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리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DC형과 IRP 가입자는 원리금보장상품을 넘어 실적배당상품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스스로 운용하기 어렵다면 금융사의 포트폴리오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자산배분 펀드에 분산 투자하는 것도 방법이다
[마켓 리더의 시각]
하지만 인플레이션이 일상화되고 저금리가 고착화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돈의 가치를 지키려면 더 이상 예금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여기에 최근 주가 급등까지 겹치며, 퇴직연금 적립금을 예금에만 두었던 직장인들은 ‘FOMO(Fear Of Missing Out·기회상실공포)’를 체감하고 있다.
중제: DC·IRP로 판이 바뀐다
최근 퇴직연금 시장에서는 ‘머니 무브’가 뚜렷하다. 돈의 흐름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첫째, 확정급여(DB)형에서 확정기여(DC)형으로 자금이 이동하고 있다. 2015년 말 28.4조 원이던 DC형 적립금은 2025년 말 137조 원으로 늘며 연평균 17% 증가했다. 같은 기간 DB형 적립금은 86.3조 원에서 228.9조 원으로 늘었지만, 증가율(연평균 10.2%)은 DC형에 못 미쳤다. 아직 적립금 규모는 DB형이 크지만, 성장의 속도는 DC형이 훨씬 가파르다.
이 변화를 밀어 올린 힘은 두 가지다. 하나는 기업 임금 체계의 변화다. DB형은 호봉제·연공서열식 임금 체계를 가진 기업, 그리고 임금 상승률이 높은 근로자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반면 임금피크제나 연봉제를 시행하는 기업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임금피크 이후 급여가 줄거나 성과 부진으로 연봉이 깎이면 DB형에서 산정되는 퇴직급여도 함께 줄어들 수 있다. 이런 불이익을 피하려면 DB형에서 DC형으로 갈아타는 선택지가 현실적이다.
또 하나는 임금 상승률 둔화와 기대수익률 상승이다. 기대수익률이 임금 상승률을 웃돈다면, DB형에 적립금을 맡겨 두기보다는 DC형으로 전환하는 편이 유리할 수 있다. 저성장이 장기화되며 임금 상승률은 낮은 수준에 머무는 반면, 투자 지역과 상품이 다변화되면서 투자 기회는 넓어졌다. 특히 최근 주가가 급등한 뒤에는 DB형에서 DC형으로 갈아타는 직장인도 눈에 띄게 늘었다.
둘째, 은행과 보험사에 머물렀던 DC형 적립금이 증권사로 향하고 있다. 원리금보장 상품 중심으로 운용하던 시기에는 은행·보험사 비중이 높았지만, ‘저축에서 투자로’ 무게추가 옮겨 가며 증권사 비중이 빠르게 커지는 중이다. DC형 적립금 중 증권사 비중은 2020년 15.6%에서 2025년 27.1%로 크게 상승했다. 같은 기간 은행 비중은 63.5%에서 56.9%로 낮아졌고, 생명보험사·손해보험사 비중도 각각 13.6%→11.3%, 2.5%→1.5%로 하향 추세다.
중제:증권사로 몰리는 돈, ETF가 이끈다
증권사의 성장세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키워드가 상장지수펀드(ETF)다. DC형 가입자는 원리금보장 상품뿐 아니라 다양한 실적배당 상품에도 투자할 수 있는데, 국내 상장 ETF도 여기에 포함된다. 다만 모든 금융 회사가 ETF 투자를 지원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은행과 생보사도 DC형 가입자에게 ETF 상품을 제공하지만, 실시간 매매는 제한되는 경우가 있다. 실시간으로 ETF를 사고팔고 싶다면 증권사를 선택해야 한다.
셋째, 개인형퇴직연금(IRP) 적립금이 빠르게 불어나고 있다. 2020년 말 35.5조 원이던 IRP 적립금은 2025년 말 130.9조 원으로 늘었다. 연평균 29.8%씩 성장한 셈이다. 같은 기간 DB형은 153.9조 원에서 214.6조 원(연평균 8.3%), DC형은 66.1조 원에서 137조 원(연평균 15.7%)으로 늘었는데, IRP 증가 속도와는 차이가 난다.
IRP 확대의 배경도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먼저 세액공제 혜택이 커졌다. IRP 가입자는 납입액에 대해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는데, 2023년부터 한도가 연 700만 원에서 900만 원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제도 변화 못지않게 결정적이었던 것은 2차 베이비부머(1964~1974년생)의 대량 퇴직이다. 이들이 퇴직급여를 IRP로 옮기면서 적립금 증가에 속도가 붙었다.
그동안 DB형 중심으로 성장해 온 퇴직연금 시장이 DC형과 IRP 중심으로 옮겨 가고 있다. DB형은 회사가 적립금을 운용하고 성과에 대한 책임도 진다. 가입자는 운용 성과와 무관하게 사전에 정해진 기준에 따라 산정된 퇴직급여를 받는다. 회사가 어떻게 굴리든, 가입자 입장에서는 관심을 크게 둘 필요가 없었던 구조다.
반면 DC형은 다르다. 가입자가 자신의 퇴직계좌 적립금을 어디에 투자할지 스스로 결정하고, 운용 성과에 대한 책임도 본인이 진다. 성과가 좋으면 퇴직급여가 늘고, 나쁘면 줄어든다. IRP도 마찬가지다. 퇴직자가 IRP로 옮긴 퇴직금은 55세 이후 연금으로 받을 수 있는데, 운용 성과에 따라 연금을 더 많이, 더 오래 받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변화는 ‘보이지 않던 자산(invisible asset)’이 ‘보이는 자산(visible asset)’이 됐다는 점이다. DB형 가입자는 퇴직 전까지 내 퇴직금이 얼마나 쌓였는지 체감하기 어렵다. 하지만 DC형과 IRP 가입자는 적립금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인 유홍준 교수는 책에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고 했다. 퇴직연금도 비슷하다. 보이기 시작하면 관심이 생기고, 관심이 생기면 관리에 신경을 쓰게 된다.
그렇다면 DC형과 IRP 적립금은 어떻게 운용하는 게 좋을까. 먼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자. ‘시중금리 정도의 수익이면 충분한가.’ 그렇다면 정기예금 같은 원리금보장 상품이 맞다. 아니라면 질문이 바뀐다. ‘투자 경험과 역량, 그리고 시간을 감당할 준비가 됐는가.’ 준비가 됐다면 펀드와 ETF를 활용해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정기적으로 리밸런싱하면 된다.
금융 회사의 ‘포트폴리오 구독’ 서비스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구독을 신청하면 전문가가 구성한 포트폴리오를 정기적으로 받아보고, 그대로 실행할 수도 있다. 다만 모든 금융 회사가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고, 회사마다 서비스 명칭도 다르다. 가입 전에는 제공 여부와 이용 방식부터 확인해 두는 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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