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송 총재가 이끄는 한국은행이 새롭게 출범한다. 5월부터 통화정책을 이어받으며, 고물가·고환율 등 복합 위기 속에서 새로운 리더십이 시험대에 올랐다.
[스페셜] 중앙은행 새판짜기
신현송 총재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자면, 이번 인사는 다소 파격적이다. 과거에는 한국은행 총재를 임명하는 데 느슨한 원칙이 있었다. 일본에서 시작된 타스키가케(たすき掛け)라는 관행이다. 타스키가케란 일본 전통 의상(기모노)의 넓은 옷소매가 운동이나 일을 할 때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묶는 끈을 말한다. 왼쪽과 오른쪽 양어깨 위에서 겨드랑이 밑을 지나 등 뒤에서 X자로 교차한 뒤 묶는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일본은행 총재에 관료와 일본은행 출신이 번갈아(교차하여) 임명됐으며, 한국도 대체로 이를 따랐다.
외부 출신 총재 연속 발탁…76년 관행을 깨다
그런데 일본이 그 관행을 깼다. 관료 출신의 구로다 하루히코가 8년간 일본은행을 지휘한 뒤 지금은 학자 출신의 우에다 가즈오가 그 자리를 맡고 있다. 1998년 일본은행법 개정을 통해 일본은행의 독립성이 강해진 만큼 그 자리를 반드시 일본은행 출신에게 맡길 이유가 줄어든 결과다. 한국은행도 비슷하다. 아시아개발은행(ADB) 수석 이코노미스트와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국장을 거친 이창용 총재에 이어서 국제결제은행(BIS) 통화경제국장을 역임한 학자가 그 자리를 맡았다. 두 번 연속으로 한국은행 외부에서 총재가 임명되는 것은 76년의 역사에서 처음이다.
지금 신현송 총재 앞에는 너무나 많은 과제가 쌓여 있다. 미국과 이란 전쟁 발발 이후에 벌어지고 있는 각종 돌발 변수를 뚫고 돈의 흐름과 물가를 잘 관리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그와 더불어 여러 정부에 걸쳐 누적돼 온 가계부채를 잘 다스려야 한다. 나아가 0%대로 주저앉은 잠재성장률과 인구 고령화 등의 해묵은 과제들도 만만치 않다. 미증유의 국가채무 확대, 인공지능(AI) 혁명으로 인한 청년들의 취업 부진, 스테이블코인으로 대변되는 지급 서비스와 금융 인프라의 대변혁, 기후변화 등 생소한 과제들도 해결해야 한다. 그 과제들을 잘 풀어 나가려면 실력을 넘어서 엄청난 행운까지 필요하다.
한국은행이 거시건전성을 관리한다지만, 한국 정부는 생리적으로 권한을 공유하는 것을 싫어한다. 2011년 ‘금융 안정’이라는 말을 한국은행법에 추가할 때 주무 부처인 재정경제부보다는 금융감독 당국이 훨씬 결사적으로 반대했다(필자가 그때 한은법 개정의 최일선에 있었다). ‘감독권 침해’라는 이유를 내걸었다. 그리하여 한국은행은 지금도 금융 시스템을 점검하기 위해서 은행들과 직접 접촉할 때 제약이 많다. 그러니 신 총재가 금방 실망하고 한계를 느끼기 쉽다.
쾌속정이 아닌 유람선…신현송에게 맞지 않는 옷
그나마 한국은행마저도 최고 성능을 가진, 쾌속정이 아니다. 천천히 항해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육중한 유람선에 가깝다. 밖에서 보기에는 한량없이 고요해서 ‘절간’이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전임 이창용 총재는 임기 내내 그 고정관념과 정체된 조직 문화를 바꿔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농산물 수입, 교육 제도 개편, 노동 시장 개방, 연명 치료 등 다방면에 걸쳐서 세상을 향해 화두를 던지면서 뉴스의 중심에 섰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싱크탱크가 되려는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한은이 화두를 던지자 소관 부처 장관이 기자간담회를 열고 조목조목 직접 반발하기도 했다.
그런데 농산물 시장 개방, 교육 제도와 노동 시장 개혁, 연명 치료는 한국은행의 업무 영역이 아니다. 몇 단계를 거쳐 추론해야만 비로소 통화 정책이나 물가 안정과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이창용 총재의 리더십은 외곽부터 건드리는 아웃복싱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은 내부와 퇴직자 사이에서는 그런 스타일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한은의 변신을 향한 이창용 총재의 고뇌와 시도는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 제대로 평가될 것 같다.
역시 외부 출신으로서 한은의 체질을 개선하는 데 앞장섰던 김중수 총재가 그러했다. 수없이 많은 직장을 다녔던 김중수 총재는 직원들에게 “온실 속의 화초”라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나아가 “불이 꺼지지 않는 한국은행”이 돼야 한다면서 깊은 연구와 고민을 끝없이 주문했다. 그때 직원들은 발끈했지만, 돌아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웃복싱은 화려해서 금방 눈에 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Float like a butterfly, sting like a bee)”는 무하마드 알리의 복싱 스타일이 대표적이다. 탁월한 명성과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의견을 개진했던 이창용 총재의 한국은행이 딱 그러했다. 하지만 신 총재가 똑같은 스타일을 고수할 수는 없다. 현재의 한국은행은 당장의 시급한 과제들을 많이 안고 있다 보니 화려함까지 갖출 수는 없다. 집요함을 통해 유효한 펀치를 노려야 한다. 인파이팅이다.
인파이팅은 보이는 것보다 효과를 중시하는데, 그 분야의 대표는 마이크 타이슨이다. 그는 “누구나 계획은 있지. 내 주먹을 한 방 맞아보기 전까지는 말이야(Everyone has a plan until they get punched in the mouth)”라는 말로 유명하다. 한국은행의 주먹은 통화 정책이다. 신 총재가 시들어 가는 실물경제에 핏기가 돌게 하고, 부정맥 증세를 보이는 금융 시장과 외환 시장을 안정시키려면, 글이나 말이 아니라 돈을 동원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신 총재가 짚어야 할 것들이 있다.
돈 풀기와 물가 관리 사이 ‘정교한 저글링’
첫째, 한국 경제를 향한 한국은행의 금전적 기여다. 1960년대 초 산업화가 진행된 때로부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한국은행의 자산은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20~30%를 차지했다. 전 세계 중앙은행 중 압도적인 1위였다. 다시 말해서 중앙은행이 돈을 풀어서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점에서 한국은행이 미 중앙은행(Fed), 영란은행, 분데스방크, 프랑스은행, 일본은행 나아가 중국인민은행과 인도 준비은행까지 제치고 세계 최고였다. 그렇다고 한국은행이 인플레이션 관리에 크게 실패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은행 내부에는 가급적 자산 규모를 늘리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풍조가 있다. 반면 다른 중앙은행들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생각을 바꿨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미친 듯이 돈을 푼 것이다. 양적완화(QE)다. 한동안 줄이는가 싶더니 코로나19가 시작되자 다시 돈을 풀었다. 그 결과 미국(2007년 6% → 2021년 38%), 유로 지역(18% → 67%), 영국(8% → 44%), 일본(23% → 132%) 중앙은행들의 자산이 일제히 폭발적으로 늘었다.
소극적 한은 vs 돈 쏟아 부은 Fed
중앙은행의 자산이 늘어나는 것은 그만큼 돈을 많이 풀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은행의 자산 확대가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자칫 물가가 불안해질 수 있다. 하지만 자산을 늘리지 않는 것을 지고지선으로 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실물경제의 성장에 맞추어 정확히 그 정도만 자산을 늘리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던 진성어음주의(real bills doctrine)는 100여 년 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더불어 구시대의 유물로 사라졌다.
그에 비해 한국은행은 그다지 돈을 많이 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국가부채는 빠르게 늘고 있다. 명목 GDP 대비 50%를 이제 막 돌파했고, 2030년에는 60%도 넘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제1ㆍ2차 세계대전 당시 주요국의 상황과 비슷하다. 그러한 때 중앙은행이 팔짱만 끼고 아웃복싱을 고집하는 것이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아니다.
자산이 늘어나는 것과 물가를 관리하는 것은 별개다. 물체의 낙하법칙을 거스르면서 멋지게 저글링(juggling)하는 것이 저글러의 묘기이듯이 돈을 풀면서도 물가를 잡는 것이 중앙은행의 묘기다. 한국 경제는 지금 금융 전문가인 신현송 한은 총재에게 그런 묘기를 바라고 있다. 참고로 케빈 워시 차기 Fed 의장은 자산 규모를 줄이되 금리는 낮추겠다고 한다. 통화 정책의 저글링이다.
신 총재가 두 번째로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지급혁명(payment revolution)에 대한 능동적 대처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지급혁명이 무엇인지는 세상이 다 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지난 10년간 대응해 온 행적은 솔직히 낙제점에 가깝다.
겉도는 지급혁명…한은이 선두에 설 기회
10년 전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라는 멋진 개념과 단어를 만들었는데, 실제 그것을 구현한 나라는 중국밖에 없다. BIS가 중앙은행들을 설득해서 CBDC의 국제적 사용을 실험하는 엠브리지(mBridge)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미국이 참여를 거부하고 중국, 아랍에미레이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미국과 거리를 두는 나라들만 참가하고 있다. 그래서 유명무실하다.
한국과 미국은 아고라(Agora)라는 별도의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CBDC를 이용한 국제 송금이 어떤 편익과 비용을 수반하는지에 관해 올해 상반기경 1차 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그런데 지난해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스테이블코인을 집중 육성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CBDC에 관한 모든 논의가 엉거주춤한 상태에 빠졌다. 한마디로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정부와 업계에 휘둘리면서 지급혁명을 겉돌고 있다. 먼저 치고 나가는 중앙은행이 없다.
다른 어떤 사람도 할 수 없지만, 신 총재가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그런 일이다. 신속성과 보안성, 확장성 면에서 우수한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하되, 현재의 금융 시스템을 뒤흔들지 않으며, 미국이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현재의 SWIFT를 대체하면서도 미국이 안심할 수 있는 나라가 새로운 국제 송금 시스템을 관리한다면, 미국이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종이 한 장으로 독일을 구한 샤흐트처럼
신 총재의 세 번째 과제는 국제 협력이다. 그는 영국에서 자랐고, 미국에서 가르쳤다. 그래서 미국과 유럽 양 대륙에 친구와 지인들이 많다. 그것을 자산으로 삼는다면, 한국 금융계에 엄청난 플러스가 될 수 있다. 특히 한국 경제가 위기를 맞았을 때 그 인맥은 엄청난 힘이 된다. 그 분야의 아주 좋은 예가 햘마르 샤흐트 독일 라이히스방크 총재다. 그는 바이마르공화국이 발탁한 민간 금융 전문가로서 그의 첫 역할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치유하는 것이었다. 당시 독일은 엄청난 전쟁 배상금 문제 등으로 1년 동안 1조 %라는 상상불가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샤흐트는 취임한 지 닷새 만에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영란은행으로 달려갔다. 당시 영국은 금본위제도의 종주국으로서 엄청난 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몬테규 노먼 영란은행 총재에게 금을 빌려달라고 애원했다. 크리스마스 휴가 때 자기 휴양지까지 찾아와서 애원하는 샤흐트의 유창한 영어에 노먼 총재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래서 금을 빌려줬더니 독일 화폐에 대한 국제 신용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끝났다. 지금으로 치자면, 영ㆍ독 중앙은행 간 통화스와프 계약이 독일 경제를 살린 것이다. 거기에는 샤흐트의 어학 실력과 설득력, 그리고 인맥이 결정적이었다.
샤흐트의 국가적, 그리고 국제적 활약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29년 제1차 세계대전과 관련한 독일의 배상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국제회의가 열렸다. 대공황 때문에 세계 경제가 죽어 갈 때 승전국들은 독일에서 받는 돈으로 경제를 살리겠다고 기세등등했다. 각국 외교관들은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서류를 들고 독일을 닦달했다. 그때 샤흐트는 종이 한 장만 들고 각국 대표단을 개별적으로 접촉했다. 그리고 영어, 그리스어, 프랑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각국을 각개 격파했다. 그 결과 독일 배상금은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샤흐트는 일약 국민영웅이 돼 귀국했고, 그의 명성은 훗날 집권한 히틀러도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에 허덕이던 이스라엘은 2005년 유태계 미국 경제학자인 스텐리 피셔를 중앙은행 총재로 초빙했다. 2008년 자산 규모 5위의 노던록 은행의 파산으로 영국 금융계가 휘청거리자 영국은 마크 카니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현 캐나다 총리)를 모셔 와서 영란은행 총재로 임명했다. 프로 축구나 프로 야구처럼 이제는 중앙은행 총재도 외국인 전문가를 초빙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자본이 국경을 마구 넘나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오랜 인사 관행을 깨고, 외국에서 오래 생활하던 사람을 한국은행 총재로 임명했다. 지금 신 총재의 어깨는 아주 무겁다. 온갖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려면, 파격이 필요하다. 금리 조절과 더불어 자산 규모도 신축적으로 조절하는 용기와 실험이 필요하다. 지급혁명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대응해야 한다. 국제 협력은 더욱 더 절실하다.
한국 경제가 외형보다는 취약하기 때문이다. 수출입 규모나 외환보유액 면에서는 세계 10위 수준에 이르렀지만, 작은 일만 생기면 금융 시장이 요동친다. 환율은 1500원까지 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20세기 초 독일의 샤흐트와 같은 국제 인맥과 설득력을 가진 신 총재의 활약이 절실하다. 부디 신현송 호가 많은 일을 이루기를 기대한다.
차현진 호서대 디지털금융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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