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은 금과 유사한 중립성을 가지면서도 디지털을 기반으로 효율성을 제공할 수 있는 자산이다. 비서방 국가들을 중심으로 달러 의존도를 낮추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비트코인이 새로운 중립자산으로 거론되고 있다.

[가상자산 따라잡기]
지난달 뉴욕항에 인근에 정박 중인 유조선 모습./사진=연합뉴스
지난달 뉴욕항에 인근에 정박 중인 유조선 모습./사진=연합뉴스
최근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 대해 통행료를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으로 받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시장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아직 구체적인 정책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이 논의가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의미는 작지 않다.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이러한 지점에서 가상자산이 결제 수단으로 언급됐다는 점은 글로벌 금융 질서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사안은 단순히 ‘비트코인을 쓴다’는 기술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란은 선박당 혹은 배럴당 일정 수준의 통행료를 부과하면서 이를 비트코인, 위안화, 스테이블코인 등으로 결제하도록 요구하는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미국과의 갈등 속에서 금융 제재를 받아 온 이란 입장에서는 달러 기반 금융 시스템을 우회하려는 동기가 분명하다. 다만, 보다 중요한 변화는 국가 단위에서조차 ‘어떤 자산이 정치적 중립성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립 자산 찾는 중앙은행들

이미 이러한 변화의 조짐은 몇 년 전부터 축적돼 왔다. 세계금협회(WGC)에 따르면, 2022년 글로벌 중앙은행들의 금 매입은 약 1082톤으로 55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으며, 이후에도 매년 1000톤 내외의 매입이 이어지고 있다. 이는 과거 10여 년 평균의 2배에 달하는 수준으로, 단순한 안전자산 선호를 넘어 특정 통화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구조적 변화로 해석된다. 사실, 글로벌 중앙은행들의 종전 최고 금 매입 연도였던 1967년은 런던골드풀 붕괴가 시작된 해로 1971년 닉슨 쇼크와 브레턴우즈 체제 붕괴의 서막이기도 했다.
러시아 크라스노야르스크 비철금속 제련소에서 생산한 99.99% 순도 금괴. 사진=연합타스
러시아 크라스노야르스크 비철금속 제련소에서 생산한 99.99% 순도 금괴. 사진=연합타스
달러의 균열, 비트코인이 파고든다
달러의 균열, 비트코인이 파고든다

이 같은 전환의 분기점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었다. 이후 미국이 러시아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 약 3000억 달러를 동결하면서, 달러가 얼마든지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각인됐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를 두고 “달러의 폭정(tyranny of the dollar)”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특히 비서방 국가들을 중심으로 달러 의존도를 낮추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됐으며, 실제 금 매입을 주도한 국가들이 중국, 터키, 인도 등이라는 점은 이러한 변화가 단순한 시장 현상이 아니라 지정학적 선택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금이 대표적인 ‘중립 자산’으로 주목받게 된 것이다. 금은 특정 국가가 발행하지 않으며, 일방적으로 동결하거나 사용을 금지할 수 없는 대표적인 중립 자산이다. 그러나 동시에 물리적 자산이라는 한계를 가진다. 이동과 보관이 어렵고, 글로벌 무역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기에는 구조적으로 비효율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비트코인이 새로운 대안으로 거론되는 것이다. 비트코인은 특정 국가나 기관에 의해 발행되거나 통제되지 않으며, 네트워크상에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 자산이다. 중국, 인도, 일부 이슬람 국가 등에서 여러 차례 금지 조치가 시도됐지만, 완전히 차단하는 데 성공한 사례는 없었다. 비트코인은 금과 유사한 중립성을 가지면서도 디지털 기반이라는 점에서 전혀 다른 효율성을 제공할 수 있는 자산이다.

물론 이전부터 달러 의존도를 낮추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구성된 브릭스(BRICS)는 기존 달러 중심 결제 시스템에 대한 대안으로 공동 결제 인프라 구축과 디지털 화폐 도입을 지속적으로 논의해 왔다. 특히 최근에는 단순한 디지털 통화를 넘어 금, 원유, 천연가스, 희토류 등 실물 자산에 연동된 형태의 결제 단위를 구상하는 움직임이 거론되고 있다. 이는 기존의 신용 기반 통화 시스템이 아닌, 실물 자산 기반의 가치 체계를 통해 통화의 신뢰를 확보하려는 시도다. 최근에도 인도는 2026년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각국의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상호 연결하는 결제 시스템 구축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달러의 균열, 비트코인이 파고든다
효율성에서 앞서는 비트코인

그러나 이러한 시도 역시 근본적인 한계를 가진다. 첫째, 실물 자산 기반 통화는 결국 해당 자산의 보유와 관리, 그리고 가격 산정에 대한 신뢰 문제를 수반한다. 둘째, 브릭스 내부 역시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단일한 통화 체계를 구축하기가 쉽지 않다. 유럽에서조차 유로화라는 ‘연환계’는 그 효율성 못지 않게 국가별 형평성 및 시스템 불안정을 키우는 불안요소로 지적되고 있다.

결국 이러한 한계는 다시금 ‘중립 자산’에 대한 필요성을 부각시켰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비트코인은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금과 유사한 중립성을 가지면서도, 디지털 기반이라는 점에서 전혀 다른 효율성을 제공할 수 있는 자산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특징이 아니라, 글로벌 금융 질서 변화 속에서 점점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고 있다.

이란의 이번 시도는 이러한 가능성이 실제 사용 사례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 중 하나다. 이미 이란은 자국 내에서 채굴된 비트코인을 수입 결제에 활용한 바 있으며, 러시아 역시 국제 무역에서 가상자산을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해왔다.

물론 현실적으로 비트코인이 단기간 내에 글로벌 무역 결제 통화로 자리 잡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가격 변동성이 크고, 글로벌 금융 인프라와의 연결성도 제한적이다. 무엇보다 기존 금융 질서를 유지하려는 국가들의 견제 역시 강하게 작용할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시도는 국제 정치적 긴장을 더욱 고조시킬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실제 채택 여부가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변화는 국가들이 달러를 대체할 수 있는 결제 수단을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기존에는 위안화 등 제3국 통화가 대안으로 거론돼 왔지만, 이는 또 다른 정치적 종속 관계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서로 간의 신뢰가 충분하지 않은 지정학적 환경에서는 특정 국가의 통화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리스크가 된다.

당장은 아니지만, 방향이 바뀐다

특히 중동 지역의 움직임은 이러한 흐름을 더욱 가속화할 가능성이 있다. 중동 산유국들은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새로운 금융 실험을 시도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달러 의존도를 낮추려는 강한 유인을 가지고 있다. 페트로 달러 체제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점 역시 이러한 변화의 중요한 배경이다.

비트코인의 지정학적 활용도가 당장 높아지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더 이상 이를 단순한 투기 자산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변화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으로서 지정학적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국가 단위의 의사결정에서도 그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다.

결국 이란의 이번 시도와 브릭스의 움직임은 하나의 공통된 질문으로 수렴된다. 글로벌 경제에서 ‘중립적인 결제 수단’은 존재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답이 더 이상 특정 국가의 통화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달러 중심의 금융 질서는 여전히 견고하지만, 그 균열 역시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박태우 스페이스바 벤처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