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과거 철강, 인터넷, 전기차 산업에서 보여준 '굴기'의 공식을 반도체에 적용하고 있다. 막대한 정책 자금과 거대 내수 시장, 자본시장을 동원한 독자적인 생태계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투자 인사이트]
2000년대 중국은 철강·조선 중심의 제조업 육성에 나섰다. 당시만 해도 글로벌 시장에서는 ‘중국 제품은 가격은 싸지만 품질은 떨어진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대규모 인프라 투자와 금융 지원, 세제 혜택을 바탕으로 생산능력을 공격적으로 확대했다. 동시에 내수 부동산 시장 성장과 도시화가 맞물리며 막대한 수요가 형성됐다. 결국 중국은 규모의 경제를 기반으로 글로벌 공급망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철강 생산량과 조선 수주량에서 세계 1위 국가로 올라섰다.
내수·자본·정책의 삼각편대
이후 등장한 것이 인터넷 굴기였다. 중국은 미국 플랫폼 기업들이 이미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상황에서도 독자 생태계 구축에 성공했다. 핵심은 ‘거대한 내수 시장’이었다. 중국 정부는 구글, 페이스북 같은 해외 플랫폼 접근을 제한했고, 그 빈자리를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 등 중국 기업들이 빠르게 채웠다.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중국이 독보적인 점유율을 보유한 산업은 전기차와 2차전지 산업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중국 자동차 산업은 기술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전기차를 미래 전략산업으로 규정하고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했다. 동시에 내연기관의 번호판 발급을 제한하는 번호판 규제와 친환경차 의무 판매제 등을 활용해 전기차 수요를 키웠다.
그 결과 CATL은 세계 최대 배터리 기업으로 성장했고, BYD는 테슬라와 경쟁하는 글로벌 전기차 기업으로 부상했다. 흥미로운 점은 중국이 단순히 완성차만 키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배터리 셀뿐 아니라 소재부터 자율주행 모델에 이르기까지 공급망 전체를 구축했다. 즉, 특정 기업 하나가 아니라 산업 생태계 전체를 키우는 방식으로 접근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중국은 같은 방식으로 반도체의 독자적 생태계 구축을 시도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2024년 5월 반도체 산업 대기금(투자기금) 3기를 출범하며 향후 10년간 약 74조 원(약 3440억 위안) 규모의 정책자금을 인공지능(AI)과 첨단 반도체 산업에 투입할 것임을 발표했다. 다만 문제는 반도체 산업이 철강, 인터넷, 전기차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은 산업이라는 점이다.
철강과 2차전지는 거대한 중국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규모의 경제를 구축할 수 있었지만, 반도체는 미국 중심의 밸류체인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글로벌 AI 생태계는 미국과 미국의 우방국으로 손꼽히는 국가들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이 중국 반도체 산업을 강하게 견제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과정에서 시장의 시각 역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중국의 기술력은 엔비디아를 대체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중국 AI 산업 전반의 성장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의 GPU 수출 통제와 첨단 장비 제한을 강화하던 시기만 해도 시장은 중국 AI 산업의 성장 둔화를 예상했다. 그러나 현실은 예상과 다르게 전개됐다. 미국의 제재 이후에도 중국 빅테크들의 AI 투자와 데이터센터 구축은 계속 확대됐고, 화웨이와 SMIC 역시 AI 칩과 고성능 반도체 생산 역량을 빠르게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특히 딥시크 사례는 시장의 평가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과거 AI 산업에서 최고 성능 GPU 확보 여부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여겨졌다면, 최근에는 가격 경쟁력과 공급 안정성, 그리고 산업 생태계 내재화 수준 역시 중요한 변수로 부각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절대 성능에서는 여전히 엔비디아가 압도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
성능보다 효율, 기준이 바뀐다
그러나 AI 산업이 본격적으로 확산될수록 모든 기업이 최상위 GPU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추론 중심 AI 시장이 커질수록 가격 대비 효율성과 안정적 조달 능력의 중요성 역시 함께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최근 시장이 중국 반도체 산업을 다시 보기 시작한 배경 역시 여기에 있다.
자본시장 흐름 역시 이러한 변화를 보여준다. 특히 중국판 나스닥으로 불리는 과창판(STAR market)은 중국 반도체 굴기의 핵심 자금조달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일반적인 상장 시장이 기업의 이익 안정성과 재무 요건을 중시한다면, 과창판은 연구개발(R&D) 역량과 핵심 기술, 전략산업으로서의 중요성을 더 크게 반영한다. 반도체처럼 초기 투자 부담이 크고 흑자 전환까지 장기간이 소요되는 산업에는 이러한 제도가 특히 중요하다. 정부 대기금이 반도체 산업에 직접 정책자금을 공급한다면, 과창판은 자본시장을 통해 민간 자금까지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물론 리스크는 존재한다. 첨단 공정과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서는 여전히 미국·대만·한국 기업들과 기술 격차가 존재한다. 국가 보조금 의존도가 높다는 점 역시 부담 요인이다. 과거 전기차 시장의 경우 국가 보조금이 중단된 이후 시장의 성장률이 둔화된 바 있기 때문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시장의 기준이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시장은 중국 반도체 산업을 ‘불가능한 영역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최고 기술력을 단기간에 따라잡을 수 있느냐보다, 거대한 내수 시장과 정책 지원을 기반으로 산업 경쟁력을 키워 갈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되고 있다.
수요자의 가격 저항은 결국 공급선 다변화 시도로 이어질 수 있고, 이는 중국 반도체 생태계도 다른 투자 축으로 검토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단, 투자자가 중국 반도체 기업의 주식에 투자하는 것은 정보 접근성, 유동성, 규제 리스크 측면에서 부담이 크다. 따라서 개별 종목보다 중국 반도체 밸류체인 전반에 분산투자 하는 상장지수펀드(ETF)나 펀드를 활용하는 방식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만약 미·중 관계, 양안 갈등 등으로 인해 중국의 단일 국가에 투자하는 것이 여전히 부담스럽다면 대만이나 홍콩, 한국 등 아시아 지역 전반의 반도체 기업에 분산투자 하는 상품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김수빈 SC제일은행 투자전략상품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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