다.
이란전쟁 여파로 코스피 지수가 급락 마감한 지난 3월 4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전광판에 코스피 지수 종가가 표시되어 있다. 사진=한국경제
이란전쟁 여파로 코스피 지수가 급락 마감한 지난 3월 4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전광판에 코스피 지수 종가가 표시되어 있다. 사진=한국경제
현금성 완충 자산 확보가 먼저

수익률 순서 리스크(sequence of returns risk)란 동일한 평균수익률을 기록하더라도, 수익률이 발생하는 ‘순서’에 따라 인출 결과가 천양지차로 달라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은퇴 설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상식처럼 통용되지만, 일반 투자자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개념이다.
이 리스크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확인하기 위해 초기 자산 5억 원에서 매년 3000만 원(연 6% 수준)을 인출하며 10년간 운용하는 시뮬레이션을 가정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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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례 모두 10년 동안의 산술적인 평균수익률은 0%로 동일하다. 하지만 10년 후 통장에 남은 잔액은 그야말로 비극적인 차이를 보인다.

초기 상승을 경험한 B의 자산은 인출을 계속하면서도 약 4억2000만 원 수준을 유지하지만, 초기 하락을 맞이한 A의 자산은 불과 10년 만에 약 1억2000만 원 수준으로 쪼그라든다. 똑같은 돈으로 시작해 똑같은 평균수익률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수익이 발생한 순서'가 달랐다는 이유만으로 약 3억 원에 가까운 자산 격차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는 이유는 인출기 자산의 '복리 저주' 때문이다. 초기 하락장에서 생활비를 인출하면, 줄어든 자산에서 다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후 시장이 회복돼 10%의 높은 수익이 나더라도, 이미 원금(씨앗)이 처참하게 깎여 나간 상태라 회복할 힘을 잃게 된다. 은퇴 직후 맞이하는 하락장은 단순한 손실이 아니라, 자산의 생명력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독약인 셈이다.

현재 한국 퇴직연금 시장의 가장 큰 비극은 인출 전략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가 실종됐다는 점이다. 금융기관들은 화려한 펀드 라인업과 수익률 경쟁에만 열을 올린다. 인출 설계는 오롯이 개인의 판단과 운에 맡겨져 있다.

준비되지 않은 인출은 시장하락기에 자산 고갈 속도를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만든다. 반면, 제대로 된 인출 구조를 갖춘 포트폴리오는 시장하락기에 위험자산을 매도하는 대신 준비된 '현금성 완충 자산'을 먼저 사용한다. 위험자산이 회복될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다. 결국 은퇴 자산의 안정성은 규모가 아니라, 변동성을 이겨낼 수 있는 '인출 구조'에서 결정된다.

생존을 위한 세 가지 인출 전략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높은 수익률에 매몰되지 않고 '초기 인출 충격'을 견디기 위한 세 가지 원칙을 제안한다.

첫째, 3~5년 치 생활비를 '인출 완충 자산'으로 분리하라. 시장이 하락할 때 헐값에 주식형 자산을 팔지 않아도 되도록 단기 국채나 예금 등 안전자산을 미리 확보해야 한다.

둘째, '가변적 인출률'을 적용하라. 자산 규모나 시장 상황에 관계없이 고정된 금액을 인출하는 것은 위험하다. 시장이 좋지 않을 때는 인출 규모를 스스로 통제하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셋째, 은퇴 단계에 맞는 ‘동적 자산 배분’으로 재편하라. 수익률 순서 리스크와 장수 리스크(물가 상승 위험), 이 두 위협은 서로 반대 방향에서 자산을 공격한다. 어느 한쪽만 방어하면 나머지 하나에 무너진다. 많은 은퇴자가 실수를 범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변동성을 피하겠다고 모든 자산을 안전자산에 몰아넣는 것이다.
적립은 기술, 인출은 생존…연금 체질 바꿔라
"하지만 인플레이션을 방어하고 30년 이상의 인출기를 버티기 위해서는 포트폴리오 내 위험자산 비중을 일정 수준 이상 유지해야 한다. 글로벌 연구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벤젠의 ‘4% 법칙’ 연구 자체가 주식 비중 50% 이상을 포함한 포트폴리오를 전제로 한다. 순수 채권이나 예금 중심 포트폴리오로는 4% 인출조차 30년을 버티기 어렵다는 것이 일관된 결론이다.

따라서 변동성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목표가 돼서는 안 된다. 은퇴 초기부터 중기까지는 주식과 채권의 비중을 6대4 또는 최소 5대5 수준으로 유지하며 성장 동력을 잃지 않는 것이 진짜 목표가 돼야 한다.

퇴직연금 500조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높은 수익률을 좇는 탐욕이 아니라, 은퇴라는 긴 여정에서 자산이 먼저 지치지 않도록 만드는 정교한 '인출 설계'다. 은퇴 자산의 위험은 시장의 변동성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당신의 인출 습관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범곤 쿼터백연금연구소 연금전문위원·쿼터백자산운용 WM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